사진=한송희 에디터
사진=한송희 에디터

고향의 노래

이재섭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선생님~, 지난번 숙제로 내주신 '고향의 노래', '향수'를 어제 여러 번 들어보고, 따라 해 봤습니다. 너무 좋은 곡들이어서, 잘만 부르면 어르신들 뿐 아니라 모든 청중들이 감동을 받을 것 같습니다. 헌데, 제가 잘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언젠가부터 외우는 것이 잘 안 되고, 그러다보니 습관적으로 외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음정은 물론, 노랫말을 정확히 암기하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요. 참 멋지고 가슴을 울리는 곡들입니다. 특히 '고향의 노래'는 제게 익숙하지 않은 곡인데도 아주 낮선 곡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저의 뇌리 어디에 그 노래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무서리', '날개 푸른 기러기', '빈 들판에 서보라' 등의 시어는 처음 듣는 순간부터 제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노래를 듣다가 시를 다시 쓰고 싶은 생각이 들어

 

문득, 다시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 시 쓰던 소년이 은퇴기에 접어들어 다시 시인지 수필인지 토설인지 모를 글들을 써내려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시라고 격려해 주시는 분들 덕에 석탄이라는 낮선 이름의 시집을 내기도 했지요.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명시들을 만날 때마다 나에게는 왜 저런 시어들이 떠오르지 않을까?’ 속상해 했습니다. 시 쓰기가 겁나고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하찮은 시라도 어떤 독자에게 남다른 위로와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제 시집을 읽은 분들의 반응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 시를 외우고야 하루를 시작하고 마친다고 하시는 분도 만났습니다. 회복이 어려운 깊은 병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고 은둔하던 사진작가 한 분은, 제 영상 시 가파도에 가고 싶다를 본 후 단숨에 제주도로 달려가셨습니다. 거기서 일렁이는 바다를 찍고, 한라산 오름도 찍고, 육지에 올라 설악 절경도 찍어 명품 사화집(詞華集)’을 완성했습니다. 아내에게 그 작품을 헌정하고 고요히 떠났습니다.

 

시는 가장 먼저 자신을 위로하는 친구 사진

 

거칠기는 하지만 저의 내면의 속울음을 거르지 않고 토해낸 시는 가장 먼저 저를 위로하고 다독여줍니다. 가끔 휴일에 혼자일 때에는 제 시집을 꺼내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제 시와 관련, 특별히 기억나는 한 분이 있습니다. 판교 노인복지관 강의실 가장 앞자리에서 제 영상시 무사하지 않은 사랑을 꿈꾸며를 들으며 계속 눈물을 훔치시던 팔순의 할머니이십니다. 그분의 눈물의 의미를 나는 알 수 없지만, 그 위에 비친 윤기 나는 머리를 한 꿈 많은 한 소녀를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시가 마음에 맞는 작곡가를 만나 곡조를 띤 노래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 걷잡을 수 없는 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제 '고향의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따라 부르다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때 저는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만났습니다. 이 노래는 죽어가는 생명을 소생시키는 향기로 남아 오래오래 잠자는 많은 사람들을 흔들고 깨우게 될 것입니다.

 

시에 곡을 붙인 고향의 노래같은 향기로운 사람으로 살았으면

 

모두가 그런 노래같이 따뜻한 향기를 내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본향으로 돌아오라는 것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의 '숙제'가 아닌가 합니다. 숙제는 누구에게나 참 힘들고 하기 싫은 것입니다. 하지만 삶의 고비마다 주어지던 숙제들을 힘에 겹도록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 숙제들 하나하나가 나를 지켜준 파수꾼이고 성장의 자양분들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거칠기만 하고 어떤 의미도 담기지 않은 돌덩이 같은 나를 깨트리고 다듬어서 꿈을 꾸게 하고 의미 있는 형상으로 만든 조각가의 칼이었습니다.

 

세상은 얼핏 보면 평온하고 아름다운 듯 보이지만, 그냥 버려두면 뒤틀리고 무질서한 세계, 즉 엔트로피(entropy)의 세계로 향합니다. 인간의 본성도 그런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겼을까?” 오래 고민하고 절망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우주, 자연, 인간의 창조가 기록된 성경에는, 태초에 세상이 창조될 때의 모습들이 '보기에 심히 좋았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름답고 조화롭고 자유로운 피조물의 세계가 엉겅퀴와 가시덤불로 뒤덮여 변형되고 변질되었습니다. 결국 무질서와 무의미의 엔트로피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죠.

 

자연은 그냥 버려두면 엔트로피의 세계로 향해

 

그래서 파괴적이고 적대적인 세력이 자연과 사람의 질서를 지배하게 되었고, 인간은 무의미에 빠지고, 관계는 갈등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좆으며 허무한 죽음으로의 행진을 계속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생의 번뇌, 고해의 세계, 또는 숙명이라 부르며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부조리와 불의와 부조화의 세상, 이성과 선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인간 세계의 모습은, 이렇게 태초의 모습을 잃은 데서 오는 형벌인 것 같습니다. 그 명백한 증거가 저의 볼 품 없는 삶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태초 이전에 창조주가 부어주신 본래의 모습, 그분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아름다움과 조화와 사랑의 흔적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고요 속에서는 들리는 생명의 소리가 씨앗처럼 숨어 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나는 믿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맘속에 일렁이는 나 자신과 인간세계의 광폭함에 대한 실망과 분노, 선과 자유에 대한 희구, 죽음을 넘는 사랑으로의 무한 의지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 어디에는 아름다운 생명의 씨앗이 숨겨져 있어

 

우리는 끊임없이 공허한 말과 행위의 쓰레기를 매일 양산하는 엔트로피의 삶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안티 엔트로피(Anti-Entropy), 즉 넨트로피(Nentropy)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고향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자꾸 흘렸던 눈물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돈되고 부드럽고 순수하고 따뜻한, 그래서 아름답고 눈물 나고 가슴 뜨거운 삶의 흔적을 정말 세상에 남겨놓을 수 있을까요?

 

세상의 대부분의 활동들은 하면 할수록 공허해지고, 조각나고, 결국 무질서해집니다. 즉 엔트로피의 세계에 빠질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말 하나, 행동 하나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을 정화시키고 질서를 회복시키고 생명을 일으키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시와, 노래와 그림과 조각과 춤이 어쩌면 우리를 엔트로피의 경로에서 벗어나게 해 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넨트로피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주는 거룩한 행위, 탄소를 흡수하여 생명을 조합하는 빛, 영혼을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 행동, 삶 전체가 문학이 되고 예술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참된 인문학의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삶을 소망합니다.

철없는 소년이던 제가 어느덧 반백의 나이가 되었습니다. 어쩌다 어르신들 앞에서 '고향의 노래'를 배워 불러보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노랫말을 읽고 따라 부르다가 이런 두서없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눈이 내린다고 합니다.

 

이재섭 교수
이재섭 교수

 

이재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Kent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한 공적연금 전문가다.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글로벌리더십경영융합대학원에서 은퇴설계 전문과정주임교수이며 정책 칼럼니스트다. 등단 한 시인, 수필가로서 청년과 은퇴자들을 위한 꿈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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