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작가들의 콜렉션... 작가와 작가 사이의 로맨스까지
일본근대문학의 융성, 그 뒤에는 근대화의 자부심이 있다

[일러스트=한송희 기자]
[일러스트=한송희 기자]

12월 10일. 도쿄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나와 전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 계획을 취재 목적으로 바꾸게 되면서, 이미 첫 번째 목적지는 정해둔 상태였다. 바로 일본 근대문학관(日本近代文学館)이었다.

언젠가 현지 친구에게 일본 근대 문학관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그곳은 일본인들에게도 문학을 좋아하지 않는 이상, 상당히 마니악한 곳인데...” 라는 대답이 돌아온 적 있었다.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가장 먼저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일본근대문학관에서 가까운 고마바토다이마에(駒場東大前)역에서 내리자마자, 문학관의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표지판이 알려준 대로 조용한 주택가를 약 5분쯤 걸었을까. 웬 고풍스러운 전통 일본식 출입구가 필자를 맞이했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기둥에 달린 명패에는 호쾌한 터치로 고마바 공원 동문(駒場公園東門)이라고 써져 있었다. 문 안쪽에는 이름 그대로 아름다운 정원과도 같은 공원이 나타났고, 왼편에는 옛스러운 일본식 저택이, 오른편에는 거대한 현대식 건축물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일본근대문학관에 도착한 것이다.

[일본 조정의 지시로 그려진 '黑船來港']
[19세기 일본 조정의 지시로 그려진 '黑船來港'사건.]

일본사에 있어, 일본의 근대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로부터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할 때까지의  시기(1869~1945)를 뜻한다.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트리며 전국 통일을 달성, 일본 전역을 통제하게 된 에도 막부는, 서방 세력으로 유입된 기독교 세력을 막기 위해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구 세력과의 교역을 모조리 끊어버리는 쇄국 정책을 펼친다. 이는 1633년 이후 약 200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러나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와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는 무력 시위를 하자, 쇄국을 일관되게 유지하던 에도 막부(江戸幕府)는 당황했다. 아시아에서 위세를 떨치던 청나라군 20만 명이, 고작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2만 영국군에게 대패하고 무릎을 꿇었던 제1차 아편전쟁이 고작 10여 년 전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력하게 개항을 하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막부에게는 비난이 쏟아지며 일본의 여론은 분열했다. 기존 막부 체제의 질서를 지키려는 막부, “천황 폐하를 도로 권력의 정점에 옹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자”라는 존황양이(尊皇攘夷)사상과,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막부를 타도하자”는 토막파(討幕派)로 나뉜다. 

[사진설명 = 천황을 따르는 존황파(좌)와 막부를 따르는 사무라이(우)들이 벌인 세이난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존황파의 무사들은 군인이 아닌 경찰로 입대하여 싸웠다고 한다.]
[사진설명 = 천황을 따르는 존황파(좌)의 사무라이들과 막부를 따르는 사무라이(우)들이 벌인 세이난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존황파의 사무라이들은 군인이 아닌 경찰로 입대하여 싸웠다고 한다.]

개항 이후 일본의 정국은 더욱 파란만장해졌다. 막부 내 최고 보좌관직 다이로(大老)의 자리에 오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가 토막파 낭인들에 의해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피살을 당하거나, 존황파 조슈 번의 무사들이 서방 군함에 선제 공격을 했다가 패퇴했던 시모노세키 전쟁, 막부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제 2차 조슈 정벌 등, 일본 열도에 피내음과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이러한 사건들 끝에, 결국 막부는 스스로 폐지를 선언한 후 모든 권력을 천황에게 봉환한다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이루어진다. 또한 ‘존황양이’를 외치던 존황파는 서구 세력의 강력함을 온 몸으로 깨달은 이후, 서구를 배척하던 태도를 버리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태세 전환을 한다. 

메이지 천황의 헌법을 발표하는 '헌법발포칙어(憲法發布勅語)' 이 때를 기점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막이 올랐다.

그리고 1868년.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이 옥좌에 오르고, 중앙 집권화와 서양식 입헌군주제, 서양 문물의 유입이, 군제의 개혁과 의무교육 등등 수많은 변혁이 이루어지니, 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다. 일본의 근대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 근대문학관 역시 마찬가지다. 메이지 시대 이후의 문학자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자료들을 수집, 보전한 것이 2019년 기준 120만 점에 이른다. 
이는 문학가의 원고와 초고, 편지, 일기, 유품 등이 9만 3천점, 서적으로는 48만권에 이르는 서적이 있으며. 작품의 초판본, 희귀본, 재판본 등의 28,000점, 그리고 잡지(문예지) 60만 권을 합한 숫자다. 같은 시기 인천에 소재한 한국근대문학관의 소장 자료가 3만점이란 점과 비교해 보면 40배에 달하는 숫자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정갈한 보도블럭을 밟으며 가까이 다가가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1층에 마련된 카페 <BUNDAN>이었다. 베란다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거나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필자는 이를 평범한 카페로 알고 지나쳤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문학작품 속의 요리를 재현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안내 창구의 접수원이 설명하기를, 1층의 안쪽 공간은 회원제로 운영되는 도서 열람실이며, 전시관은 2층에 있다고 하였다. 관람료로 300엔을 내고, 티켓을 겸한 기념 엽서를 받은 뒤 2층 전시관으로 올라갔다. 때마침 <2022년도 일본근대문학관 동계기획전>이 열리는 중이었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전시관으로 들어가자, 안내원이 정중히 맞아주었다. 그녀는 전시된 작품의 목록을 건네주며, 전시관 사진 촬영은 불가하다는 안내를 했다. 

이번 동계기획전의 테마는 다양했다. 메이지 시대의 명작들, 수집 문고 컬렉션, 일본 문인들의 편지글과 사진전, 싯구 전시회 등 다양한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중에는 한국에도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의 작품과 서간, 사진 등이 있었다. 작가이자 군의관으로도 활동했던 모리 오가이(森鷗外) 탄생 160주년 및 작고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郎)의 전시회도 동시에 개최되고 있었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본 사진은 촬영이 허가된 장소에서 촬영하였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본 사진은 촬영이 허가된, 전시장 바깥에서 촬영하였다.
가야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눈에 띈다.

현대 문인들이 기증한 선배의 유품도 콜렉션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엔도 슈사쿠(遠藤周作)가 야마카와 미사오(山川方夫) 앞으로 보냈던 연하장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었다.

또한 관람객들의 이목을 잡아끄는 것은 역시나 편지였다.
앞줄에 서 있었던 중년의 부부는 문인들은 나카타니 타카오(中谷孝雄)라는 작가가 연인이었던 소설가 히라바야시 에이코(平林英子)와 주고 받은 연애편지를 보며 조그만 목소리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개는 구자(舊字), 그것도 붓글씨로 흘려 쓴 편지인지라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힘들게 유추할 수 있었다. 과연 문인들다웠다. 

소설가는 일기같은 산문으로, 시인들은 엽서에 단 두 줄을 쓰거나 담담한 하이쿠(俳句. 일본 전통적 정형시)로 애정을 표현했다. 어떤 문인은 우회적이면서도 시적인 표현으로, 어떤 이들은 열렬히, 어떤 이들은 사랑을 구걸했고, 어떤 이들은 건강을 염려하라는 담담한 말로 애정을 표했다.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비로소 본 실력이 나온다 했던가. 어쩌면 이 편지들을 쓴 문인들은 출판사에 내야 할 원고보다 연인에게 건넬 편지에 더 심혈을 기울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대부분의 전시회는 한국도 그렇듯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대부분의 전시회는 한국도 그렇듯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일본어 실력은 이러한 문학적 수사들 사이를 헤집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만일 그랬다면, 그들의 일면들을 더 엿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일본어 수준이 아직 부족함에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뗄 수밖에 없었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안내원은 “잘 관람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흔치 않은 외국인의 등장에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면, 전시된 작품들의 설명은 물론 로비의 장소 안내판에도 그 흔한 영어 안내문구조차 없었다. ‘일본인들에게도 마니악한 곳’이라는 현지인 친구의 소개가 틀린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전시를 보고 싶었지만, 전시되어 있지 않아서 조금 의외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했다. “나쓰메 소세키의 전시관은 신주쿠에 있어요. 혹시 알고 계시나요?”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내가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찾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약도까지 그려주며 “위치가 다소 애매하여 가는 길이 조금 복잡하지만, 느긋하게 걷는 느낌이라면 괜찮을 것이다”라고 친절히 일러주었다. 나는 안내원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후, 문학관을 등지고 나왔다.

와칸의 안뜰 정원.[사진촬영=박민호 기자]
와칸의 안뜰 정원.[사진촬영=박민호 기자]

문학관 탐방을 마친 뒤에는, 다시 코마바 공원 내를 거닐었다. 메이지 시절 가장 융성하였던 마에다(前田) 후작가의 일본식 저택, 와칸(和館)에 들렀다. 안내원들은 신발을 벗어 줄 것을 요청했다. 

비록 예약한 단체 관람객이 아니라 1층밖에 감상할 수 없었지만, 부드러운 다다미 바닥에 앉아 잠시 아름다운 일본식 정원을 감상할 수 있었다.

와칸 바로 뒤에는 마에다 후작가가 근대화의 영향으로 지었다는 일본 최초의 서양식 저택, 서양관(洋館, 요오칸)이 자리하고 있었다. 와칸과 마찬가지로 안내원들은 신발을 벗을 것을 요청했으며, 필자는 신발을 벗어담은 봉투를 들고 저택 내를 거닐었다. 아직 가본 적은 없었지만, “프랑스나 영국의 귀족 저택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겠지”라고 생각이 들 정도의 화려함이 느껴졌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그렇게 유유히 저택을 거닐고 있는데, 남쪽 홀에서 클래식 기타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어느 중년의 연주자가 스무 명이 넘는 관람객들 앞에서 기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문 앞에 앉아 있던, 안내원으로 보이는 나이 든 일본인 할머니가 나에게 들어가도 좋다고 손짓했다. 갑작스런 권유에 잠시 당황했지만, 그녀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재차 권유했다. 

얼떨결에 클래식 기타 연주회를 감상했다.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연주자들도, 대기하는 연주자들도 마치 19세기에 볼 법한 드레스를 입고 단아하게 앉아 있었다.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마에다 저택 서양관에서 클래식 기타 연주회.
[사진촬영=박민호 기자] 마에다 저택 서양관에서 클래식 기타 연주회.

창밖에는 겨울임에도 신록으로 물든 정원의 풍경이, 눈 앞에는 붉은 레드 카펫과 장중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저택의 홀이 펼쳐져 있었다. 그 가운데 연주자의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나일론 기타의 맑은 음색은 다큐멘터리에서 본 유럽의 그것과도 닮아 있었다.

필자는 연주회에 참석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일본인들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한 본인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고. 그리고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일본 근대문학의 토대에는 바로 이러한 영광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일본근대문학관

도쿄도 메구로구 코마바 4초메 3-55(東京都 目黒区 駒場 4丁目 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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