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근대문학의 거두, 모리 오가이의 기념관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말년 산방(山房)

[일러스트=한송희 기자]
[일러스트=한송희 기자]

코마바 공원을 나온 뒤, 다음 행선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분쿄 구에 위치한 모리 오가이 기념관을 가기 위해서였다.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는 소설가이자 평론가, 의사로서, 동시대에 살았던 나쓰메 소세키와 함께 일본 근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렸던 인물이다. 그는 츠와노(津和野, 현재 시네마 현의 지망)번주의 전속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사였지만 하급 무사라는 사회적 계급에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던 모리의 아버지는, 아들 모리의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데 집중했다.

모리 오가이의 초상화
모리 오가이(森鷗外)의 초상화

네덜란드어, 영어, 독일어를 배우는 등 고등 교육을 받은 모리는,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도쿄 의학교(현재의 도쿄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개업의를 거쳐 일본 육군 군의관이 되었고, 1884년 독일에서 선진 의료기술을 배워오라는 군의 명령에 따라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어렸을 적부터 의서를 읽기 위해 독일어를 배웠던 모리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독일의 문학뿐 아니라 미술에도 관심을 가지며 어렸을 적부터 품어왔던 작가의 꿈을 품게 된다. 그의 대표작인 ‘무희(1890)’도 이 시기 독일 여인과의 연애 경험에서 모티프를 받아 창작한 것이다.

귀국한 후로도 모리는 청일전쟁 참전, 대만 체제 후 군의감(소장) 자리까지 올랐고, 그와 동시에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비록 ‘군의관으로써의 활동에 전념하지 않고 엉뚱한 짓(문예활동)에 골몰한다’는 상부의 비판으로 3년간 기타큐슈로 좌천되기도 했지만, 이후 러일전쟁을 거쳐 육군성 의무국장이 되기도 하는 등 승진가도를 달렸다. 
1916년 육군을 퇴역한 이후로는 제실박물관(현 도쿄국립박물관)의 박물관장, 제국 미술원장 등을 역임하다 1922년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아사히 신문이 선정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30명’에 포함되기도 한 모리 오가이는 한국인들에게도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 많은 문인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살아 생전 ‘일본 문화는 모두 야만적’이라며 일본을 극단적으로 혐오했던 반일주의자 박경리 작가도 ‘모리 오가이의 작품은 읽을 만했다’라고 평한 바 있었다.
대표작으로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무희’, ‘기러기’, ‘아베 일족’등이 있다.

센다기역.[사진촬영=박민호]

분쿄 구(文京区)는 도쿄 도에서는 ‘교육의 도시’라고 소문날 정도의 명소이다. 도쿄대학, 주오대학, 도쿄의치대학, 츠쿠바대학, 오차노미즈 여대 등 수많은 대학교의 캠퍼스가 위치해 있으며, 교육의 도시 이외에도, 메이지 시대의 학자, 정치가, 대문호들을 배출한 동네가 바로 분쿄 구이기도 하다. 

분쿄 구에는 리쿠기엔, 고이시카와 공원, 네즈 신사 등 일본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관광 포인트가 많았지만 필자의 빡빡한 일정으로 방문해볼 곳은 모리 오가이 기념관 일대였다. 굳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모리 오가이 기념관 근처에 나쓰메 소세키를 테마로 한 카페가 있다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입수했기 때문이다.

센다기역을 나와,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한 거리를 5분쯤 걸으니, 주택가 한가운데에 난데없이 들어선 거대한 건축물이 눈에 띄었다. 모리 오가이 기념관이었다.

모리 오가이 기념관의 입구에 위치한 자동문. 우측에 있는 휠체어와 비교해보면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사진촬영=박민호]
모리 오가이 기념관의 입구에 위치한 자동문. 우측에 있는 휠체어와 비교해보면 그 크기를 실감할 수 있다.[사진촬영=박민호]

기념관 앞에 들어서자마자 필자를 놀라게 했던 건 대략 4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자동문이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규모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일본의 경제력이 강하다지만, 일개 구립 기념관이 비싸기로 유명한 도쿄 땅 한복판에 이만한 건물을 세우다니. 모리 오가이가 일본인들에겐 그렇게나 의미가 컸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입구에 마련된 조그마한 기념품점에 입장료 600엔을 내고 지하 전시관으로 들어섰다. 전시관의 구성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모리 오가이의 일생을 정리한 자료, 영상상영관, 그리고 그가 남긴 원고 원본들과 소장품들 등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그 자리에서 조용히 관람하는 일본인들이었다. 한국의 문학관은 썰렁할 정도로 관람객이 없었지만, 이 전시관에는 대략 열다섯 명도 넘는 관람객이 찬찬히 모리 오가이의 유품 하나하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모리 오가이 기념관의 후문[사진촬영=박민호]
모리 오가이 기념관의 후문[사진촬영=박민호]

또 한쪽에서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며 연구 과제를 하는 중학생들도 보였다. 안내원은 그런 학생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과제를 살펴본 후, 관련된 코너로 안내하며 상세한 설명을 해주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러한 광경에, 한국의 문학관에서는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는가 의문이 들었다.

관람을 마친 뒤, 안내원에게 다가가 “나쓰메 소세키의 ‘고양이의 집(猫の家)’이 이 근처에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어디인지 아십니까?” 라고 물었다. 안내원은 고개를 갸웃거린 뒤 말했다. 

“그곳이 나쓰메 소세키의 거주지였던 건 맞습니다만, 지금은 비석 하나랑 고양이 상 하나밖에 없어요. 차라리 신주쿠에 있는 나쓰메 소세키 기념관을 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일본근대문학관에서도 언급했었던 나쓰메 소세키 기념관의 이름이 또 나왔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나쓰메 소세키 기념관의 폐관시간은 오후 6시. 그나마도 지하철에서 버스로 한 번 환승해야 했을 정도로, 접근이 힘든 곳이었다.

필자는 고민했다. 이날 필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진보초도 가보아야 했고, 지금 와서 신주쿠로 가자니 시간을 크게 낭비할 상황. 결국 아침에 결정한 대로, 가까운 진보초를 거친 후 신주쿠 나쓰메 소세키 기념관을 가보기로 결정했다.

기념관 앞에서는 기념관의 카페와 주민들이 모여 바자회를 열고 있었다[사진촬영=박민호]
기념관 앞에서는 기념관의 카페와 주민들이 모여 바자회를 열고 있었다.[사진촬영=박민호]

그렇게 필자는 모리 오가이 기념관을 등지고 다시 센다기역으로 향했다. 기념관 앞에는 동네 주민들과, 기념관에 입점한 모리키네 카페(モリキネカフェ)가 가판대를 세우고, 모리 오가이가 생전에 좋아했던 디저트를 테마로 쿠키나 떡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아케보노바시 역[사진촬영=박민호]
아케보노바시 역[사진촬영=박민호]

2부에서 후술할 진보초를 들린 뒤, 아케보노바시 역에 도착했다. 어느 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지만, 아직 한 번의 버스를 더 타야 했다. 정류장으로 다가온 아주머니에게 “나쓰메 소세키 기념관으로 가는 버스가 맞나요?”라고 물었고, 그녀는 “맞아요, 야요이 미술관 뒤에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시간이 좀 늦지 않았을까?”라며 걱정하는 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시간은 이미 오후 5가 살짝 넘은 시간. 구글에서는 영업 시간이 6시까지라고 표시되어 있었으니, 아슬아슬하지만 우선 가 보기로 했다.

일본에는 몇 차례 온 적이 있었지만, 일본의 버스를 타본 것은 처음이었다. 필자는 여기서 꼭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바로 버스의 운전기사였다. 

일본 버스의 풍경. [사진촬영=박민호]
버스 안의 사소한 풍경에서, 일본의 선진적인 시민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사진촬영=박민호]

버스 기사는 깔끔한 제복 차림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때마다 기사는 일일히 “출발하겠습니다”, 잠시 횡단보도 앞에서 멈출 때도 “잠시 멈추겠습니다, 다시 출발합니다.”, 언덕길이 나올 때면 “언덕길입니다”, 과속방지턱이 나올때면 “흔들립니다, 주의해주세요.”라고 일일히 차내 방송을 하고 있었다. 입이 아프고 지겨울 법 한데도,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서 그는 계속해서 그렇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승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버스가 완전히 멈추기 전까진 앉아있든, 서서 고리나 봉을 잡든 일단 자리잡은 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버스가 완전히 멈추고, 기사가 “~정류장입니다. 조심히 내려주십시오”라고 할 때까지는 문을 향해 나서지 않았다.

이에 비하면 한국은 어떤가. 버스가 급출발을 해서 승객이 다쳤다느니, 누구의 책임이며 보상은 어떻다느니 하는 뉴스가 매달 메인 뉴스에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댓글에는 “안전 의식이 없으니 다쳐도 싸다”라는 과격한 의견까지 나온다. 그럼에도 버스 사고는 매년 끊이지 않는다.

덜컹거리는 차내를 아랑곳 않고 가속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누군가 끼어들기라도 하면 낮게 욕설을 내뱉는 운전기사, 일단 내리기에 급급해 미리 일어서서 움직이는 승객들의 모습은 도쿄에서 찾을 수가 없었다. 근본적인 안전의식과 시민의식의 차이가 아닐까.

아무튼 야요이 미술관 앞에서 내릴 때까지, 아주머니는 반드시 직진해서 좌회전을 하라고 일러 주었다. 필자는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뒤, 다른 일본인 승객들을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나쓰메 소세키 산방기념관[사진촬영=박민호]
나쓰메 소세키 산방기념관[사진촬영=박민호]

정류장에서 3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기념관이 고요한 주택가 한가운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쓰메 소세키의 흉상 옆에 있는 커다란 대문으로 들어가니, 경비실에 있던 경비가 “좋은 밤입니다. 하지만 이쪽은 공원이에요. 혹시 기념관을 둘러보러 오신 건가요?”라며 정문을 다시 알려주었다.

나쓰메 소세키 기념관의 1층으로 들어가니 기념품점의 직원이 나와 이용 시간을 안내해 주었다. 기념품 가게는 5시 30분까지이며, 폐관 시간 6시까지 관람할 수 있으니, 우선 기념품 부터 산 후 둘러보는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필자가 들어간 시간은 5시 15분. 간신히 골인이었다.

나쓰메 소세키 산방기념관의 1층은 카페와 기념실,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통유리를 따라 북 카페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기념품점 뒤쪽 공간과 이어진 2층까지 모두 전시실이었다. 입장료는 300엔이었다. 

나쓰메 소세키 산방기념관에서는 한국어 팜플렛과 오디오 가이드를 구비해 놓고 있다. [사진촬영=박민호]
나쓰메 소세키 산방기념관에서는 한국어 팜플렛과 오디오 가이드를 구비해 놓고 있다. [사진촬영=박민호]

안내 직원은 “혹시 한국에서 오셨느냐”라고 물은 뒤, 한국어 팜플렛과 오디오 가이드까지 건네주었다. 지금까지의 문학관에서는 한국어는 커녕 영어자료조차 찾을 수 없었기에 뜻밖의 상황이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한국에서도 유명하지요. 한국의 대학생들이나 문인들도 가끔 찾아오기 때문에, 이런 안내자료도 구비하고 있답니다.”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는 일본의 대표적 근대문학 소설가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 「마음」등 에고이즘적인 풍취가 강한 작품들이 한국에서도 알려져 있다.

밀랍인형으로 제작된 나쓰메 소세키의 모습.[사진촬영=박민호]
밀랍인형으로 제작된 나쓰메 소세키의 모습.[사진촬영=박민호]

그는 상술한 모리 오가이와 함께 메이지 시대의 작가로 꼽히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요코미츠 리이치, 무라카미 하루키 등 수많은 일본 작가 뿐 아니라, 바다 건너 루쉰이나 우리나라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춘원 이광수가 「문학이란 하(何)오」에서 소세키의 문학적 업적을 소개하거나, 염상섭이 저술한 「만세전」의 구성이 소세키의 「산시로」를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한국 문학계에서도 유명하다.

기념품 가게 바로 뒤쪽은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山房)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전시실이 있었다. 산방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책상, 족자, 서적, 필기구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기념관에 재현된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山房).[사진촬영=박민호]
기념관에 재현된 나쓰메 소세키의 산방(山房).[사진촬영=박민호]

바로 이곳, 와세다 미나미초에서 말년을 보냈던 소세키가, 문하생들과의 목요회(木曜会)를 가지며 교류했던 자리였다. 비록 원래의 건물은 1945년 미군의 공습으로 소실되었지만, 산방의 공간을 재현해놓은 자리에서 그의 흔적을 다시금 되새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소세키가 남긴 싯구들이 액자에 담겨 복도를 따라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 안쪽에는 그의 일생과 작품에 얽힌 비화들, 그리고 소세키의 제자들과 가족관계 등등을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감상할 수 있었다. 규모는 소박했지만 알찬 구성이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흉상[사진촬영=박민호]
나쓰메 소세키의 흉상[사진촬영=박민호]

폐관 시간이 다가오자, 제복을 입은 안내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이제 전시를 마칠 시간입니다”라고 안내했다. 70살이 넘어보이는 그는, 필자가 문학 기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시절 소세키의 작품을 읽고 작가의 꿈을 가진 적도 있었죠. 비록 가정이 생겨서 포기했지만요. 회사를 은퇴하고 난 뒤, 말년에 이곳에서 일할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라며 허허롭게 웃는 그와 인사를 나눈 뒤, 필자는 기념관을 나섰다.

■모리 오가이 기념관 
도쿄도 분쿄구 센다기 1초메 23-4(東京都文京区千駄木1丁目23−4)
■나쓰메 소세키 산방기념관
도쿄도 신주쿠구 와세다미나미초7 (東京都新宿区早稲田南町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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