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생활 20년, 그가 말하는 일본 만화/웹툰의 동정

사진=한송희 에디터 작업
사진=한송희 에디터 작업

 

12월 12일은 도쿄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고 미리 약속되어 있던 인터뷰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필자는 캐리어를 이끌고 신주쿠로 향했다.
한국 문화원을 지나 도착한 어느 빌딩. 고지받은대로 7층을 누르고 사무실로 들어가자, 푸근한 인상의 사내가 필자를 맞아 주었다.

“어휴, 어서 오십시오.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인기리에 연재되었던 웹소설 「도굴왕」, 「전지적 독자 시점」, 「나노 마신」등 의 웹툰화를 주도한 웹툰 제작사, 주식회사 레드세븐의 이현석 대표였다.

인터뷰에 임하는 이현석 대표[사진촬영=박민호]

■ 대학 시절부터 시작한 만화업계 입문

일본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이현석 대표는 일본 만화계에 몸담아온 사람으로도 만화/웹툰 업계에서 유명하다. 만화 전문 출판사 대원의 만화잡지 영챔프에 연재되었던 그의 사설 코너 「warmania의 일본통신실」은 한국에선 좀처럼 알기 힘든 일본 만화업계의 인사이트를 담아낸 것으로도 소문난 바 있다.

일본에서 만화를 배운 한국인 작가들은 많다. 하지만 외국인으로서 기획자/편집자로 일한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 업계에 몸담게 되었을까?
그 역시도 처음에는 만화 스토리작가로 만화계에 데뷔했다고 한다.

“군대를 다녀와서 대학교 3학년 때였나? 당시에는 IMF가 터졌을 때였는데, 그 여파로 전국에 도서 대여점이 한 2만 개 정도 생겼을 거에요. 각 점포마다 한 작품씩만 넣어도 2만부잖아요?”
“당시 대원출판사에서도 공급할 작품이 많이 필요했는데, 그때 저도 데뷔했죠. 「강호용병전」 이라는 작품이었어요.”

이현석 대표가 스토리를 담당한 「떴다! 킬러」, 「미림반점 수호열전」 [사진출처 : YES24]

스토리작가로서 그가 받았던 돈은 한 권당 120만원. 1997~8년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이후로도 이 대표는 「떴다! 킬러」, 「미림반점 수호열전」 을 쓰며 만화 스토리 작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가 만화업계 전반에 대한 실질적인 인사이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을 다니던 시절, 국어국문학 박사이자 영화인인 김일영 교수의 국문학 강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그때 조별 과제로 유명 작가들을 취재해 오라는 과제가 주어졌는데요, 다른 동기들은 유명한 시인이나 소설가 등을 인터뷰하겠다고 했을 때, 저는 만화가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찾아간 만화가가 다름 아닌 양영순. 섹시 코미디 만화였던 「누들누드」로 당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의 작가였다.

'누들누드'로 데뷔하였던 양영순 작가는 훗날 네이버 웹툰에서 '덴마'를 연재하게 된다.

“그때 2시간정도 인터뷰를 했죠. 비디오 테이프로 녹화를 하고, 그걸 가지고 다시 보고서를 만들었고요.”

이 대표는 단순히 양영순 작가와의 대담을 담은 것뿐만이 아닌, 누들누드를 만들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작가가 결혼을 한 이후 새롭게 바뀐 여성관 등을 작품과 연계하고 분석하여 레포트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과제를 내주신 김일영 교수님이 ‘F 포격’을 하신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굉장히 학점을 짜게 주시는 분인데, 저한테는 A+를 주셨더라구요. ‘여러분, 이런 게 논문이에요’라고요. 엄청난 칭찬을 받은 거죠.”

■ 라면박스 하나에 꿈을 싣고 일본으로

이 대표는 어릴 적부터 문학이나, 만화, 영화 등 창작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그 또한 쉽지 않았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 할리우드 영화가 유명했잖아요. 그래서 시나리오 라이팅, 영화를 공부하러 미국에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큰 도전이었어요. 그때는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니 정보도 별로 없었고요.”

[사진출처:닛케이아시아]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길은 만화의 왕국 일본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여러 인격을 구성해왔던 큰 요소 중 하나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배우러, 이 대표는 1999년 12월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짐을 넣은 라면박스 하나 덜렁 들고 나리타 공항으로 도착했죠.” 

그는 허허 웃으며 그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 만화잡지 ‘영 챔프’에 황민호 편집장(현 대원CI 대표)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칼럼을 써보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했죠.”

그렇게 격주로 연재를 하게 된 칼럼이 바로 ‘Warmania의 일본통신실’. 이 칼럼은 훗날 2017년 웹툰 전문 언론 ‘웹툰가이드’에서 재연재되며, 웹툰 작가, 혹은 기획자들 뿐 아니라 일본 만화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중요 참고자료로도 유명했다.

'Warmania의 일본통신실' 웹툰가이드 재연재판 [웹툰가이드 화면캡처]

 “이 칼럼을 쓰면서 저 자신도 공부가 많이 되었지만, 가장 값진 성과는 뭐였느냐면 역시 인맥이었죠.”

딱히 일본에 인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한국으로부터 별다른 주선 등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어 계획조차도 세울 수 없었던 이현석 대표. 그는 ‘무작정 돌격 취재’로 상황을 돌파했다고 한다.

“제가 좋아했던 작가분들, 편집자,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서 ‘인터뷰 좀 하고 싶다’고 했죠. 그러다보니 그 편집자들과 안면도 트게 되었고요.”

■ 만화 왕국 일본에서 만화 편집자가 되다

“그러다가 제가 이제 도쿄도립대학의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죠. 미야다이 신지(宮台真司) 교수 아래에서 사회학을 배웠습니다.”

미야다이 신지 교수[사진출처:마이니치 신문]
미야다이 신지 교수[사진출처:마이니치 신문]

미야다이 신지 교수의 전공은 사회시스템 이론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오타쿠 제로세대’라고 칭할 만큼, 서브컬처에 대한 이해와 조예가 깊기도 하다. 그만큼 대중문화 연구에 있어서는 일본 학계에서 권위자로 인정받는 미야다이 교수 아래에서, 이현석 대표는 사회분석학적인 시각으로 만화와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키웠다.

“석사과정이 끝나갈 때였습니다. 그때 스퀘어 에닉스(スクウェア・エニックス)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국 작가들을 일본에 소개하는 코디네이터를 해보지 않겠느냐고요.”

요청을 수락한 이 대표는 스퀘어 에닉스에서 본격적인 만화 기획·편집자로서 일하게 된다. 처음에는 코디네이터로서의 업무로 시작했지만, 스퀘어 에닉스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그는 한국에 관련된 모든 제반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주식회사 스퀘어 에닉스의 사옥 [사진출처 : 스퀘어 에닉스]

“편집뿐 아니라 우편물 발송, 원고료 정산, 통지서, 원고 독촉... 참, 그렇게 10년을 했네요. 하하.”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다름아닌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였다고 한다. 네이버 웹툰에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절찬리에 연재되었던 신과 함께는, 2012년 스퀘어 에닉스의 영 간간(ヤングガンガン)에서 ‘神と一緒に’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되었다.
그때 한국 웹툰의 일본 만화화를 주도했던 이가 바로 이현석 대표였다고 한다.

일본 리메이크판 '神と一緒に'(신과 함께)

“그때 윗선에 이야기했죠. 이거 영화화도 된다고 하는데, 한번 일본에서 리메이크작을 만드는 것이 어떠냐, 하고요. 그래서 만화화에 대한 권리를 계약하고, 리메이크를 했었죠.”

2014년 스퀘어 에닉스를 퇴사한 이후, 이 대표는 코미코로 이직하여 한국 웹툰을 수입하고 일본 독자들을 상대로 서비스하며 웹툰이라는 새로운 컨텐츠에 대해 경험을 쌓아간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2019년 일궈낸 것이 바로 주식회사 레드세븐(구 엘세븐). 웹툰 스튜디오 레드아이스 스튜디오와 협업하며 본격적으로 웹툰 제작 및 유통업을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 유통되는 레드세븐의 작품들은「4000년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나 혼자만 레벨 업」, 「도굴왕」, 「 전지적 독자 시점 」등, 한국 웹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웹툰화한 작품들이 많다.

레드세븐이 다루고 있는 작품들 [주식회사 레드세븐 홈페이지 캡쳐]

 이렇듯 20년간의 일본 생활을 하며, 출판 만화에서 웹툰이라는 만화-웹툰의 변화를 온 몸으로 경험한 이현석 대표. 과연 그가 바라보는 업계의 동정은 어떨까?

 아래는 필자와 그의 대담이다.
(필 : 필자, 이 : 이현석 대표)

① 과거 일본 만화의 시스템에 대해서
■ 일본의 만화 시스템이란?

필 : 과거 이 대표님께서 쓰셨던 일본의 만화-웹툰업계의 동정에 대한 포스팅을 유심히 봐 왔습니다. 일본 만화업계의 시스템이라던가, 만화의 구성적 요소에 대한 고찰과 같은 글들이 흥미로웠는데요.
우선 과거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일본의 출판 만화 시스템은 어떠했습니까?

이 : 제가 대학원 다닐 시절에, ‘대체 일본의 만화 시스템은 뭘까?’라고 정의를 내려봤는데, 결국은 ‘주간 소년 만화잡지 시스템’이에요. 이게 메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잡지가 나오고, 그 잡지에 실렸던 만화를 단행본으로 만들죠. 그리고 그 단행본의 수익으로 주간지를 만드는 데 쓰였던 비용을 회수한다, 이런 개념이라 볼 수 있죠.

필 : 주간지 만화 시스템이군요?

주간지 만화 잡지 [사진출처 : 허핑턴포스트 재팬]
주간지 만화 잡지 [사진출처 : 허핑턴포스트 재팬]

※한국 문학계에도 이러한 일본의 출간 시스템이 그대로 들어와 있다. 문예지라는 이름으로 월간 혹은 계간 시스템으로 시와 소설을 싣고 이후에 단행본으로 돈을 회수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수익 구조가 무너져 차츰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 : 그렇죠. 메인 시스템 위주로 서브 시스템을 정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일 주일에 한 번씩 잡지를 만든다. 그럼 정해진 페이지가 500페이지라고 친다면, A라는 만화 한 작품은 그 중에서 대략 16~18페이지를 차지한다고 해보죠. 

A라는 작품의 단행본 한 권이 180페이지 정도입니다. 그런 단행본을 1년에 네 권 만들 수 있죠. 그렇다면 주간지 출판사는 그 A라는 작품으로 인해 네 번의 자금 회수 기회가 있는 거죠.

필 : 제가 문학 기자기도 해서 일본의 서점을 한번 탐방해 봤습니다. 일반적인 서점부터 시작해서 신주쿠 역에 있는 대형 서점, 키노쿠니야 서점(도쿄로드 2부 2편 참조)까지 가 봤죠. 
현재 한국에서는 만화를 포함한 잡지 시장이 축소되고 있는데, 일본은 안 그런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간 만화잡지가 갱지로 되어있긴 하지만 굉장히 잘 팔리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이 : 아니에요, 지금 일본도 잡지 시장은 망해가고 있어요. 

필 : 그런가요?

이 : 일본 만화 주간지의 최고 전성기가 1990년대 중~후반일 거에요. 가장 상징적인 주간지는 <소년 점프(슈에이샤)>인데, 그때 650만부 발행했을 겁니다. 그리고 <소년 매거진(코단샤)>이 아마 400만부 발행했을 거에요. 그리고 <주간 소년 선데이(쇼가쿠칸)>이 한 150만에서 200만부 정도였을 겁니다.

1994년~2017년까지 3대 만화잡지의 발행부수.
빨간색 = 월간 소년 점프, 파란색 = 월간 소년 매거진, 노란색=월간 소년 선데이
[자료출처=まんがseek]

이 : 이 3대 주간지의 발행부수를 합쳐 1200만부가 넘었습니다. 당시에 어마무시했었죠.

필 : 그럼 지금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 : 지금은 소년 점프만 따져도 120만 부 정도에요.

월간 소년 점프의 발행부수[자료출처=일본잡지협회]
황토색 : 월간 소년 점프의 발행부수
녹색 : 월간 소년 매거진의 발행부수
기간 : 1968~2021년까지 [자료출처=일본잡지협회]

필 : 거의 3분의 1정도네요. 왜 이렇게 된 건가요?

※규모는 다르지만, 일본 잡지 시장이 하락하는 것 역시 한국과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의 시스템이 한국에 이식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한국과 양상이 다른 것이 있다.

이 : 2000년대 초반쯤? 그때쯤 일본에서도 이유를 연구를 하기 시작했어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정보 가치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필 : ‘정보 가치의 변화’라고요? 그게 어떤 뜻인가요?

■ 정보 가치의 변화가 불러온 출판 시장의 몰락

이 : 예를 들어볼게요.  80년대, 90년대까지 일본의 전철 풍경을 보면, 다들 신문을 읽거나 만화책을 보거나 했거든요. 그때 신문도 거의 100만부씩 팔렸죠. 

[사진출처=셔터스톡]
[사진출처=셔터스톡]

왜 사람들이 신문을, 만화를 읽느냐 하면,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한 ‘매개물’ 로서 읽는 것이죠. 예컨대 신문을 보고 출근을 하면서 직장 동료들과 “어제는 연예인 누구누구가 바람을 피웠다, 누군가는 또 재혼한다더라”라고 이야기를 하던가, 스포츠 신문을 보고 “어제는 어느어느 팀이 이겼대”라고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필 : 대화 거리를 말하는 거군요.

이 : 그렇죠. 그래서 스포츠 신문들이 굉장히 발달했었죠.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9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서 정보통신 혁명이 벌어졌어요.

필 : 어떤 혁명이 있었죠?

이 : 휴대폰입니다. 데이터 통신이 시작되고 나니, 모든 사람들이 정보를 아주 값싸게, 또는 텍스트로 접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누가 신문을 사서 보겠어요.

필 : 우리가 소위 말하는 피처폰 시대군요.

[사진출처=일본옥션]

이 : 예. 90년대 후반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이후로 슬슬 컬러 화면이 나오는 등 통신매체가 점점 발전을 했잖아요? 그러다 보니 정보를 접하는 눈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죠.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어요.

필 : 인터넷이 결정적이었군요.

이 : 그렇죠. 하지만 저출산 문제에 딸려오는 어린이 인구 감소같은 문제들도 한몫 했고, 그 외에도 복합적으로 이유가 있었죠. 아무튼 이 이후로 일본의 만화잡지는 굉장히 안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필 : 으음.

이 : 그리고 또 한가지. 이러한 주간지 만화 잡지의 독자 평균 연령이 매우 높다는 점이에요. 2000년대 초반에 제가 석사 논문을 쓸 때, <소년 점프>의 평균 연령대가 30대 중반 정도였다는 겁니다.

나고야에 있는 어떤 서점의 소학관 코너 [사진출처=아사히 신문]

필 : 상당히 높군요?

이 : 그렇죠. 지금은 시간이 더 흘렀으니 이제 더 올라갔을 겁니다. 더 이상 소년도 아니야(웃음)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유입이 안 된다는 거죠.

필 : 10대~20대 말씀이시죠?

이 : 예, 그 원인이 뭘까 하고 보니까, 일본의 말하는 법 때문이에요. 세계적으로도 너무 특수하고 고도화되어 있을 정도로 어려워요.

■ 고도로 정교화된 일본 만화, 그러나 동시에 생긴 고민

이 : 이건 제가 10년정도 스퀘어 에닉스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인데요. 출판하시는 것 아시겠지만, 줄 간격 몇 밀리미터로 맞춰라, 어째라 이렇게 까다롭게 맞춰요. 그 규정이 회사마다도 달라요.

예를 들어 어떤 회사는 “주인공 캐릭터가 평상시에 하는 말투는 글자 포인트 N포인트로, 큰 소리로 이야기 할 때는 그보다 4포인트 높여서” 이런 식으로 사내의 어떤... 규정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다 정해져 있어요.

필 : 예전에 한번 말씀하셨던 만화의 컷 배치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이 : 그렇죠. 일본의 만화는, 독자가 작품을 읽을 때 시선 유도부터 시작해서, (작중의) 물리 법칙을 연출하는 방식 같은 것이 굉장히 정교하게 짜여져 있죠. 
한국은 (독자의 시선이) 좌측에서 시작해서 우측으로 가지만, 일본에선 그 반대죠. 그래서 작중 물리적, 시간적 법칙이 달라요. 시선 진행 자체가 반대니까.

필 : 저는 <신 암행어사>가 그런 법칙을 잘 지켰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한국 작가들이 그렸지만 일본에서 먼저 연재를 해서 히트를 쳤으니까요.

윤인완(글), 양경일(그림) 두 작가의 '신암행어사' [사진출처=대원씨아이]
윤인완(글), 양경일(그림) 두 작가의 '신암행어사' [사진출처=대원씨아이]

이 : 그것도 일본의 편집자가 엄청나게 공을 들여서 관리를 해줬으니까 그래요.

필 : 아하, 편집자의 역할이 중요하군요.

이 : 일본의 만화 역사 자체가... 주간 만화 자체가 시작된 게 1959년이에요. 그때 <소년 선데이>가 등장했고, 같은 해에 <소년 매거진>이 등장했죠. 그런 잡지사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제가 아까 말했던 법칙들이 60년 넘은 전통이 된 거에요. 그 판형이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요, 

필 : 지금까지도요?

이 : 예. 그 틀 안에서 고도의 기술 발전이 이루어져서, 진화 체제의 정점까지 온 거죠. 단순하게 만화를 그리는 방식뿐만 아니라, 배급방식이라던가 이윤을 창출하는 방법까지 말이죠

필 : 메뉴얼화가 고도로 정교화됐겠군요.

두 천재 만화가의 데뷔를 그린 소년만화 '바쿠만'은 일본의 만화 시스템을 그려내 화제가 된 작품이다.
그러나 실제 업계인들로부터는 '과장이 많이 섞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 의외로 메뉴얼화는 잘 안 되어있어요. 그냥 장인 정신으로 그냥... 가내 수공업같이, 그냥 알음알음 전수해온 거에요. 

필 : (웃는다)

이 : 출판사 안에 메뉴얼 없어요. 그냥 (편집자가) 처음에 입사하면 사수한테 붙어서 어깨 너머로 배우는 거에요.

이무튼 제가 대학에서 사회학을 배울 때, 미야다이 교수가 이야기했던 것 중 하나가 사회 진화론이에요. “어떤 정점까지 진화한 개체는 오히려 퇴화한다”라는 겁니다.

필 : 음...

이 : 극도로 정교해졌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기능을 해낼 수 있지만, 도리어 외부에서의 위험에 취약하다는 거죠. 이건 일본의 만화도 마찬가지인거에요. 예를 들면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매개체(뉴 미디어)나, 웹툰과 같은 새로운 컨텐츠 말이죠. 일본 만화업계가 메인 시스템인 잡지 체제가, 엄청난 부수 하락이라는 쇠퇴에 직면해도 건재한 이유도 이 디지털 체제 하에서 단행본의 전자서적들이 여전히 팔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② 현재 웹툰의 위치는 어떠한가?
■ 일본에서 웹툰의 입지... “선풍적인 입지, 아직도 가능성 많아”

필 : 마침 웹툰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한번 웹툰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현재 한국 웹툰이 일본에서 가진 입지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일본에 소개된 한국의 웹툰들. [사진출처=GirlHouyhnhnm)

이 : 일본에서 한국 웹툰의 입지는 상당히 큽니다. 「나 혼자만 레벨업」, 「황제의 외동딸」 등등의 작품의 히트를 필두로 많은 작품들이 크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필 : 어느 정도로 인기를 끌었나요?

이 : 「나 혼자만 레벨업」같은 경우에는 일본 픽코마에서는 한달에 1억엔 매출을 올린 일도 있었죠. 이런 작품들을 다루어주는 미디어 <픽코마>가 있잖아요.

픽코마는 지금 일본 안에서 앱 분야에서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콘텐츠 관련 앱들이 치열하게 사례를 분석할 정도죠. 
한국 웹툰 진출도 여러 단계를 거쳤는데, 제일 처음에는 2013년 코미코라는 것이 있어요.

(상=픽코마, 하=코미코)

필 : 한국 NHN이 만든 플랫폼이죠?

이 : 예, 맞습니다. 그래서 한국식 컬러 웹툰으로 대박을 터트렸죠. 

필 : 대표적인 작품이 어떤 게 있을까요?

이 : 리라이프(ReLIFE)요. 이 작품을 필두로 여러가지 일본산 웹툰을 선보이며, 엄청난 히트를 쳤는데, 어느 정도로 인기가 있었냐면, 그 당시 니혼게이자이 신문에서 기사가 나왔어요. 거기서 조사를 해봤는데, (일본의) 중고등학생들 휴대폰을 조사를 해보니까, 반 이상의 여학생들이 코미코를 깔았더라구요.

필 : 대단하네요.

2016년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10대들에게 꼭 필요한 상품 19가지' 중에서 웹툰 감상 어플 코미코를 꼽았다.

 

이 : 네. 하지만 그때 조금 한계가 있었어요. 그게 뭔가 하면, 당시에는 아직 한국 웹툰이 어떻게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가에 대한 비즈니스 모델이 정착이 안 됐을 때였어요.

굉장히 큰 반향은 일으켰는데 비즈니스 모델을 정착하는 데까지는 못 가서 좀 사그라들고, 그 다음에는 라인 망가가 조금 부상을 했다가. 그 다음 등장한 게 바로 픽코마죠.

필 : 코미코... 라인 망가... 픽코마.

이 : 픽코마가 초대박을 치면서... 그러니까 일본에선 도서 어플리케이션 중에선 1등이죠. 전 세계에서 매출 규모가 5등인가 그렇고요. 그 픽코마의 주력 상품이 웹툰입니다. 그러다 보니 웹툰이 새로운 수익 모델로 등장했다면서 모든 일본의 출판사, it기업들이 주목을 했죠.

필 : 상당히 많이 주목을 받았겠네요.

이 : 그럼요.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투자자도 몰리고, 올해 한 해만 일본에서 웹툰 제작회사면 70개사 정도가 생겼어요. 

필 : 매니지먼트나 플랫폼을 포함해서요?

이 : 아뇨, 제작사만요.

일본 10대 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웹 만화 어플 1위는 코미코였다. [자료출처=TesTee]

필 : 그러면 한국계 제작사가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나요?

이 : 아뇨, 아직까진 일본계 제작사가 압도적입니다. 한국계 제작사들도 시도를 하려고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못 했죠. 저희만 빼고요.

필 : 코로나가 굉장히 많은 영향을 미치네요.

이 : 다만 일본 쪽에서 아직 조금 웹툰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합니다. 만화하고 웹툰은 완전히 다른데 그걸 아직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많아요. 

어느 정도 차이냐면, 예를 들어 야구와 축구는 같은 구기종목이죠? 그런데 야구(기존 출판만화)를 하던 사람이 축구(웹툰)을 보면서 “뭐, 비슷한 종류겠지” 라고 착각을 하는거에요. 그러면서 “야구장에서도 축구 할 수 있는 거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필 : 좀 더 구체적인 예가 있을까요?

이 : 예를 들어서, 만화에서의 시선 유도라는게, (일본 기준으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일어나잖아요? 그래서 세로로 컷을 나눌 수도 있죠. 마치 두 페이지로 나뉜 것처럼요. 그래서 시선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으로 진행되죠.

'배가본드'를 예시로 든 만화에서의 시선이동 [자료출처=박인하의 수업카페 제 15강]

그런데 웹툰이라는 것은 스마트폰이 주 매체란 말입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스크롤을 내리면서 감상해요. 그래서 인물의 배치, 배경과 인물 위치의 조화, 얼굴 방향의 배치 다 기존 만화와는 달라야 하는데, 그걸 모르는 겁니다.

필 : 그렇죠.

이 : 일본의 유저들도 스마트폰을 사용할 때 그게 불편할 텐데 말이죠.
이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의 만화 시스템 자체가 70년 유구한 전통이 있어요. 그런데 이걸 통째로 뜯어고치기 어렵거든요.

예를 들어 출판사 입장에서 주간지 만드는 데 딸려오는 인력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식자 작업, 표지 디자이너, 사진사, 글쓰기 담당... 이런 사람들이 통째로 직업이 날아갈 수가 있다고요. 간단하게 변화를 선택할 수가 없는 거죠.

필 : 그렇군요. 대체하기가 힘든 거군요.

이 : 그러니까요. 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땐 “왜 일본의 만화시장은 한국처럼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지, 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지”라는 의문이 나오죠.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의견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삶이란 것이 합리적인 것만 밀어붙이면 굉장히 비인간적이 됩니다. 
그런 이유에서처럼,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일본의 출판 만화에서도 하루아침에 체제 변환이 힘들다는 거에요.

필 : 몸집이 거대해지니 방향 전환이 힘들다는 거군요. 알겠습니다.

※한국의 경우는 단행본/주간지 만화책 시장이 고사하고, 웹툰 체제로 전환했다. 
오히려 일본 만화시장과 닮아 있는 것은 소설시장이었다. 한국은 전통적 종이책 출판 단행본 시장과 웹소설 시장이 분리되어 따로 성장하고 있고, 이 두 시장은 서로가 완전히 다른 시장이다. 특히 순수 문학 단행본 소설과 웹소설은 그 뿌리도 다르다는 지적이 있다. (대여점 장르단행본 시장에 대한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서는 제외) 하지만 한국에 많은 출판사들이 웹소설과 단행본 시장을 동일하게 바라보는 문제들이 있다. 
일본의 만화/웹툰시장과 한국의 소설/웹소설 시장이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는 것이다. 

③ 작품 바깥에서 본 일본의 창작환경은?
■ 창작자를 위한 일본 정부의 지원여부, 그리고 대여권 논쟁

필 : 일본은 소위 ‘만화의 왕국’이라고 알고 있고, 또 일본 만화가 벌어들이는 수익도 엄청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 6조 5천억 시장.

필 : 그렇죠. 어마무시한 규모조. 그렇다면 만화가, 소설가를 포함한 창작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복지 제도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 일본 문부과학성의 지원이라던가.

이 : 그다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필 : 전혀요?

이 : 물론 국민 여론을 반영해서 작가한테 훈장을 준다던가, 예를 들면 문화청(문부과학성 산하)에서 미디어 예술제를 개최해서 포상하는 수준이에요. 

일본 문화청에서 개최하는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 [자료출처=일본문화청]

이 : 왜냐하면 작가를 위한 복지나 지원, 이런 것들은 이미 출판사들이 그 역할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프리랜서라는 건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담보하는 거니까.

필 : 출판사에서 이미 하고 있는 거였군요. 그럼 대신 저작권 계약이라던가 이런 부분에서는 법적 보호를 확실히 하겠군요?

이 : 예를 들어 10년전쯤인가… 일본에서도 대여권 논쟁이 있었어요.

필 : (놀라며) 일본도 대여권 논쟁이 있었나요?

이 : 그럼요, 왜 없겠어요. 굉장히 뜨거운 논쟁이었어요.
그게 뭐냐면 망가 키사(漫画喫茶, 한국의 만화방에 대응)라고 해서... 만화책을 막 갖다놓고 몇 시간동안 자유롭게 읽게 하는 그런 곳이 있었어요. 거기다가 (출판사에서) ‘너희 우리 책 몇 권 갖다놨으니 우리한테 라이센스비를 내라’라고 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죠. 그래서 결국 대여법이 통과가 됐어요.

필 : 그럼 길 가다 가끔 보이는 (일본의)만화카페라던가 이런 곳들도...

일본의 '망가키사'는 한국의 만화카페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후 각 방에서 컴퓨터를 할 수도 있는 '넷 카페'로 발전한 형태가 더욱 유행하게 된다.[사진출처=마이니치 신문]

이 : 출판사한테 라이센스비 내죠. 정확히 말하자면 대여권 협회가 있어요.
이게 왜 등장했느냐하면, 그 당시 굉장히 문제가 되었던 게 헌책방 때문이에요. 헌책방은 권당 10엔(한화 100원),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마구 사들여가지고 팔 때는 300엔(한화 3천원)에 팝니다. 조금 싼 가격으로는 20% 할인하던가...

필 : 그런 중고책 가게들도 출판사에도 돈을 내나요?

이 : 안 내죠. 그러니까 중고서점(헌책방)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우리가 돈을 들여서 개발한 IP로 이익을 빼먹는” 그런 존재였죠. 그런 헌책방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죠.

필 : 그래서 효과가 있었나요?

이 : 법적으로 출판사 측이 논리적으로 좀 약한 점이 있었습니다. 소비자가 그냥 물건을 갖다 판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 아무튼 대여권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대여권의 법제화를 누가 진행했느냐? 출판사입니다. 

필 : 일본의 거대 출판사들이요.

이 : 네, 코단샤 슈에이샤같은. 그 법제화를 진행할 당시 작가들이 전면적으로 나섰어요. 물론 출판사 측에서 백업을 해 주고 지원도 해 줬지만 결국 작가들이 나섰던 말입니다. 정부가 아니고요. 결국 출판사에게도 이익이면 자신들에게도 이익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출판사들이 힘이 세요. 예를 들어 코단샤 같은 경우 거기 사원 3천명에 1년 매출이 조 단위에요.
결국 이렇게 작가들의 이익을 지키는 법제화는 정부가 주도하는 게 아니니까, 작가들이 정부에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출판사하고 이야기하면 돼요. 힘이 세니까.

필 : 정말 한국하고는 너무 다르군요... 예, 그럼 이번엔 좀 더 외적인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의 강요’ : 국가의 제재가 아닌 시스템의 제재를 받는 시대

필 : 한국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의 사이. 그 딜레마가 창작계의 주요 이슈였는데요. 일본에서도 이런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단체와 창작자들의 갈등이 심한 상황인지, 현재 상황은 어떤지, 그리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 일본은 훨씬 덜하죠. 다만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라는 문제는 일본에서도 자제하는 분위기로 돌아섰어요.
옛날 같은 경우는 일본의 소년만화 같은 것들이 여성을 성적대상화로 삼는 경우가 심했거든요. 거기서 많이 전환됐죠. 그 큰 전환점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강철의 연금술사」라고 봅니다.

이현석 대표는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강철의 연금술사'를 자주 언급한다.

이 : 「강철의 연금술사」를 보시면요. 이게 기존의 소년 만화에서 다뤄진 여자 캐릭터들하고는 달라요. 남자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여자들이 아니에요. 주체적이고, 자신이 나서서 활동을 하고, 뭐 가슴이 크다거나 하는 성적인 요소도 별로 없고요.

필 : 확실히 2000년대 초반 그 이전의 소년만화에서는 판치라(パンチラ ; 여성 캐릭터의 속옷이 보이는 것을 뜻함)가 ‘서비스 씬’으로써 자주 보였는데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는 그런 장면이 없었죠.

이 :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물론 아직까지 한국에서 봤을 때는 뜨악한 부분도 있죠. 일본의 만화 시장은 6조 5천억으로 굉장히 큰 시장이에요. 그만큼 폭도 넓고 깊이도 다양하니 오만가지 작품들이 나오죠.

필 : 표현의 자유는 폭넓게 하되 정부 차원이나 법조계에서 규제를 하지 않는다는 방침인가요?

이 : 일본 정부 차원에서 규제를 걸었던 예는... 예전에 도쿄도에서 ‘도쿄도 청소년 보호 조례 개정안’이 있었어요.

당시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청소년 보호법 조례 개정안을 발의하여, '만화, 게임 산업을 죽이려고 한다'는 비난에 직면하여 결국 조례 개정을 취소한다. 그는 한국에 대한 극우적 망언으로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이 : 이게 무엇인가 하면, 만화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미성년자로 보일 경우 제재하겠다는 방침이었거든요.

이 : 이때 일본의 모든 작가와 출판사가 연합해서 도쿄도와 싸웠죠. 다 들고 일어났다니까요.

필 : 엄청났겠네요.

이 : 근데 도쿄도 측이 참 머리가 좋아요. 작가나 출판사를 직접 제재하는게 아니라, 편의점이나 서점의 잡지를 담당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거죠. “조례에 어긋난 잡지를 유통하면 규제하겠다”라고 한거죠.

필 : 완전 손발을 잘라버리는 거 아닌가요?

이 : 그렇죠. 머리가 좋은 거죠. 그런데 이런 사달이 나니까 작가들은 물론이고 우리 스승님(미야다이 신지 교수)까지도 뛰쳐나와서 반대를 했죠. 캐릭터를 언뜻 봤을 때 이게 미성년자인지, 성인인지 구별이 안 되는 캐릭터인데. “결국 이 조례는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니냐?”라고요.
그래서 결국 조례 제정은 실패했어요.

필 : 대단하네요. 한국은 아직 엄숙주의가 출판계에 많이 남아있는데요.

이 : 그런데 저는 한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지금 가장 주의 깊게 봐야 하는 문제는 이제 정부의 규제 같은 게 아니라고 봐요. 옛날 방식으로는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정부하고 싸워봤단 말이에요?

구글과 애플 로고.

근데 지금 생기는 문제는 구글과 애플같은 글로벌 기업이에요.
이런 곳들은 규제를 어떻게 하느냐면, 만일 어떤 어플의 작품에서 에로 표현이 나왔다 하면 그 어플리케이션 자체를 날려버려요.

필 : 공급망 자체에서 배제해 버리는 거네요.

이 : 그렇죠. 회사 하나가 날아가버리는거에요. 이래서 자율규제를 할 수밖에 없어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 무서우니까.

필 : 어떤 작가분들은 네이버나 카카오에 소설을 연재할 때, 출판사 측에서 규정을 주더라고요. 청소년의 어디까지 노출이 가능한지, 욕설은 몇 번까지 가능한지...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런 매뉴얼의 규정들은 창작자 입장에선 굉장히 고무줄 같은 거거든요.

기안84의 '복학왕'에서 등장한 이 장면에서 여성혐오적이라는 논쟁이 촉발되어 논란이 된 바 있다. 이후 기안84 작가는 이 해당 장면의 키조개를 킹크랩으로 교체하였다.

이 : 근데 그런 카카오나 네이버 측의 규제조차도 왜 나왔느냐. 결국 다 위로 올라가면 구글과 애플이 정한 거라고 봐요. 어떻게 보면 카카오나 네이버도 중간 관리자 입장이죠.
그래서 아직도 국가가 어떤 거대한 권력이 개인의 사상과 자유를 말살하는 식의 프레임은 이제 낡았다 이거죠.

필 : 그 자리를 공급망이 대체한다?

이 : 공급망이라기보단 시스템의 문제죠. 예를 들어 어플리케이션이나 작품이 검열당했다? 이걸 왜 검열했는지, 어디다 항의할 건지 이런 전략조차도 없다는 거에요.
국가 시스템이야 법원을 거치면 되죠. 많이 가 봐야 헌법 소원을 내면 되죠. 그런데 구글이나 애플 상대로는 어떡하죠?
언젠가 이런 거, (업계인들이) 다 같이 모여서 이야기 좀 해 봐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 한일관계와 컨텐츠 시장의 관계는

필 : 좀 민감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현재는 소강 상태가 되었지만, 지난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양측 정부의 대립이 한일 양국 국민들의 감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요.
이러한 국가간의 갈등이 콘텐츠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가 궁금합니다.

이 : 미미해요.

필 : 아, 별 영향이 없군요

이 : 그럼요. 물론 일본에도 카이카이 통신 같은 곳에 가면 한국의 만화나 문화에 대해 굉장히 저열한 식으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한국도 어느 사이트로 가면 장난 아니거든요.

필 : 그렇죠. 당연하죠.

이 : 사회가 커지다 보면 그런 분들도 존재하고, 당연한 거죠. 사람 살아가는 곳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웹툰 콘텐츠, 일본 젊은이들은 아무런 편견 없이 굉장히 잘 봐요.

(상) 신오오쿠보 한인타운에 몰린 행인들
(하) 동물의 숲 스위치 한국 발매 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신오오쿠보 코리안 타운 가봐도요, 거기는 단 한 번도 손님이 떨어진 적이 없어요. 시골 가봐도 한국 소재로 한 가게들도 많고요.

필 : 한국도 그렇네요. ‘동물의 숲’이나 ‘귀멸의 칼날’이 유행하기도 하고, 일본 여행도 많이 오니까요.

이 : 어떤 서사로 입각해 보아도, 결국 일반 시민끼리는 계속 교류하게 되어 있어요.

■ 일본 컨텐츠업계의 OSMU... “일본이 아날로그적이란 건 편견”

필 : 이제 다른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최근 한국 출판시장은 기존의 책에서 벗어나 다른 콘텐츠에도 사활을 걸고 있는 움직임이 있는데요, 주로 메타버스, 오디오북, AI같은 것들입니다.
일본 출판 시장은 이러한 뉴미디어 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 우선... 메타버스라는 건 일본에서 “그런 게 있나 보다”하는 정도에요. 사활을 거는 정도까진 아니죠.
사실 일본에서는 활자 콘텐츠가 가장 저렴하게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수준이거든요.

필 : 소설 같은 것 말씀이시죠.

이 : 예. 그 다음으로 돈이 적게 들어가는 콘텐츠가 만화입니다. 페이지당 1만엔에서 1만 5천엔 정도니까요.

필 : 애니메이션은 어떤가요?

이 : 그건 완전 다른 이야기죠. 제작비가 진짜 많이 들어가는 분야니까. 그래서 만일 (소설, 만화 시장에서) 새로운 히트작이 나왔다고 하면, 그걸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게임을 만들고.... 일본은 이런 식의 2차 창작산업 자체가 너무 잘 발달되어 있어요.

OSMU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도. [출처=기획재정부 블로그]
OSMU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도. [출처=기획재정부 블로그]

필 : OSMU(원 소스 멀티 유즈) 말씀이시군요. 그렇죠. 그런데 아직 한국에서는요, 업계에 오래 계신 분이라도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무슨 차이냐”고 하시는 분들도 아직 있고...

이 : 그렇죠... 아무튼 일본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 「귀멸의 칼날」이 엄청난 히트를 쳤다 하면, 한국에서처럼 단발적, 단편적으로 “귀멸의 칼날이 떼돈을 벌었대더라”, “몇 쇄를 찍었다더라”라는 식으로 끝나지 않아요.
어떻게 하면 이 「귀멸의 칼날」이란 작품을 더 많이 팔 수가 있는지. 어떻게 하면 홍보를 해서 수익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의 차이가 커요.

필 :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 아무래도 산업 전반에 깔린 저력. 즉 잠재력이 엄청나죠.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을 개발하고, 애니화가 이루어지면 작품을 공급할 수 있는 배급망이 있고.

필 : 음...

이 : 그리고 흔히들 얘기하는 것처럼 “일본이 인터넷에 적응을 잘 못한다”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아니에요. 그건 편견입니다.
일본에서도 인터넷은 물론 SNS를 통해서도 어마어마한 광고를 뿌립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인터넷을 이용한 다양한 광고 전략을 펼친다.

필 : 결국 잠재력이란 OSMU를 만들어 내려는 고민, 배급망, 그리고 높은 인터넷 활용도를 통한 광고 시스템이라는 저변이네요. 한국에서는 일본의 컨텐츠 시장에 대해 그저 “인프라가 좋으니까” 라는 말로 퉁치고 있는데...

이 : 그렇죠. 슈에이샤의 <소년 점프>만 봐도, 2차사업 부서라던지, 해외 공급을 담당하는 부서라던지, 부서 시스템이 아니라 제작 위원회를 꾸린다던지 하는 시스템 자체가 정교하게 갖추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 오디오북에 대해서는 “글쎄”

필 : 다음은 오디오북인데요, 출판계에 계시는 분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 같은 경우는 성우가 스타로써의 상품화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오디오북 사업이 잘 되겠지만, 한국의 성우 시스템은 상당히 미흡하지 않습니까?

일본의 인기 성우들. 좌로부터 우에사카 스미레, 미나세 이노리, 오구라 유이 [출처=미나세 이오리 블로그]

필 : 소수 몇 명의 유명 성우에 기대는 경우가 흔하고, 신인 발굴은 거의 하지 않죠. 그렇기 때문에 오디오북에 대한 상업화와 그에 따른 수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어요.

이 : 이것은 제 개인의 사견입니다. 저도 오디오북을 이용해 봤는데 문제가 있었어요.

필 : 어떤 문제였습니까?

이 :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활자는 전체를 쭉 읽어보고, 문장 안에서 어떤 특정 단어를 읽고 상황 인식이 가능하잖아요. 하지만 오디오북은 다 들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더라고요.

필 : 확실히 그렇죠.

이 :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원래 이 오디오북이 미국에서 인기를 많이 끌었다고 알고 있는데, 미국이 땅덩이가 워낙 넓다 보니 자동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잖아요? 그런 경우라면 그냥 틀어놓고 가면 됩니다.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가 않죠.

자동차에서 오디오북을 이용하는 모습 [출처=미국 E-Reader]

이 : 그리고, 요즘은 한 편당 30분짜리 애니메이션도 길다고 10분만에 보려고 단축판을 보는 세상인데요. 책 한권을 오디오로 틀어놓으면 읽는 데 얼마나 걸리겠어요? 차라리 사서 읽는 게 낫죠.

필 : 그렇죠. 주부들이 틀어놓는 라디오 방송하고도 포맷도 다르고, 그래서 저도 메인 콘텐츠로는 시장이 그리 크지 않다고 봤습니다.

이 : 그리고 또 한가지 이유가 있어요. 유튜브가 있잖아. 게다가 공짜에요. 오디오북 자체가 이미 낡은 아이디어라고 봐요.

■ AI는 과연 인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

필 : 최근 AI기술이 많이 대두되고 있죠. Novel AI라던지, 최근에는 네이버에서 시험용으로 채색 AI 툴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콘텐츠업계에서는 이런 AI방식의 창작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이 : 일본 측에서도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만화의 그림체를 학습하게 하고, 그걸로 만화도 만들어보게 하는. 실험적인 건 진행중에 있습니다.
수익성을 갖춘 작품이 아직까지 나온 바는 없지만, 잠재력이 크다고 보고 있어요.

필 : 아직 상용화된 건 없단 말씀이시군요.
하긴 네이버의 AI채색 툴도 작가들이 써 보니 본격적으로 작품 만드는데 쓰이는 데는 한계가 많다는 평가가 있었죠.

이 : 채색의 심도 같은 게 그래요. 조명,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고 그냥 동일하게 채색하니까요.

네이버에서 선보인 '웹툰 AI 페인터' [출처=네이버]

필 : 하지만 딥러닝 기술이란 게... 결국 입력하는 데이터가 많아질 수록 언젠가는 사람이 그리는 것과 동일해지지 않을까요?

이 : 확실히 일러스트레이션 쪽은 많이 따라왔더라고요. 언젠가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위협을 많이 받을 거에요. 다만 만화는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하니까, 그쪽은 아직 힘들다고 봅니다.

필 : 그렇죠. 일러스트는 한 장이지만 만화는 연속적이어야 하니까.

이 : 특이점이 가깝게 느껴지긴 해요, 옛날보다는. 문학계의 영원한 테마가 있죠? 창작하는 기계... 문학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특정 단어들의 연쇄니까요.

필 : 일단 시는 한중일 다 나오긴 했는데... 장편 소설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AI 소설집도 결국 사람이 검수한 거구요.

이 : 뭐, 특정 모드를 입력하고, 소재를 설정하고 배열하는 정도... 그 정도에서 보조 기능은 쓸 수 있지 않을까요?

필 : 보조 기능까지는, 말씀이시죠.

이 : 다만 이런 생각은 해 봤습니다. 이것도 SF적인 상상인데...
나중에는 결국 자본 싸움으로 갈 것 같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면, 성능 좋은 AI를 개발한 회사가 결국엔 승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이죠.
만일 내가 만화를 그리고 싶다 하면 어느 특정 회사에 가서 AI 브랜드를 돈 주고 사야하는 것 같은...

필 : 게임을 만들 때 유니티 엔진이나 언리얼 엔진을 사서 쓰듯이요?

이 : 그렇게 회사에 종속되는 거죠. 안 쓰면 안 될 정도로. 그러니까 결국엔 자본에 종속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웃음)

■ 레드세븐의 비전은 “웹툰 시장의 개척 & 시스템의 확장”

한 시간도 더 넘게 진행된 인터뷰가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레드세븐의 비전은 어떤 것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이 대표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 웹툰 시장의 개척, 그리고 일본에서 등장하는 인적 자원들을 훈련 시켜서 웹툰 시스템 안으로 편입시키는 것입니다.”
“웹툰은 선풍적인 끌고 있지만, 아직까지 일본의 만화 시장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퍼센테이지가 높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 개척할 영역이 굉장히 많다고 봅니다. 저희 레드세븐은 그 미지의 세계를 끝없이 개척해 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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