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송희 에디터
사진= 한송희 에디터

 

고은 시인이 5년 만에 시집과 대담집을 발간하면서 문단에 다시 나오는 과정에서 사과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각 언론에 보도되었다. 특히 고은 시인의 “내 아내나 나 자신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발언은 ‘뻔뻔함’, ‘반성 없음’으로 비치어 많은 사람의 분노를 사고 있다. 최영미 시인에 대해 소송을 건 고은 시인이 패소하였기에 고은의 사과 없는 문단 복귀는 우리나라 사법기관에 대한 모욕이라는 시각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과오도 저지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다. ‘후회할 행위’를 붓다인들 예수인들 생애 내내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예수를 신으로, 붓다를 성인으로 추앙하는 이유는 그들이 반성하고 거듭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말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것이 있는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다. 천주교에서는 미사 때 가슴을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하면서 통회하는 과정이 있다. 교인들이 매주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이 미사 참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소로 1심, 2심 재판이 끝났을 때 고은 시인이 최소한 ‘(그때 내 행위의 진위 여부에 관계 없이) 물의를 일으켜 송구하다,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성의 시간을 갖겠다고 말하면 자신의 행위를 시인하는 것이므로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5년 만에 문단 복귀를 시도하면서 ‘지난 5년은 참회의 시간이었다.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시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시를 썼으므로 독자 제위의 질책이 있기를 바란다.’란 말을 시집의 후기에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두 권 책에는 ‘나는 언제나 깨끗하였다, 억울하다.’란 뜻이 역력하기에 독자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고은 시인의 일탈적 행위를 알린 최영미 시인이나 당시의 재판부를 부정하는 당당한 복귀 행위에 대해서도 독자들은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설사 고은 시인으로서는 억울한 것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최영미 시인이 목격했다고 증언했고, 1심에서도 고등법원에서도 재판부는 고은 시인이 잘못했다고 선고하였다. 짐작으로 재판한 것이 아니라 최영미 시인의 일기를 증거로 삼고서 재판을 진행하였다. 
실천문학사는 독자들의 불매운동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윤한룡 대표는 두 권 책을 회수하지 않고 계속해서 고은 시인의 변호인 노릇을 해주어야 하는가. 창비는 고은 시인의 사태를 보면서 몸을 빼는 행보를 보여주었다. 2018년에 시집을 출간하기로 계약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시집을 내주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실천문학사가 이 시점에 고은의 ‘기댈 언덕’ 역할을 하겠다고 자임하고 나선 것일까.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1980년 3월,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기관지로 나올 때 5인의 편집위원 고은ㆍ박태순ㆍ송기원ㆍ이문구ㆍ이시영 중 한 명이어서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였을까. 40여년 전 일이니 지금의 실천문학사는 그때와는 다르다. 복귀의 징검돌 역할을 하더라도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를 치면서 복귀하게끔 도와줄 이유는 없었다고 본다. 
고은 시인의 시집과 대담집 발간은 실천문학사에서 책을 낸 모든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책 불매운동이 문제가 아니라 실천문학사가 간신히 회복해 가고 있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는 행위를 한 셈이 되고 말았다. 편집자문위원들이 있고 나도 그중 한 명인데 아무 상의 없이 고은의 시집과 대담집을 냈다는 것에 대해 서운함을 감출 수 없다. 심지어는 146호의 책임편집을 맡은 구효서 씨는 자신도 모르게 고은의 시 「김성동을 곡함」이 들어갔다고 한다.
윤한룡 대표는 실천문학사에서 책을 낸 모든 사람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 11명 편집자문위원 전원에게 사과해야 한다. 앞으로 누가 계간지 『실천문학』에 글을 실으려 하겠는가. 2023년 봄호에 사과문을 싣기를 제안한다. 그리고 시집과 대담집을 다 회수하는 게 좋겠지만 여의치 않다면 “전 지구적 시인 고은의 신작 시집”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시집 띠지라도 벗겼으면 좋겠다. 이런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푸른사상에서 『오늘의 좋은 시』(2004)를 펴낼 때 나는 고은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분홍빛 발이 떨고 있다.

오늘 너는 그동안의 실험으로
암에 걸린 것이 밝혀졌다.
오늘 너는 그동안의 몇 차례 실험으로
동맥경화에 걸린 것이 밝혀졌다.
틀림없다.

오늘 너는 단 한번의 실험으로
네 분홍빛 다리가 오그라들었다.

아주 침착하고 인자한 교수의 실험은 끝날 줄 모른다.

오늘 네 옆의 유리상자 안에서
살아 있는 네 친구를 두고
너는 조용히 시체가 되어가고 있다.

나도 시체가 되어가고 있다. 다른 시간이 오고 있다.
ㅡ「흰쥐」 전문(『문학과 경계』 2003년 여름호)

이 시를 그해에 발표된 시 가운데 우수작으로 선정하고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우리는 간혹 텔레비전을 통해 동물실험의 대상이 된 흰쥐를 본다. 별다른 감정 없이. 흰쥐들은 일본군 인체실험의 대상이 된 마루타와 다를 바 없다. 다시 말해 엄청난 고통을 겪다 죽는다. 암에 걸리고, 동맥경화에 걸리고, 단 한 번의 실험으로 분홍빛 다리가 오그라드는 흰쥐를 시인은 연민의 정에 휩싸여 바라보고 있다. 옆의 유리상자 안에서 살아 있는 친구들을 두고 조용히 시체가 되어가고 있는 흰쥐는 어찌 보면 나의 모습이다. 하늘과 땅과 바다가 다 오염되어 있는 문명사회에서 우리는 각종 약을 상복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질병을 떨쳐버릴 수 없다. 인간의 약 개발을 위해 무수히 희생되는 실험용 쥐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시심인 것을.

‘의학과 문학 접경 연구소’ 주관 세미나에서 시와 약의 관계에 대하여 논문을 발표했는데 다음은 그 일부다. 재판이 끝난 이후, 아무도 고은의 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때였다. 

고은의 등단작은 「폐결핵」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1958년, 친구 나병재가 한국시인협회 기관지인 『현대시』 제1집에 천거하여 실리게 된다. 이 시를 좋게 본 서정주가 고은에게 시를 달라고 하여 그해 『현대문학』 11월호에 「봄밤의 말씀」 「泉隱寺韻」 「눈길」을 게재, 추천사를 써줌으로써 전격적으로 등단의 길을 열어주어 고은은 시인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시인에게는 누나도 누이동생도 없었고 당연히 폐결핵에도 걸린 적이 없었다.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ㆍ하이드라지드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긴 숨이 창의 하늘로 삭아 가 버린다.
  오늘 슬픈 하루의 오후에도, 
  늑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신이 
  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
  지금은 틀거울에 담은 기도와
  소름 마르는 아래 얼굴,
  모든 것은 이렇게 두려웁고나.
  기침은 누님의 간음, 
  한 겨를의 실크빛 연애에도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을
  누님이 그렇게 보고 있다.
  언제나 오는 것은 없고 떠나는 것뿐
  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
  화장 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폐결핵」 전반부

이 시의 화자는 남동생이다. 폐결핵 환자인 동생을 문병하러 온 누나가 기침을 한다.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는가 보다. 동생이 누나가 옮겨준 병에 걸린 것인데, 전혀 원망하는 마음이 없다. 이 시가 폐병을 앓는 친구에게 선물했다는 일화는 이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화장한 얼굴에 땀이 흘러 닦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누나가 완치되지 않은 것 같다.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땅에는 폐결핵 환자가 많았고 이 병으로 죽는 사람도 많았다. 누나가 늘 먹던 하이드라지드(Hydrazide)병 속의 하얀 알약 파스(PAS, Para-amino Salicylic Acid)를 이제는 동생이 먹고 있으니 누나는 애처로워 한숨을 내쉰다. 누나의 기침으로 말미암아 균이 퍼져 동생이 폐결핵에 걸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시인은 “기침은 누나의 간음”이라고 했다. 근친상간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이기에 전염이 되고 만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공기를 통해 전염되는 폐결핵의 증세를 고은은 “늑골에서 두근거리는 체온의 신이/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 유한양행이 만든 결핵약 파스가 이 땅에서 폐결핵을 몰아낸 1등공신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70년대 시문학사를 정리할 때도 고은을 중요하게 다뤘고 체험과 상상력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고은의 시를 예로 들며 기술한 기억이 난다. 2008년에 내가 운 좋게 시와시학상을 탈 때 다섯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고은 시인이었다. 고은 시인의 시집 『해변의 운문집』 『文義마을에 가서』 『부활』의 초판본을 갖고 있고, 장편소설 『산산이 부서진 이름』과 『내가 만든 사막』을 사서 읽었다. 산문집을 헤아려보니 『절을 찾아서』 등 무려 7권을 소장하고 있다. 시집 『만인보』 중 5권과 장시집 『백두산』 6권 전권을 갖고 있다. 고은 시인의 오랜 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문단에 복귀하면서 보여준 태도는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 나는 죄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게 아니라 이번에 내는 시집이 내 오랜 반성의 결과물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공정하게 이뤄지게 마련이다. “내 아내나 나 자신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시인을 고운 눈으로 바라볼 사람이 없다는 것을 왜 모를까. 
나는 문제의 날, 현장에 없었던 사람으로서 고은 시인을 단죄하는 자리에 설 생각이 없다. 하지만 1심, 2심 재판에서 사법부가 고은 시인의 행위가 타인에게 성적 수치심을 줬다고 판결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정말 죄가 없다고 생각했다면 대법원까지 가서 시비를 가렸어야 했다. 항소하지 않고 재판을 중단했는데 인터뷰 자리에서 무죄를 주장하면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고은 시인이 왜 그것을 모른단 말인가. 
까마득한 후학이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고은 시인의 앞으로의 행보가 자신의 문학 전체를 살리는 길과 죽이는 길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변호사 역할을 자임한 실천문학사의 사활도 윤 대표의 앞으로의 행보에 달려 있다는 고언을 하고 싶어서이다. 아무튼 올해 봄호부터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자문위원에서 내 이름을 빼주기 바란다. 
이제 곧 설날이 된다. 한가위와 함께 우리나라 2대 명절 중 하나인 설날에는 차례상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점점 줄어들고 있지만.) 이날은 부모님을 비롯하여 조상을 만나는 날이라고 우리 선조는 생각해왔다. 고인의 함자를 지방(紙榜)에 써놓고 절을 하는 이유 중에는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살게끔, 즉 타인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보살펴달라는 뜻도 담겨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 식구의 무병과 무탈을, 자식의 합격과 성공을 기원하면서 절을 올리겠지만. 
사람은 죄송하다고 말하는 이에게 침을 뱉지 않는다. 고은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반성과 사과이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올랐던 고은 시인의 시를 온당한 평가의 대상으로 복귀시키려면 자신의 결단이 중요하다. 그것을 나는 바라고 있을 뿐이다.

                                                   2023년 1월 19일
                                                        이승하.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