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가 읽은 이 시를’(144)/ 첫사랑에 대한 기억–김진환의 「생머리를 찰랑이는 여자」
 
생머리를 찰랑이는 여자 

김진환


혼잡한 전철에서
머리를 비껴 흔들며
생머리를 찰랑이는 여자

나풀대는 긴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사르르 훑고 갔다

생명부지 여자의 급작스런 한 방
익숙하게 풍겨오는 샴푸 향기 한 줌

무심한 듯 별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지워진 기억이 한 풀 두 풀 얼굴을 훑고 갔다

가지런히 빗어 내린 긴 생머리
마음이 크게 찰랑거릴 만큼
공기처럼 훑고 갔던 그녀가 생각났다
습관처럼 머리를 흔들어대는
그런 여자와의 첫사랑이 떠올랐다.

ㅡ『어리연꽃 피어나다』(문학아카데미, 2023)에서

 

<해설>

첫사랑과 결혼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대체로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시절에 찾아오는 첫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나거나 어설프게 진행되다가 끝나고 만다. 성장소설의 명작 황순원의 「소나기」를 보면 윤 초시의 손녀가 여간 잔망스럽지 않게 자기가 죽거든 자기가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달라고 말하고 눈을 감는다. 소나기가 내린 날 소년과 함께 보낸 그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강신재의 「젊은 느티나무」는 이 나라에서는 결혼할 수 없는 청춘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김진환 시인은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간 한 여성의 찰랑이는 생머리를 보고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던 여성을 떠올린다. 마침 지하철에서 지나친 여성은 머리를 감고 나왔는지 샴푸 냄새를 풍긴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지자 아련한 그리움의 대상을 뇌리에서 호출한다. 하지만 첫사랑을 잠시 회상하기만 할 뿐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 

인간은 어찌 보면 추억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동물이다. 아픈 추억도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슬픈 기억도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 첫사랑이었던 그녀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회상만 하는 것이 좋다. 영화 <닥터 지바고>를 보면 몽매간에 그리던 연인 라라를 지상 전철 안에서 보고는 황급히 내려와 뒤따라가다가 심장마비로 급사한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행복하겠지만 첫사랑을 만난 사람은 불행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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