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무장해제

이종하


아파트 같은 동 이웃집에는
자식과 인연 끊은 노부부가 산다
부모 자식 이어진 핏줄에 뜨거운 피가 흐르기는커녕
얼어붙은 개천처럼 냉랭한 물이 흘렀다는데
본처가 죽자 뒤늦게 할아버지는 재혼을 하고
새어머니와 겉절이처럼 새콤달콤 살다가
며칠 전 할머니마저 은행 통장을 남기고 세상을 뜨셨다
통장에 있는 돈을 찾으려면 
호적에 올라 있는 자식들의 상속 증명이 필요했는데
그동안 등 돌리고 살아온 터라
만나려 해도 쌓인 무기가 너무 많아 
무장해제가 어렵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이웃사촌 덕분에 한마디 거들었다
얄궂은 게 인연이라지만
부모가 무장을 해제하는 것도 인연이라고

ㅡ『우화의 저녁』(도서출판 서정문학,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이런 사연이 다 있다. 새로 맞아들인 아내가 죽었으니 그의 자식들(유산 상속자)의 동의가 있어야지 아내의 통장에 들어 있는 돈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게 지금 어렵다고 이웃집 할아버지가 푸념하고 있다. 화자는 충고한다. 결자해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 바로 당신이라고. “호적에 올라 있는 자식들” 중에는 할아버지의 자식도 있고, 이들의 동의도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할아버지와 그 자식들과의 사이는 좋을까?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외국의 경우다. 두 사람 다 아이가 있는 상태에서 재혼했고 이들 사이에도 아이가 태어났다. 아내가 남편에게 얘기한다. ‘당신의 아이와 내 아이가 우리 애를 때렸어요.’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가속화된 가족해체는 우리 사회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에 들은 실화다. 땅만 열심히 파던 농촌 노총각이 자기 남동생인데 동남아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평생의 소원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여성은 남자의 재산을 교묘하게 다 빼먹고 달아났다. 나중에야 여성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잠자리를 거부했던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국제 브로커와 연결되어 있던 여성은 법망을 다 빠져나가 손을 쓸 수 없었다고 한다. 가정이 이렇게 해체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 시 속의 할아버지가 재혼해서 죽은 아내의 재산을 상속받았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녀의 자식이 끝내 거부하면 돈을 찾아 쓸 수 없는 것이 이 나라의 법인가 보다. 가정법원에는 온갖 사연이 다 있을 터인데, 3대나 4대가 한 지붕 아래 살았던 농경사회에서는 없던 사연들이리라. 천륜이라고 하는 부부지간의, 부모 자식 간의 인연이 악연이 되면 어떻게 하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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