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아버지가 있던 집 

안영희 


철둑 너머 가야 할, 먼 집을 두고
어쩌자고 난 그 집 앞에 서 있었다

측백나무 울타리 가지 사이
낯선 신발들 어지러운 현관이 눈에 들자
그만 주르륵, 첫 책가방을 멘 뺨에
뜨겁게 타고 내리던 눈물

양지의 장작비늘에 외할머니가 기대 졸고
모과나무 한 그루 수문장 선 2층집 그 현관은 
오직 내 공간이었다
괜찮다 괜찮다, 아무리 어머니가 타일러도
아버지의 장화를 꺼내놓고 
비가 오는데 우산 없이 출타한 아버지,
어떡해! 어떡해! 아버지 비 맞으믄 어떡해!
우산을 챙겨들고 안절부절 그 문턱을 떠나지 못하고 
울던,
내 생애 가장 먼 그 주소만을 나는 어찌 기억하고 있을까?

일본식 목조 집 복도 끄트머리 화장실에
생의 걸음마를 시작한 나를 위해
긴 노끈 손잡이를 매달아준 아버지

눈발치고 헐벗은 박수근의 그림 같은 세상에,
안 괜찮은 세상에,
목도리 한 장, 양말 한 켤레도 안 돼 준 아버지가
나를 위해 있었던 집, 명치정 33번지 

ㅡ『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했다』(서정시학,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시인은 아주 어렸을 때의 추억을 더듬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광주 명치정은 훗날 금남로가 되는데, 시인은 어린 시절에 그곳에서 자랐나 보다. 우리는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 성장기를 보낸 곳에 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 집 앞’에 서면 추억이 와락, 뇌리를 엄습한다. 어떤 경우에는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파트 단지나 상가가 들어서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안영희 시인이 다시 찾아본 집은 그런대로 보존되어 있었나 보다.

 아이는 아버지를 많이 좋아했다. “목도리 한 장, 양말 한 켤레도 안 돼 준” 가난한 아버지가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위해 긴 노끈 손잡이를 매달아주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여 가장 노릇을 제대로 못 해주었지만 딸을 지극히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를 딸은 끔찍이 사랑하였다. 비가 오는데 우산을 갖고 외출하지 않은 아버지가 걱정된 아이는 아버지의 장화를 꺼내놓고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엄마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이 아이의 마음일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착한 것이 미덕이 아니라 영악해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시인은 그렇게 주장하고 싶지 않다. “우산을 챙겨들고 안절부절 그 문턱을 떠나지 못하고/울던” 아이의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을 시인에게 아버지는 자상한 분이었을 뿐이다. 무능한 가장이 아닌.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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