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아버지를 통과할 때

정상미


오빠와 나는 줄곧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

오랜만에 나타나 잘못을 불라 심문하던 숨어도 매번 찾아내 종아리에 피멍 들게 한, 악마 따위 없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스케치북엔 그가 없고 아.버.지.란 말 지웠다 시커먼 그림자는 쉽게 죽지 않아서 까끌한 수염에 자다가 소스라쳤다 몰래 다가와 딸의 볼을 훔치던 그 사람

오래된 내 토막잠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회초리는 숨겨도 걸어 나왔다 좀비처럼

아궁이에 숨었다가 치마 끝단에 끌려 나와 숯검댕이 얼굴로 가슴까지 까매진 남매, 그가 처음 아버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선을 넘나들며 짐승처럼 살아온 포로수용소 거제도의 통점에 데었을 때다 밥 먹을 때 건드리던 손님 손 물었다고 어제는 진돌이를 사정없이 패다가 팔아버린 아버지, 환청을 걸으며

악몽은 진행 중이다
역사의 빗금 질기다

ㅡ『안개의 공식』(책만드는집,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서사가 확실하게 읽히는 시다. 오누이는 아버지를 증오했다. “오랜만에 나타나 잘못을 불라 심문하던 숨어도 매번 찾아내 종아리에 피멍 들게 한” 가혹한 아버지였다. 자고 있을 때 다가와 볼에 뽀뽀하던 게 그렇게도 싫었다는 게 이해가 간다. 아버지가 엄한 것하고 폭력이 심한 것하곤 차원이 다르다. 아이가 잘못을 확실히 저질렀을 때 아버지가 종아리를 때리면 반항심을 품지 않는다. 이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전형적인 폭력가장이다. 

 두 가지 에피소드가 더 나온다. 아버지가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이라는 것과 밥 먹는 개를 건드린 손님의 손을 물었다고 개를 실컷 패주고는 팔아버렸다는 것. 아버지는 거제도에서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살아갔고, 화자는 아버지의 폭력성이 거기서 연유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상흔이 50년이 지나도, 60년이 지나도 아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통과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아버지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통과하였다? 그때의 절망적인 상황을 통과하였다? 긴 세월을 통과하였다? 아버지의 마음을 통과하였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통과하였다? 독자에게 정답 풀이를 맡기고 시인은 말한다. 역사의 빗금이 참 질기다고. 이 비극은 세월이 가도 절대 희석되지 않을 것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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