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어름사니 

박남희


위험한 노래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
네 뒤에 숨어 출렁이는 기억을 만날까
너의 그림자를 만날까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타고 오르는 거미처럼
바람이 두고 온 길을 걷다 보면
뜻밖에도 지워진 기억을 만날까

노을 위를 걷다 보면 나를 만날까
얽히고설킨 노을 밖의 길을 만날까
길이 놓친 달빛을 만날까
달빛이 버린 꽃을 만날까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데
기억의 들판이 자꾸 낯선 길을 새로 만들고
기억이 버린 것들이 무심히 너를 기다리는데
네가 떠나보낸 나를 기다리는데

구름아
바람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
너와 함께 무심히 흘러온 나를 만날까

출렁이는 밧줄이 붙잡고 있는 바람을 따라
아득한 벼랑 위를 걷다 보면,

ㅡ『어쩌다 시간 여행』(여우난골,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줄타기 재주가 뛰어난 명인을 어름사니라고 한다. 사당패의 온갖 재주 중에 대표적인 것이 줄타기였다. 경기도 안성 칠장사는 사당패의 근거지였다. 특히 바우덕이(본명 김암덕)가 안성 남사당패의 우두머리가 된 이후 전국의 사당패 중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다. 대원군이 경복궁 재건 시에 기예로써 큰 공을 세운 그녀에게 정3품이 사용하던 옥관자를 수여했던 것이다. 박남희 시인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추스르지 않고 ‘만남’의 의미를 추적하였다.

 어름사니는 줄 위에서 걷고 달리고 깨금발로 뛴다. 깡충깡충 뛰기도 하고 뒷걸음질도 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만난다’란 말을 열 번이나 한다. 어름사니는 줄 위에서 혼자 놀지만 관객을 ‘만나는’ 행위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길을 간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를 만나기 위함인데, 줄 위의 길도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 아닐까. 

 그리고 길을 간다는 것은 너를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을 걷다가 결국 집으로 오는데, 집에 와서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본다. 나를 본다. 나를 만나게 되는 줄 위의 길! 노래 위를 걷고 노을 위를 걷고 바람 위를 걷는 어름사니. <왕의 남자>의 공길이와 장생이 생각난다. 줄 위에서 놀면 어름사니와 우리는 일심동체가 되고 자연의 일부가 된다. 솟구쳤다가 빙글 돌아앉고. 앉아서 걷고, 서서는 물론 걷고.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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