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제비꽃 연가(緣家)

이심훈


창고형 마트 높다란 벽과 보도 블록 
맞닿은 가장 낮은 모서리하고도 틈새
바람 부는 대로 섭슬려 온 막다른 길  
제비꽃들 모여 암팡지게 살림 차렸다.

지구촌 난민 1억 명이 넘었다. 세계 인구 80명 중 한 명은 난민으로,* 미성년이나 노인이 절반을 넘는다. 새가 넘나드는 길인데 오가지도 못하고, 폭염 재난문자에 묻어오는 미세먼지도 넘는데. 물고기가 오가는 길인데 넘나들지 못하고, 일회용 페트병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나 봐

리비아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기니, 베네즈웰라에서 콜롬비아로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를 통과하여 미국 국경선에 대치 중. 오대양 육대주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반기는 이 없이 물큰 번지는 제비꽃 난민

휴가철에 가장 많이 버려진다는 애완동물 
이상 수온 백화현상에 황폐한 산호초 군락  
온난화로 빙하 녹아 멸종위기인 북극곰
너나없이 딱하디딱한 지구촌 난민들인데
없는 게 없는 창고형 마트 축대 아래
 
더 갈 곳 없는 막다른 길섶에서도 
꽃 피고 열매 맺는 연보랏빛 삶을 
꽃술 이슬로 품은 제비꽃들의 연가.

* 유엔난민기구 <연례 글로벌 동향 보고서>(2022년 6월 16일).

ㅡ『뿌리의 행방』(한국문연,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제비꽃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어디든 날아가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시인은 창고형 마트 높다란 벽과 보도 블록 사이 틈새에 암팡지게 살림을 차린 제비꽃의 생명력을 보고 감탄했다고 말한다. “더 갈 곳 없는 막다른 길섶”에서도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연보랏빛 제비꽃은 꽃술 이슬을 품는 연가(緣家, 인연이 있는 집)를 가능케 하는데 이 지구촌의 난민은?

 시인은 사실 제비꽃을 예찬하려고 이 시를 쓴 것이 아니다. 세계 인구 80억 중 1억이 넘는다는 난민에 대해 쓴 시다. 이민은 조국을 스스로 떠난 것이지만 난민은 전화(戰禍)나 천재로 어쩔 수 없이 떠난 것이다. 즉, 집을 떠나 국경을 넘었지만 거주할 곳이 없다. 난민의 설움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랴. 난민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자기네 나라 사람들도 먹고살기가 빠듯한데 난민을 보살펴줄 여력 있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의식주 해결이 급선무이므로 대체로 난민은 이국에 가서 밥을 구걸해야 한다. 잠을 재워달라고 빌어야 한다.

 시인의 시각은 제4연에 이르러 정치적 난민에서 확대되어 유기견과 유기묘, 황폐한 산호초 군락, 생태환경 문제로 인해 집을 잃은 북극곰들로 이어진다. 지구상 수많은 동물과 식물이 이제는 난민 신세라는 것이다. 그래도 제비꽃의 생명력은 위대하니 우리는 모두 저 제비꽃의 생명력을 본받아야 한다. 악착같이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시인의 말이 백 번 옳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