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이창규


쪽방에 든 순간에 길은 다시 열리나
쪽창을 열지 않고도 내다보는 서편에
쪽달은 반쯤 기울어 생각을 쏟고 있네

네 쪽은 거기 있고 내 쪽은 여기라며
쪽 진 머리 풀고서 울고 있는 당신은
기억의 방에 갇혔나 절반 녹은 반쪽에

저 달, 가는 길에 쪽빛으로 나앉아서
애저녁에 놓쳐버린 쪽배 다시 부르나
쪽물 든 포구를 향해 빈손 펼쳐 흔드네

ㅡ『시조21』(2023년 겨울호)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3수로 이뤄진 연(連)시조인데 ‘쪽’이란 글자가 제목을 포함해 11회 나온다. 그런데 쪽방이든 쪽물이든 무리하게 억지로 갖다 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순우리말을 이용한 언어유희인데, 한자로 표현하면 가히 천의무봉이요 우리말로 표현하면 안성맞춤이다. 다만 3수가 각각이라 연결에 다소간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일부러 1, 2, 3이란 아라비아숫자를 붙일 필요는 없겠다. 

 첫째 수는 주제가 그리움이다. 둘째 수는 외로움이다. 셋째 수는 애달픔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수용자들도 독방에 있는 것을 힘들어한다는데 사형수들은 도대체 일과를 독방에서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하다.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빼고 가만히 벽을 보고 있다면 얼마나 무료할까.

 시인은 ‘쪽’을 갖고 시를 쓰기로 하고 ‘쪽’으로 시작하는 우리말을 수집하였다. 참 좋은 우리말이 이렇게 있었구나! 감탄하면서 읽었다. 한 쪽, 두 쪽, 쪽문, 쪽마루, 쪽박, 쪽지, 쪽창……. 쪽쪽 빨다. 이렇게 좋은 우리말이 있으니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이창규 시인이 계속 찾아 나가길 바란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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