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처녀들의 난 1
ㅡ시, 눈총, 잠

고명자


한 땀 한 땀의 

한 땀 한 땀의 
읊조림  
졸음은 처녀보다 힘이 세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피댓줄에 머리카락이 감겨들어도 
잠은 온다, 뒤통수에서     

미싱 대가리와 너희는 용량이 같다
졸지 마라   
다섯 달 치 월급 그 까짓것 쫌 기다려봐라    
시간은 바이어스처럼 늘어나 매일매일 새날이니     
처녀들아 너희 흰 손가락을 바쳐라  

졸음의 특효약 
약 종이에 베껴온 詩를 털어 넣고 오물거렸다    
무엇과도 섞이지 않으려고 미싱 다이 한쪽에 詩를 감춰놓고   
혼자 곱씹는 행복 때문에 미안했다 
詩에는 눈총과 소음 먼지와 잠이 없다  
   
처녀들의 햇무 같은 종아리에 
파란 힘줄이 장다리꽃으로 번져갔다
미싱 발판 죽어라 밟아도 꽃밭에는 닳지 못한다 
약봉지처럼 창백한 얼굴에 마른버짐이 펴져갔다   
 
땡땡이 가라 월남치마는 불티나게 팔렸다지만 
지구의 아줌마들이 환호했다지만
사장은 튀고 말았다   
시다, 오바로꾸, 미싱사 언니들은 웅성웅성 뿔뿔이 흩어졌다  
공장은 많고, 많고, 많은 이 땅에
월급을 떼여도 
평화를 찾아 날아가는 비둘기 떼    
그럼에도, 시는 분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평화시장은 가난을 배우는 교실
교복이나 책가방 따위 허울은 필요 없다   
시 한 편과 같은 
그런 평화 
졸음처럼 와주시길 졸면서 읊조렸다      

ㅡ『나무 되기 연습』(걷는사람,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걷는 사람 시인선 103권, 고명자 시인의 『나무 되기 연습』은 편편의 시가 사람을 압도한다.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과 백무산의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와 김신용의 『개같은 날들의 기록』이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후 송경동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현실 노동계 문학의 침체를 아쉬워하고 있던 차에 읽은 『나무 되기 연습』은 전시대의 감동을 그대로 복원시켜 준다.

 이 시의 주인공은 졸음 때문에 미싱(재봉틀)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는 어린 노동자다. 그녀는 시를 너무나 좋아해 “약종이에 베껴 온 시를 털어 넣고” 오물거린다. 시에는 상급자의 눈총과 공장 안의 소음과 먼지가 없었고, 그리고 잠이 안 오게 했다. 공장이 부도가 났는지 사장은 튀었고 남은 시다, 오바로꾸(오버로크), 미싱사 언니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시를 좋아한 한 처녀는 분노를 가르쳐주지 않은 시 안에서 행복하였다. “시 한 편과 같은/그런 평화/졸음처럼 와 주시길 졸면서 읊조렸다”고 하니 운명처럼 시인이 되어야 했다. 노동의 새벽에 그녀는 노동을 했겠지만 쉬는 시간에는 시를 읽었을 것이다. 시만이 구원의 손길이었기 때문이다. 투쟁 일선에 나서지 않았음을 후회하기도 하지만 일하는 틈틈이 펜을 들고 시를 쓰게 되었다. 박력이 있는 시, 땀이 배어 있는 시, 눈물을 글썽이는 시, 갈망이 있는 시. 세 번째로 내는 고명자 시인의 이번 시집은 근년에 내가 읽은 최고의 시집이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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