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ㄴ의 자세

서안나

의자가 ㄴ으로 자란다
흙에 다리를 묻고 싱싱하다

군부독재 시절 학생들은 ㄱ으로 각을 잡아야 했다
정치군인들은 탱크를 ㄱ으로 몰아 정권을 탈취했다
ㄱ으로 허리를 곧게 펴야 바른 정신이 깃든다는
공화국의 표어엔 감정이 없다
사람의 목숨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 밖을 떠도는 문장이었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운동장을 고르고 잔디밭 풀을 뽑고 
돌을 치우고 폐휴지를 모았다
교련 시간에는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했다
압박붕대와 삼각건 묶는 법을 배웠다 
교련 선생 앞을 지날 때는 손에 날을 세워 ㄱ으로 경례했다
교련 선생의 군복에는 퇴역 장교의 계급장이 반짝였다
군인과 민간인의 경계가 자주 지워졌다

공화국은 개인보다 단체를 사랑했다
전국체전을 위해 방과 후에 꽃술을 들고 마스게임 연습을 했다
응원단석에서 카드섹션으로 대통령의 얼굴과 
무궁화를 그렸고 계몽적인 문구를 만들었다

일탈하는 아이들에겐 구둣발과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학생부장은 학생들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고
교무실과 복도에서 학생들에게 원산폭격을 시켰다  
지친 학생들이 썩은 이처럼 쓰러지면 
교련복 무늬에 있던 원형생물 같은 것들도 함께 쏟아졌다
폭력도 사랑이었다

대학도 수업 대신에 공강과 데모가 더 많았다
강의실에서 깊게 숨을 들여 마시면 
탱크처럼 언덕을 기어오르는 지랄탄 냄새가 독했다
대학 캠퍼스는 아름다우며 공포스러웠다
친구와 선후배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인간에게 군인의 예법을 심느라 고생했다 공화국이여
천정과 벽은 ㄱ으로 만나고 
벽과 사람은 ㄴ으로 만난다 
당신이 내게 ㄱ으로 기대어 와
ㄴ으로 입이 되고 자유의지로 일어서서 집이 된다

의자가 ㄴ으로 앉아 있다 
푸른 아이들을 힘껏 밀어 올린다

ㅡ『애월』(여우난골,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유신독재체제를 확립한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에 맞서야 한다고 국방을 강조했다. 북한에 노동적위대가 있다면서 예비군을 만들었고 붉은청년근위대가 있다면서 학도호국단을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 3년을, 대학교 때 2년을 군사교육을 받아야 했고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도 제대할 때의 계급에 따라서 다르지만 15〜20년 정도 예비군에 편성되어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돌파할 것 같다. 1979년 10월 26일부터 1979년 12월 12일까지 세상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 유신독재 때 만들어진 교련 과목이 제5공화국이 들어서자 더욱 살벌하게 전개되었다. 전쟁이 곧 일어날 것처럼 야간등화관제훈련을 여러 번 했다. 민방위훈련은 매달 했다. 제5공화국 정권이 광주에서 무자비한 학살극을 자행하고 나선 세상을 더욱더 공안정국으로 몰아갔다. 

시인은 그런 억압 체제를 ‘ㄱ’의 세계로 보았다. 절도 있는 행동을 강요당했고, 고개 숙이는 인사보다 경례가 더 예의바른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ㄴ’은 의자의 세계다. 쉴 수 있는 세계다. 대화를 할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제5공화국도 제6공화국도 ‘ㄱ’의 세계를 고집하면서 ‘ㄴ’의 자세를 허용하지 않았다. “천정과 벽은 ㄱ으로 만나고/벽과 사람은 ㄴ으로 만난다”가 의미심장하다. 각진 ㄱ의 세계에서 편한 ㄴ의 자세로 만드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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