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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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를 위한 기도

허영자

내가 함부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

쓰리고 고단한 삶 때문에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

알 수 없는 궁륭穹窿
어두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

운명의 굴레를 헤치고 헤쳐 나와
만신창이 얼굴이 꽃같이 피어날 때
신이여

비로소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해 주세요.

ㅡ『허영자 시선집』(동학사,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오늘은 크리스마스날입니다. 중동지방의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난 날을 오늘로 잡아 전 세계에서 축하 행사를 갖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날이 경건한 기도의 날이 아니라 요란한 축제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서울의 모든 고급 호텔이 24일 밤에 만원이 되
었다는 소식, 하룻밤 숙박비가 100만원이 넘는 곳이 많고 호텔에서 파는 30만원이 넘는 특별 케이크도 한 달 전에 주문이 끝났다고 합니다. 미리 숙박 예약을 한 사람이 웃돈을 받고 파는 사례가 넘쳐나지만 이 또한 없어서 못 산다고 하니 기절초풍할 일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오늘만큼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중동과 동구에서는 지금도 포성이 울리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노인네들과 부녀자들이 무슨 죄가 있어 포탄에 목숨을 잃어야 합니까. 지진은 또 왜 이렇게 자주 일어나는지!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마구 방류하고 있고 미세먼지 농도는 짙고 독감 환자는 늘고 있습니다. ‘주여! 지금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치유와 평화의 손길을 뻗쳐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허영자 시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이름을 편의적으로 부르면 안 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나를, 우리 집을, 우리 교회(성당)를 도와달라고 예수님을(혹은 주님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또 자기 몸이 아프거나 죽음의 두려움이 엄습하면 찾는 주님은 우리네 이기심의 소산이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굴레를 헤치고 헤쳐 나와/만신창이 얼굴이 꽃같이 피어날 때” 신을 외쳐 부르면 그 기도는 들어줄지 모른다고 합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노력이 있어야지만 신은 응답할 터이므로 허영자 시인은 오늘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래도 크리스마스인데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남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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