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장 가는 길 

김유조

마음 답답한 날은
심우장 오르던 길을
되새긴다
저 기억의 꼬불꼬불 힘든 언덕길
선종 깨달음의 경로처럼
소를 찾아 떠나는 험로
삶이 그렇듯 어찌 넓고 곧기만 하랴

옛 총독부를 뒤로 하고 앉은
팔작지붕 민도리 일자 집은
만해 대선승(大禪僧)의 항일 독립의지의 표상일진데
거기 닿는 비좁고 가파른 길을 예지한 데에는
수행의 깊은 뜻 서려

삼 년 기거의 마지막 흔적은
오도송(悟道頌) 친필에 담아 벽에 걸고
손수 심은 마당의 향나무도
이제 백년을 헤아리는데

모진 속세의 인연이런가
일본 대사관이 저 아래 건너편에
다시 따라와 앉아 있고
부자 동네가 된 성북동 고대광실들
그 한켠에는 아직도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집
더 위쪽으로는 북정 마을
하늘 아래 마지막 달동네
사바세계의 잡사 얽힌 풍경

북향이라 어두운 듯 슬픈 듯이
내려다보고 있는 심우장은
남향 뒤꼍 산에서 내려온 햇살 불심삼아
네 칸 방 환히 밝히면서
허위단심 올라온 중생을 반긴다.

ㅡ『낯선 풍경』(국제PEN한국본부, 2023)

<해설>

일제강점기 때 만해 한용운 대선승이 없었다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친일문인’으로 일컫는 수많은 문인 중 젊은 시절에 바르게 뜻을 세우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던가? 없었다. 일본에 유학 가서 선진문물을 접하고 와서는 갈등의 시기를 거친다. 30년대 중반부터 일본이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자 이에 현혹되어 그만 친일문인으로 훼절하고 마는 것이다. 일본은 러일전쟁과 중일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공해 복속시킨다. 일본제국이 영원무궁할 줄 알았지 무조건 항복할 줄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용운은 설사 조선이 영원히 일본의 압제에 허덕이게 될지라도 반제ㆍ반일의 초지를 꺾지 않았을 것이다. 김유조 시인은 심우장까지 가는 좁은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한용운의 항일 독립의지를 생각해본다. 심우장은 총독부 쪽으로 집이 향하는 것이 싫다고 “옛 총독부를 뒤로 하고 앉은/팔작지붕 민도리 일자 집”으로 지었다. 

일제는 한용운에게 엄청난 회유와 협박을 가했지만 일제에 아부하는 글은 그는 단 한 줄도 남기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나로선 불가사의하다. 자료를 찾아보니 일제하에 기독교와 천주교, 불교의 여러 종단과 여타 민족 종교 단체에서도 일제에 온갖 아부를 했다. 가령 항공기 만든다고 모금 운동을 벌이면 이들 단체에서 나서서 거금을 희사하는 식이다. 그런데 한용운은 콧방귀를 뀌었다. 『님의 침묵』 출간 이후에도 수많은 작품과 저작을 남겼다. 

만해 한용운이 입적한 지도 80년이 되었다. 김유조 시인은 심우장을 찾아보면서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일본 대사관이 저 아래 건너편에/다시 따라와 앉아 있고/부자 동네가 된 성북동 고대광실들/그 한켠에는 아직도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집”이다. 만민평등사상은 어디 가고 없고 사바세계의 잡사가 시인의 심사를 어지럽게 한다. 

최근에 한 젊은이에게 들은 얘기다. 친구들 열이면 열 모두 일본에 대해서 극단에 가까울 정도의 호감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일본 여행 안 해본 친구가 없단다. 어디를 가도 깨끗하고, 사람들 친절하고, 음식 맛있고, 물건 싸고……. 일본 애니메이션, 일본 소설, 일본 만화 중 하나에는 반드시 심취해 있다고 한다. 중국은?이라고 물어보니 이렇게 답했다. “중국 여행 하고 싶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은 백 명 중 한 명도 없을 걸요. 한자는 보기만 해도 짜증나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심우장(尋牛莊)에 가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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