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한송희 에디터

플래카드들
ㅡ서울

이은봉

튼튼한 거치대를 다리 삼아 제 몸을 주욱, 펼치는 놈들 있다 거치대들 사이사이 종로에도, 여의도에도 제 몸 크게 펄럭이며 ‘나를 보아라’, 소리치는 놈들 있다

무엇인가를 자랑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홍보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선전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팔아먹기 위해

이놈들, 서울 도심의 이곳저곳 뻔뻔하게 널브러져 있다 바짝바짝 고개를 쳐들고 있다 어쩌다 보니 이놈들, 서울의,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ㅡ『뒤뚱거리는 마을』(서정시학, 2023)

이미지=뉴스페이퍼 제작

<해설>

 KBS였는지 MBC였는지 SBS였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뉴스 시간에 내가 나간 적이 있었다. 길을 가는데 마이크를 든 사람이 나를 가로막고 서서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저기 내걸린 현수막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평소의 소신대로 “완전히 공해입니다. 특히 정치가들의 구호는 대체로 허위고 과장입니다. 저걸 나중에 태워서 처리하면 그 또한 공기 오염의 요인이 될 겁니다. 플래카드 제발 안 보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이름만 말했고 시를 쓰고 있다느니 어느 학교에 있다느니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녁 뉴스 시간에 내가 등장했는데 이승하라는 이름의 시민으로만 나와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 화면을 본 지인이 뉴스에 나오더라고 전해주었다.

 지금도 플래카드에 대한 내 생각은 다를 바 없는데, 이은봉 시인이 이 시를 써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시내에 하루에 내걸리는 플래카드의 수는 수십 개가 아니라 수백 개일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에만도 정치권 인사의 치적 자랑 내지는 상대방 당에 대한 비방이 1주일이나 열흘쯤 걸려 있다가 다른 것으로 바뀐다. 자랑거리로 문구를 썼을 때는 분명히 자신의 공이 아닌데 자기가 한 일인 양 자랑하고 있다. 저런 사기는 법에 저촉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종시와 대전이 삶의 근거지인 시인인지라 서울에 간혹 오면 시내 곳곳에 걸려 있는 플래카드를 하루에도 수십 개는 보았을 것이다. 시인은 분기탱천하여 이 시를 썼는데 특히 정치 1번지인 종로와 국회의사당이 있는 여의도를 겨냥하여 비판을 가하였다. 후보자는 자랑하고 홍보하고 선전하고 팔아먹기 위해 플래카드를 거는데, 시인은 이런 행위가 아주 못마땅하다. “어쩌다 보니 이놈들, 서울의,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라고 대놓고 비판한다. 우리 시단에 이렇게 용기있게 정치권을 비판한 시인이 있었던가? 전에는 더러 있었지만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데, 이은봉 시인은 젊은 날의 의기가 다시 솟구쳤는지 이 시를 썼다. 플래카드 내거는 것이 규제가 될 수 없는 것일까?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공포와 전율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예수ㆍ폭력』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 등을,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 시조문학의 미래를 위하여』, 『욕망의 이데아』, 『경남 문인 4인을 새롭게 보다』 등을 펴냄.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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