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JFNB 사장

▲ 등촌동 26㎡(약 8평) 아파트에서 시작된 초콜릿을 향한 달콤한 꿈은 수제 초콜릿의 본고장 벨기에에서 꽃을 피웠다.
토종 브랜드인 쥬빌리 쇼콜라띠에는 국내 수제 초콜릿 시장의 선두주자다. 지난해 말부터 이 회사 일부 제품 뒤편에는‘메이드 인 벨지움’ 마크가 선명하다. 김영환 JFNB 사장은 왜 벨기에로 가야 했을까?

800만의 관람객을 동원하며 성황리에 열린 여수 엑스포가 끝났다. 세계 박람회답게 참가하는 업체들의 면면도 화려했다. 국가 이름을 걸고 운영되는 국가관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 왔다. 명품 초콜릿으로 유명한 벨기에관은 특히 경쟁이 치열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수백 개의 업체들 가운데 단 4개 업체 만이 선정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곳이 바로 ‘쥬빌리 쇼콜라띠에’로 유명한 기업 ‘JFNB’다.

쥬빌리 쇼콜라띠에는 몇 년 전부터 입소문을 타고 유행한 명품 수제 초콜릿이다. 여의도 등 수도권에만 11곳의 전문 매장이 있다. 하지만 쥬빌리 쇼콜라띠에는 경기도 파주에 본사를 둔 한국 기업이다. 어떻게 한국 기업이 벨기에를 대표해 엑스포에 나올 수 있을까.

초콜릿의 본고장으로 진출 

쥬빌리 쇼콜라띠에는 지난해 11월 벨기에 남부지역에 초콜릿 공장을 세우고 본격적으로 가동에 나섰다. 아직은 파주 공장 생산량이 많지만 벨기에 생산물량을 최대한 늘려나갈 계획이다. 김영환(42) 사장이 벨기에 생산을 시도한지 4년 만의 일이다.

▲ 녹록치 않았던 벨기에 진출. 전화기 개통에만 3개월이 걸렸다. 사진은 JFNB 벨기에 공장.
세계 초콜릿 업계에서 ‘메이드 인 벨기에’는 최상품을 뜻한다. 벨기에산 수제 초콜릿 가격이 10만원이라면 일본산은 7만원 한국산은 그 이하로 형성된다. 김 사장이 벨기에 생산공장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은 한 일본 바이어 때문이다. 이 바이어는 꼬박 1년 동안 구매결정을 내리지 못 했다. 김 사장은 분통이 터졌다. 그는 “우리 제품이 벨기에산이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낯선 유럽에서 중소기업이 직접 공장을 세운다는 건 특히 그 제품이 해당 국가의 특산품이라면 누가 봐도 무모한 도전이다. 한국 특산품인 인삼과 홍삼 가공식품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스위스 업체도 몇 된다. 하지만 다 지어놓은 공장(벨기에는 산업단지에 공장 건물을 지어놓고 기업에 분양한다)에 생산설비를 들여놓고 사람을 뽑아 돌리는 일에만 4년이 걸린 건 그만큼 힘들었다는 애기다. 한국과 유럽의 문화 차이가 발목을 잡았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일로 ‘벨기에 공장에 전화 놓기’를 꼽는다. 통신사에 전화 신청을 해놨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조차 없었다.

 
김 사장은 주 벨기에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부탁했다.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벨기에 장관급 인사를 만났을 때도 가장 먼저 “전화 개통을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효과를 못 봤다. 결국 전화선 하나 놓는 데 꼬박 3개월이 걸렸다. 이런 식으로 4년 동안 공장을 세우는 데 매달리던 김 사장은 이제 벨기에 산업계에선 유명인사가 됐다. 일본에 들린 벨기에 왕세자의 발길을 한국으로 돌린 것도 김 사장이다. 왕세자는 한국을 방문해 첫날 이명박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했고, 다음날 김 사장을 만나고서야 자국으로 돌아갔다.

여수 엑스포에 벨기에를 대표해 쥬빌리 쇼콜라띠에가 참가하는 데는 ‘벨기에 초콜릿 시장에 도전한 첫 아시아 기업가’라는 타이틀의 힘이 컸다.

그는 올해 할 일이 많다. 벨기에 중심가에는 쥬빌리 쇼콜라띠에 매장을 세울 예정이다. 벨기에 초콜릿과 그들의 심장에서 정면 승부를 펼치려는 것이다. 여수 엑스포를 계기로 벨기에산 초콜릿으로 세계 시장을 더욱 공격적으로 공략할 예정이다. 이 회사 제품의 품질은 인정하면서도 구매를 망설이던 일본, 호주, 미국의 바이어들에게 ‘메이드 인 벨기에’ 제품을 공급할 수 있게 될 전망이다.

수제 초콜릿 시장을 열다

김 사장이 처음 초콜릿 관련 사업을 시작한 건 1996년이다. 송파구 등촌동에 마련한 8평짜리 아파트가 사무실이자 신혼방이었다. 그는 케이크 위에 올리는 설탕인형을 해외에 수출하고, 제과나 초콜릿 주재료를 수입해 팔았다. 호주 시드니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부터 3년간 그는 사무실 없이 일했다.

외국 바이어와 연락을 취할 때는 KOTRA에 찾아가 팩시밀리를 빌려 썼다. 해외 제과 전시회에 나갈 때도 일부러 부스 신청을 안 하고서는 행사기간 중간에 비어있는 부스를 싼 값에 빌리기도 했다.

 
김 사장은 철저한 실속파다. 주변 시선보다는 내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출 300억원에 영업이익이 30억원에 달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지만, 아직 집 한 채 없다. 주거래은행 지점장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금방이라도 회사 접을 사람처럼 보이니 집은 한 채 사두라”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말했다.

2002년 수제 초콜릿을 내놓겠다고 하자 가장 먼저 주변에서 반대가 컸다. 시장 자체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김 사장은 평소처럼 이를 밀어붙였다.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을 갈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외국계 회사에서 사환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래도 꿈을 놓지는 않았다. 유학을 준비했다.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고졸 사환의 박봉을 모아 호주로 유학을 떠났다. 학비는 현지에서 조달했다. 학교를 졸업할 땐 현지 최대 유통업체에 제품을 공급하는 유통업체 사장이 됐다. 잘 되는 사업을 포기하고 한국에 올 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주변의 반대는 늘 있는 일이다.

“지금은 쓴 맛이 센 초콜릿이 좋아”

그는 초콜릿 품질만큼은 자신 있었다. 쥬빌리 쇼콜라띠에의 초콜릿 제조법은 국내 특급호텔 패스트리 쉐프(디저트 담당 요리사)로 일하던 유럽인들 머리에서 나왔다.

 
김 사장은 외국인총주방장협회 회원이다. 통역 때문에 일을 도와주다가 붙임성 좋은 그에게 국내 특급호텔 총주방장들이 특별히 회원 자격을 줬다. 그렇게 알게 된 프랑스, 독일인 쉐프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품을 개발했던 것.

그의 서울사무소 집무실 한쪽에는 커다란 여행가방이 세워져 있었다. 그는 전 날 벨기에 출장에서 돌아왔다. 공항에서 사무실로 직행해 하루 종일 회의를 하고, 저녁 늦게야 기자와 통화를 했다. 인터뷰는 그 다음날 오전이었다. 여행가방을 풀어놓을 시간도 없었다. 그의 방 한쪽 벽은 쥬빌리에서 만드는 제품들을 모아놓은 장식장이 있다.

영어, 독일어, 불어, 일본어와 중국어까지 다양한 언어로 된 제품 포장지 중에 한글로 ‘가나 초콜렛’이 보였다. 수제 초콜릿 시장에 롯데가 뛰어들면서 첫 제품을 쥬빌리 쇼콜라띠에에 맡겼다. 대기업이 뛰어들 만한 시장을 만드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초콜릿의 본고장 유럽에서 다시 시작한다. 무엇이 그를 초콜릿에 매료시켰을까?

김 사장은 “초등학교 6학년인 아이의 같은 반 친구들이 견학을 올 때면 초콜릿 만들기를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한정연 포춘코리아 기자 jayhan090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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