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스쿠프 이코노무비
영화 파이트 클럽➌
총선 앞둔 양당 선거 구호
운동권 청산 vs 정권 심판
과연 총선 후 통합 가능할까

‘파이트 클럽’의 지도자 타일러 더든(브래드 피트)은 술집 지하실을 무단으로 점거해 파이트 클럽을 연다. 물론 간판을 내건 것도 아니다. 신입 회원들은 클럽 이름 그대로 그곳에서 회원들과 웃통을 벗어젖히고 맨주먹으로 1대1 ‘맞짱’을 뜬다. 상대가 항복을 선언하지 않는 한 서로 딱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팬다. 입술과 코가 터지고 눈두덩이 찢어지는 것은 기본이다.

영화 속 더든은 불의에 대항하는 사람을 ‘리스펙트’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 속 더든은 불의에 대항하는 사람을 ‘리스펙트’ 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록키’의 챔피언 경기만큼이나 처절하다. 사회와 가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소외돼 그곳을 찾아온 회원들은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응어리를 폭발시킨다. 한쪽의 항복으로 난투극이 끝나면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도 무언가 응어리가 풀린 듯 서로를 껴안고 감격스러워한다. 무기력하기만 했던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비로소 느낀다.

거듭되는 맨손 격투를 통해 회원들은 얼굴은 험악해지지만 두려움과 무기력을 떨쳐버린 당당한 ‘전사’로 거듭 태어난다. 몸 안에 충만한 파괴적인 에너지를 느낀다. 그들의 자신감 넘치는 파괴적인 에너지를 확인한 더든은 이제 비로소 자신이 기획한 파이트 클럽의 궁극적인 목표였던 도시파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가 됐음을 느낀다. 너절했던 깡패들이 ‘실미도’에서 특전사 지옥훈련을 통해 ‘김일성 모가지 따러 가는’ 일당백 최정예 북파공작원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 같다.

도시파괴 프로젝트에 전사들을 투입하기 전에 더든은 이들에게 한 가지 묘한 미션을 제시한다. 밤거리에 나가 아무나 붙잡고 시비 걸고 ‘묻지마 폭행’을 가하는 미션이다. 회원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묻지 않는다. 이미 더든은 그들에게 교주와 같은 절대자가 돼 있다.

밤거리에 흩어진 파이트 클럽 회원들은 더든의 지시대로 ‘혼자 지나가는’ 행인 아무나 붙잡고 욕질하고 시비 걸고 뺨을 갈기고 걷어찬다. 기이하게도 밤거리를 혼자 걷다 웬 ‘또라이’에게 느닷없는 봉변을 당한 행인들은 열이면 열 모두 비실비실 피하거나 머리를 감싸쥐고 도망치기 바쁘다. 

아무도 부당함을 따지거나 반격하거나 응징하려 들지 않는다. 매일 얼굴 찢어지는 맨손 격투로 누더기가 된 그들의 얼굴 자체가 전의를 상실하게 할 만도 하다. 그런 와중에 단 한명의 시민이 이유 없이 자기 머리통을 갈기고 지나가는 파이트 클럽 회원의 멱살을 잡고 반격한다. 그러자 파이트 클럽 회원은 돌아서서 줄행랑을 치고, 시민은 ‘게 섰거라’ 하고 추격한다.

그 파이트 클럽 회원이 도망친 건 그것 역시 행인이 반격하면 무조건 도망치라는 더든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움 탓에 ‘부당함’에 눈감아 버리는 시민은 모욕을 당해도 싸지만, 두려움을 떨치고 부당함에 결연히 저항하는 시민은 우리의 존경을 받아야 마땅한 ‘모범시민’이라는 게 더든의 철학이다.

4·10 총선 이후 사회가 통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사진=뉴시스]
4·10 총선 이후 사회가 통합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사진=뉴시스]

‘똥무피더피(똥이 무서워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는 가장 슬기로운 ‘생활의 지혜’다. 웬 ‘또라이’에게 걸려 봉변을 당해도 1대 1 맞짱을 떠서 이길 자신이 없기도 하거니와 이긴다 해도 남는 것도 없고, 피곤하게 경찰서 왔다 갔다 해야 한다. 그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네만 똥무피더피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삶의 현장’에 통찰력이 뛰어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 nard Shaw)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이미 오래전에 터득한 사실이 있다. 돼지와 씨름하지 말라는 것이다. 돼지와 씨름하면 돼지도 나도 더러워진다. 게다가 돼지는 더러운 걸 좋아하기까지 한다.”

버나드 쇼와는 달리 더든은 똥무피더피정신을 경멸한다. 그렇게 모두 똥이 더럽다고 치우지 않고 피해 다니기만 하면 똥은 쌓여만 가고 우리가 편히 살 곳이 없어진다. 그쯤 되면 똥은 단지 더러운 것이 아니라 정말 무서운 것이 된다. 더러운 경멸의 대상에서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된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 ra bellum)”는 명언을 남긴 푸블리우스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Publius Fl avius Vegetius Renatus)라는 복잡하고 긴 이름을 가진 4세기 로마의 군사 전략가도 아마 버나드 쇼의 생활의 지혜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 듯하다. 

「아큐정전阿Q正伝」 을 쓴 중국의 작가이자 사상가 루쉰魯迅 역시 푸블리우스 레나투스 못지않게 똥무피더피 정신에 질색했을 듯하다. 인력거꾼 아큐阿Q는 일상화한 모욕과 천대에도 똥무피더피 정신으로 무장한 ‘정신승리법’으로 일관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루쉰은 아큐와 마찬가지로 똥무피더피 정신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청나라의 운명을 개탄한다.

똥무피더피 정신은 혹시 ‘슬기로운 생활’의 지혜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사회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에는 도움이 안 되는 악덕에 가깝다. 우리도 많은 사람들이 똥무피더피하는 가운데 똥무피더피를 거부하고 부당함과 불의에 저항하고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유명무명의 그들이 없었다면 해방과 독립, 그리고 민주화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파이트 클럽의 지도자 더든도 파이트 클럽 회원들의 만행에 당당하게 대항하는 ‘시민’을 리스펙트한다.

‘운동권 청산’ vs ‘정권 심판’이 충돌하는 총선 구도가 다소 생경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운동권 청산’ vs ‘정권 심판’이 충돌하는 총선 구도가 다소 생경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총선을 한 달 남겨두고 양당 후보들의 대진표가 정해지는 가운데 양당의 선거캠페인 구호도 결정된 모양인데 조금은 생경하게 ‘운동권 청산’ vs ‘정권 심판’이라고 한다. ‘정권 심판론’에 대응하는 구호라면 ‘정권 안정’이 돼야 할 텐데, 느닷없이 ‘운동권 청산’을 전면에 내세운다.

‘운동’이라는 말이 ‘민주화운동’의 약칭일진대, ‘민주화운동 한 사람들’을 청산하자는 것이 무슨 말인지 혼란스럽다. 설마 그들이 치워서는 안 될 소중한 똥을 치웠으니 이제라도 단죄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런 뜻이 아니라면 민주화운동 세력은 현재 모두 우리나라에서 그 어떤 집단보다도 타락하고 부패한 세력으로 ‘흑화黑化’한 ‘사회악’임을 알아야 한다고 외치고 싶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마 우리가 어렵사리 성취했다고 자부하는 민주화가 순수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 색채가 가미된 것으로 판단하고 그 청산을 시대적 과제로 설정한 모양이다. 운동권 청산이라는 외침을 어떻게 해석하든 이번 선거도 참으로 어지러운 선거가 될 듯하다. 선거 이후도 아마 ‘통합’과는 거리가 먼 거친 충돌들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마음 무겁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더스쿠프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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