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2회③

순신이 병자1576년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1)의 권관2)이 되어 부임하였다.
이때 함경감사 이후백李後白이 변방의 진鎭을 순방하여 장수들의 무예를 시험보아 불능한 자는 형벌로 다스렸다. 장수들이 평소에 무예에 태만하다가 그 엄형을 면하는 자가 드물었다. 감사가 차차 순방하여 순신의 진에 이르렀다.

 
원래 청련靑蓮 이후백은 지인지감이 있는 재상이라 순신을 한번 보매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정성껏 우대하여 계급의 절차를 차리지 아니하였다. 순신이 조용히 이후백에게 그 형벌의 위엄이 자못 과중함을 간하였다. 후백이 미소하고 “내 어찌 연고 없이 형벌을 남용하겠는가? 변장3)들이 무신의 직분을 지키지 않기 때문일세” 하고 순신의 간절한 정을 깊이 감사하였다.

기묘1579년 2월에 동구비보에서 임기가 다되어 순신은 훈련원 봉사4)로 이직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병조정랑兵曹正郞 서익徐益이 자기와 친분이 있는 사람을 옹호하여 단계를 뛰어넘어 훈련원 참군5)이란 벼슬에 승진시키고자 하였다. 순신이 불허하되 “관직이 낮고 승진이 곤란한 사람은 천거하고 관직이 높고 당연히 승진해야 할 자는 정체시켜 천거하지 않으면 공도公道가 어디 있다고 하겠습니까? 법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서익이 상관의 지위에 있음을 믿고 위세로 순신을 억압하나 순신은 떳떳하여 굽히지 않았다. 서익이 비록 크게 노하였으나 체면에 구애되어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 원래 서익이란 사람은 성격이 강하고 오만하고 과감한 인물이다. 비록 동료일지라도 모두 두려워 피한다.

 
그러나 순신이 하관下官으로서 도리를 지키며 굽히지 않으니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다들 순신이 앞날을 돌보지 않는다고 걱정하였다. 이 해에는 순신의 나이 벌써 삼십오세였다. 부인 방씨는 슬하에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회薈는 십삼세요 차자 예䓲는 구세요 막내 면葂은 삼세가 되었다.

이때에 병조판서 김귀영6)은 서울의 갑부였다. 순신은 씻은 듯 가난하였다. 김귀영이 자기의 사랑하는 소실에게서 얻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장성하여 출가할 나이가 되었다. 그 꽃 같은 얼굴 달 같은 자태 구름 같은 머리카락 눈 같은 피부가 실로 절대미인이요, 성품이 시원하여 장부의 기개마저 있었다.

김귀영이 극히 사랑하여 항상 말하되 “당세영웅의 배우자가 될 자격이요 범부의 짝은 아니다” 하여 비록 남의 소실로 주더라도 영재만을 널리 구하였다. 김귀영의 문객 중에 이순신을 추천하는 자가 있어 말하되 “순신이 비록 하급 관료에 있으나 그 인격과 풍채며 무예와 용력이며 문필과 병법이 당대에 독보적입니다. 또 인품이 부드럽고 침착하여 그 흉중에는 풍운변화가 있는 듯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대감의 바라는 바 사윗감이 됨직합니다” 하였다. 김귀영이 그럴듯하게 여겨 중매자를 보내어 순신에게 권하였다.

 
“병판 김공이 그 사랑하는 측실의 딸을 그대에게 소실로 주어 결혼하고자 함은 그대의 영풍을 흠모함이니 모름지기 취하여 소실을 삼으시게나” 하고 힘써 권하였다. 순신이 탄식하며 “권고는 감사하오만 내가 벼슬길에 처음 나서서 공업을 세우지 못하고 어찌 먼저 권문세가와의 인연에 의탁하여 부귀만 바라겠소?” 하고 중매자를 사절하여버렸다. 후인이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이 해 10월에 충청병사7)의 군관8)이 되어 서익을 보기에 징그러워서 훈련원을 그만두고 충청병영9)에 부임하였다. 기거하는 관사 안에는 다만 이부자리 한 벌이 있을 뿐이요 그 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청렴함이 이러하다.

순신이 부모를 뵙기 위하여 본가로 상경할 적에 관사에 남은 양곡을 봉하여 관창에 환송하고 출발하였다. 병사가 그 일을 알고 경대하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 순신이 병사와 음주하다가 병사가 대취하여 순신의 손을 잡고 어느 군관의 처소에 동행하려 하였다. 그자는 병사의 평소 친우로서 군관이 된 사람이다.

순신이 생각하되 대장이 부하 군관을 밤중에 방문함은 공적인 행위가 아니라 하여 순신이 또한 취한 체하고 병사의 손을 잡아 만류하되 “일방의 대장이신 사또는 밤중에 어디를 행차하려 하십니까?” 하였다.
병사가 황연히 깨닫고 도로 좌석에 앉으며 “내가 술이 취하였다”고 핑계하였다. 그 뒤로는 순신을 더욱 경대하였다고 한다. 경진 1580년 7월에 순신이 전라도 발포진10) 수군만호11)에 임명되었다. 이는 순신이 해상 함대의 장수로 처음 출발하는 일이었다. 부임한 후로 군기軍器를 수선하고 병선을 개조하여 운용에 편리하기를 도모하여 제반 설비가 극히 정밀하게 되었다.

전라감사12) 손식孫軾이 자기와 교분이 두터운 서익의 무고誣告를 믿고 순신을 미워하여 능성군13)에 이르러 순신을 불러 “팔진도八陣圖를 강의하고 또 육화진도六花陣圖를 그려서 바치라” 하였다. 순신이 제갈량의 팔진을 강의하여 정밀하게 통하고 또 붓을 잡아 이정李靖의 육화진도六花陣圖를 그려내니 필법이 정묘하고 사려가 신속하여 보는 관리들이 다 놀랐다. 트집을 잡아 파직시키려 하던 손식이 크게 놀라 낯빛을 바꾸어 경대하고 고금의 일들을 담론하며 일찍 만나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천하기재로 인정하였다.

 
전라좌수사14) 성박成鎛이 발포진 객사의 뜰 한가운데에 늙은 오동나무 한그루가 있음을 듣고 자기의 거문고 재료로 사용하고자 하여 군관을 보내어 베어 오라고 명하였다. 성박은 음률에 취미가 있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순신이 거절하되 “관청 객사의 나무도 역시 관가의 소유물이다. 또한 심어서 배양한지 수십 년이거늘 하루아침에 베어내어 국용에 쓰지 않고 수사의 사적인 물품을 만들려 함은 불가하다”고 항변하였다. 군관이 감히 베어가지를 못하고 그저 돌아가 순신이 하던 말을 보고하였다. 성박이 비록 대노하였으나 순신의 정대함을 꺼려 그 오동나무는 취해가지 못하였다.

이용李庸戈이 성박의 뒤를 이어 좌수사로 내임하여 순신이 상관에게 아부하지 아니함을 미워하여 트집을 잡아 벌을 주려하였다. 관하의 다섯 진15)에 불의의 검열을 시작하여 점군을 하였더니 다른 네 진에는 군사의 누락이 과다하여서 수십 명씩이나 되었으되 순신의 발포진에는 본래부터 항오가 정제하고 군령이 엄숙하므로 비록 불시의 검열을 당하였으나 불참한 군사가 단지 세 명에 불과하였다.

좌수사 이용이 다른 네 진의 군사의 누락은 불문에 부치고 유독 순신의 진에만 그 누락을 지적하여 군에 해이하다는 죄로 조정에 장계를 보내 청죄하였다. 순신은 이용의 용렬한 심정을 미리 짐작하고 신속히 사람을 시켜 다른 진의 누락된 군사와 그 성명을 기록한 원본서류와 증빙서까지 구하여 이용이 조정을 속이는 죄를 대질 폭로하려고 준비를 신속하게 완료하였다.

이용의 군관이 이 소식을 듣고 이용에게 “큰일 났습니다” 하고 이순신의 계획을 고하되 “이순신이 다른 네 진의 누락된 군사의 성명 원본까지 가졌은즉 만일에 이것이 조정에 발각된다면 후회가 적지 않을까 합니다” 하였다. 이용이 크게 놀라 급족急足을 파송하여 도중에 그 장계를 찾아오고 순신을 두려워하여 도로 화해하기를 구하였다.

그 뒤에 전라감사와 좌수사가 서로 모여 관하 여러 진의 변장들의 치적을 평가할 때에 모두 이순신의 정대함을 미워하여 기어코 최하에 두고자 하였다. 전라도사16)인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분연히 인정하지 못하여 항언하되 “적을 막고 군사를 다스리는 성적이 전라도에서 이순신이 으뜸이거늘 차라리 열진의 변장들을 다 하등에 둘지언정 이순신을 폄하함은 불가하오” 하고 기록하던 붓을 멈춘다. 그 언사가 공정하고 엄숙하므로 감사와 좌수사가 무안하여 중지하였다. 순신이 이 소문을 듣고 세상살이의 험난함을 탄식하고 시를 읊어 회포를 나타냈다.
신사1581년 1월에 서울에서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이 발포진에 내려와 군기軍器를 조사하였는데 순신이 수리하고 새로 만든 군기가 극히 완비함에도 불구하고 군기를 정비하지 않았다고 트집을 잡아 파직하였다.

이는 전년에 병조정랑 서익이, 순신이 항거하여 굽히지 않음을 미워하여 군기경차관에게 부탁하여 이와 같이 원한을 갚음이었다.

서익은 문장에 능하고 또 용력도 있어 그 당시에 문무겸전이라 하여 서기徐起 송익필宋翼弼 최경회崔慶會 이억기李億祺 유극량劉克良 등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한낱 참군 벼슬을 사사로이 순서를 넘어 천거하려 하다가 정대한 이공에게 거절 논책을 당하고 억압되어 원망을 품고 이렇듯 원한을 갚으니 어찌 군자라 하리오.
현명한 사람을 시기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남에게 몰래 부탁하여 암암리에 사람을 다치게 하고 국가의 공법을 스스로 범하니 간특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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