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룡 소장에게 은퇴의 방법을 묻다

은퇴시기가 다가오면 누구든 두렵고 우울하다. 자신의 시대가 끝난 듯한 자괴감이 들어서다. 준비 안 된 노후의 막막함 때문도 있다. 그러나 은퇴는 “자신이 원하던 일을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도약기”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우재룡(51) 소장이다.

▲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우재룡 소장은 재물보다는 행복 위주의 은퇴론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인은 바쁘다. 경쟁을 마다하지 않고 앞만 보며 달린다. 이런 근성 때문인지 우리는 세계무대의 뒷전에 서지 않는다. 얼마 전 폐막한 런던올림픽에서 종합순위 5위에 등극했다. 수학•과학 올림피아드에서는 우리의 꿈나무들이 정상에 올랐다. K-pop 또한 세계 젊은이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하루아침에 얻어진 결과가 아니다. 이전 세대부터 씨를 뿌리고 밭을 갈아왔기에 가능했다. 특히 1955~1963년 사이에 태어난 1세대 베이비부머들은 한국사회를 오늘에 이르게 한 주역이다.

한국형 은퇴모델 찾아야

그런 베이비부머의 은퇴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는 은퇴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앞만 보고 달리던 습성 탓인지도 모른다. 은퇴준비가 됐다는 사람도 대부분 재무 설계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는 은퇴 이후 삶에 중요하지 않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우재룡 소장은 “돈 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을 가꾸는 삶”이라고 말했다. 8월 10일 서울 을지로 삼성생명 사내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은퇴와 관련된 여러 자료를 찾아봤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우울해지더라.

“정상적인 현상이다. 은퇴를 떠올리면 우울한 것이 한국인의 표준 심리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인가.

“(대부분의 한국인이) 은퇴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해 그렇다. 원래 한국은 은퇴가 없던 사회다. 나이가 들어서도 텃밭 맸고, 손자•손녀를 돌봤다. 그런데 사회가 분화되면서 가족 내에서 모든 걸 해결하기가 불가능해졌다. 사회는 급격히 변했는데 사고방식이 아직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아 당황하는 것 같다.” 

바람직한 은퇴상이란
.

“영어로 은퇴를 ‘리타이어(retire)’라고 한다. 타이어를 다시 갈아 낀다는 의미가 있다. 은퇴 이후엔 자기 자신의 인생을 추구해야 한다. 꼭 하고 싶었던 일과 꿈을 다시 찾아야 한다. 부모•자식•배우자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 본인을 위한 인생을 이기적이면서도 그러나 의미 있게 추구하는 것이 은퇴다. 지금 바람직한 한국형 은퇴모델을 찾고 있다. 한국형 은퇴모델을 개발하고 교육을 통해 확산시키는 것, 이것이 우리 연구소의 존재이유다.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한국형 은퇴모델의 사례는 있다. 은퇴 후 행복사진관을 열었다든지, 건물청소부가 실버영화제작자로 나섰다든지 하는….”

 


한국형 은퇴모델을 찾기 위한 키워드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은퇴 후 어디서 살 건지, 누구와 어울릴 건지, 무엇을 할 것인지. 주거플랜, 공동체구성, 사회활동 이 세 가지가 키워드다.”

▲ 은퇴 후에도 의미 있게 지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달라.

“우선 주거플랜을 설명한다면, 은퇴 후 대부분 자기 집에서 살고 싶어 한다. 비율로 따지면 90% 정도 될 거다. 실버타운은 사회로부터 단절되기 때문에 나름의 의미는 있지만 보편적인 모델이 못 된다. 다음으로 ‘누구와 어울려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게 자녀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녀에게 부담주기 싫고, 부담 받기도 싫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영혼을 자극받을 동료들이 주위에 있어야 한다. 여자의 경우 동네 아주머니들과 수다 떨며 다소 소모적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나마 여자는 좀 낫다. 은퇴 남성은 사회성이 떨어져서 다른 사람과 교류를 활발하게 하지 못한다. 친구가 1.8명밖에 없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외로운 것이다.”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이 부분은 정말 취약하다. 은퇴 시기가 다가오면 다들 불안해하며 일을 연장하려는 경향이 있다. 건물청소•허드렛일 등 100만원짜리 일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은퇴 후 아파트 경비를 한
 
다는 뉴스도 나온다. (나름 의미는 있겠으나) 과연 이게 바람직한 뉴스인가 의문이다. 그런 생계형 일자리에 매달리며 평균 70세까지 일하는 게 행복한 건가. 아닌 것 같다. 일과 취미와 사회봉사가 결합되는 형태의 일을 찾아야 한다.” 

보험사에 근무하는 당사자 앞에서 이런 질문은 껄끄럽지만, 사실 한국인들이 은퇴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금융사•보험사의 ‘공포마케팅’때문이란 지적이 있다.

“껄끄러워하실 것 없다. 괜찮다. ‘공포마케팅’이라는 단어를 처음 쓴 게 나다. ‘노후자금이 없으면 비참하다, 불행하다’는 식으로 겁을 주고 10억원짜리 연금에 가입하라 어쩌라 하며 부당하게 마케팅한 측면이 있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으로) 부임하면서 회사에도 공포마케팅에 대해 한 소리 했다. 사실 고객 대부분은 그런 돈이 없다. 그리고 돈만 있으면 행복한가. 아이들과의 관계도 단절됐고, 할 일 없어 등산로나 떠도는데. 그래서 행복을 강조한 은퇴설계를 제안하면서 공포마케팅을 버리자고 했다. 반성하자고 했다.” 

40대 얘길 해보자. 40대부턴 은퇴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자식들 사교육비와 주택 이자 등으로 가장 돈이 많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노후준비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자식들 교육비와 주거비용이 세계 최고수준이고, 회사에서는 빨리 잘리고, 건강도 안 좋고…. 40대는 X세대, 분노의 세대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회 탓만 하지 말고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 사교육비는 줄일 수 있다. 대안이 없다고 투덜거리지만 사실은 꽤 많다. EBS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사교육비 쏟아 부어 봤자 아이들 성적에 그리 도움 되지 않는다는 건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부동산 문제도 그렇다. 학군 좋은데 가려고 무리하게 주택구입해서 큰 이자가 발생하는 부분도 있을 거다. 주택 과소비를 줄여야 한다. 필요 이상 평수가 넓다든지, 자기 소득의 상당부분을 주택원리금 갚는데 사용한다든지, 이건 과소비다. 과감하게 안 줄이면서 왜 투덜거리기만 하는가.” 

재산 중 부동산의 비율을 줄여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했던 것으로 안다.


“재산 중 부동산의 비중이 과중한 부분이 있다. 지금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과중했던 비율이 ‘본의 아니게’ 조정될 수도 있다.”

이후 우 소장은 부동산과 관련한 언급을 자제했다. 현재 경기침체로 부동산 시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와 관련한 재산 이야기를 자꾸 거론하는 게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우 소장은 예전에 모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선진국은 금융자산과 부동산의 비율이 6대 4 정도 되는데 우리나라는 2대 8로 과중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5대 5정도로 부동산 비율을 낮추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이 당시 우 소장의 견해였다.

은퇴 시점에서 바람직한 재무포트폴리오는.

“한 가지는 명확하다. 치매에 걸리고 요양원에 있더라도 매월 본인의 통장에 필요한 돈만큼은 들어와야 한다는 점이다. 금융회사나 정부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말이다. ‘라이프타임 인컴(평생소득)’이라고 한다. 복권도 연금형이 인기를 끌 듯, 노후자금도 연금형이 바람직하다. 은퇴 후 필요한 자금을 산출한 뒤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주택연금, 이 4가지를 포트폴리오로 구사해야 한다. 이외의 재산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는 데 마음껏 운영했음 한다.”

은퇴연구의 궁극적 목적은 Well-Dying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산다. 부부간 나이차이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은퇴 이후의 노후는 여자들에게 더 심각하게 다가올 것 같다.

“좋은 질문이다. 남자는 노후 걱정을 별로 하지 않는다. 남성의 84%가 노후에 부인에게 간병을 받아서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나면 부인은 10년 이상을 혼자 살아야 한다. 그 준비가 안 돼 있다. 여성들은 남편의 간병, 사별 후 홀로 살 생활비, 본인이 죽기 전 2~3년간의 간병 비용 등이 모두 부담스럽다. 부부용 노후설계만 해선 안 된다. 독립성을 기르면서 부인위주의 추가적인 노후설계를 따로 해야 한다.”

은퇴연구소에서 간병문제도 연구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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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다. 은퇴설계의 끝은 사망이다. (많은 사람이) 은퇴설계라는 걸 돈에 치우쳐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은퇴연구소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웰다잉(well-dying)’이다. 우리는 죽음의 질이 너무 낮다는 사실에 주목해 왔다.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 끼고, 비용은 비용대로 들여가면서, 아무 의미 없이 연명만하는…. 이렇게 죽음의 질이 낮아선 안 된다.” 

어떻게 하면 죽음의 질을 높일 수 있나.

“죽는 과정을 미리 그려봐야 한다. 어디서 사망할지, 사전의료지시서 등 치료와 관련된 부분도 미리 생각해야 하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남기는 무엇’은 재산이 아니라 의미를 일컫는다. 이렇게 죽음의 모습을 미리 계획함으로써 삶의 질이 높아지는 거다. 죽음에 대해 모호하게 생각하는 자는 인생도 대충 살 수 있다.” 

▲ 우재룡 소장은 은퇴설계의 궁극적 목적은 웰다잉이라고 강조했다.
상속도 은퇴와 관련된 문제인 듯하다. 미리 상속하면 자식들이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무시한다는 말도 있는데.

“우선 상속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오로지 절세와 수익률 위주의 상속설계는 거의 70%가 실패하고 있다. 질문처럼 미리 물려주면 자식들에게 냉대를 받을까봐 끝까지 재산을 쥐고 있다가 죽기 전에 물려주는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90대 아버지가 죽기 전에 70대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 재산중심의 상속에서 의미 중심의 상속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식이 한창 뻗어나갈 때 꼭 필요한 만큼만 미리 상속하는 게 좋다. 나머진 본인의 삶을 위해 쓰거나 사회에 베푸셔야 한다.” 

노후 주거문제를 다시 얘기해 보자. 실버타운이 외곽에 있어서 노인들이 꺼리는 건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간 실버타운은 그 안에서 주거, 커뮤니티, 사회활동 등이 모두 가능한 원스탑 서비스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서비스의 질이 문제다. 이제는 기대수준이 높아지고 복잡해졌다. 우리가 종합과자선물세트는 잘 안 먹듯 말이다.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자기 집에서 늙어가려는 거다. ‘AIP(ageing in place)모델’이라고도 한다. 미국노인의 90%가 자기 집에서 산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세계적인 조류다. 안전을 위해 욕조를 없애는 등 자기 집을 고쳐 실버타운처럼 만든다. 그 상태에서 주위의 이웃들과 어울리고, 자원봉사 받으면서, 자식들과도 활발히 교류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노 老 - 노 老 캐어가 현실적 

우리나라의 경우 자원봉사 인프라가 약하다. 자신의 집을 실버타운처럼 개조하더라도 결국 돌봐줄 사람은 자식밖에 없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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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커뮤니티를 짜야 한다는 거다. 중간계층의 노인이 좀 더 나이든 노인들을 돌보는 시스템. 이를테면 80세 노인을 보다 젊은 60세 노인이 돌보는 노老-노老캐어 시스템. 이런 자원봉사 커뮤니티가 활발해져야 한다.”

노老-노老 캐어라니, 색다르다. 젊은이 보다는 늙은 분들의 자원봉사가 낫단 말인가.

“당연히 그렇다. 20~30대 젊은이들은 인상을 찌푸리지만, 60대는 얼마 안 남은 자신의 미래모습이기 때문에 부드럽게 봉사한다. 이런 연구를 활성화 하고 있다. 이건 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해야 하고 우리 같은 민간연구소가 국민에게 호소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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