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준구 지학사 대표

 

▲ 재미로 모으기 시작한 만화책이 3000권이라는 권준구 대표. 그는 교육만화사업으로 지학사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사진은 집무실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

아버지는 우직하게 한 길을 걸었다. 평생을 교과서 개발에 바쳤다. 검정교과서의 신화를 썼다. 위기가 닥쳤다. 이번엔 아들이 나섰다. 만화책 수집광인 아들은 교육만화사업으로 전환점을 마련했다. 배움에 뜻을 가진 이의 벗 ‘지학사’가 다시 불을 밝힌다. 권준구 지학사 대표를 만났다.

아버지는 뛰어난 은행원이었다. 누구보다 수리에 밝았다. 주위 사람들은 ‘천상 은행원’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가치 있는 일을 해야겠다’면서 돌연 은행에 사표를 던졌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나라가 어려웠을 때 대학(서울대 법대)까지 나왔으니 공교육에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1년 동안 그는 백수로 살았다.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사업구상을 했다. 고민 끝에 그는 교육출판사를 차리기로 했다. 퇴직금을 탈탈 털어 종자돈으로 삼았다. 출판사 이름은 ‘배움學에 뜻志을 둔 이의 벗이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지학사’라고 지었다. 1963년, 그의 나이 서른넷 때였다.

국제경영 공부하다 CEO로
주로 교과서와 교재를 펴냈다. 고등학교 수학ㆍ영어ㆍ작문ㆍ생물 검정교과서가 부친의 첫 작품이다. 지학사는 단번에 검정교과서 선두주자로 올라섰다. 초중고등학생 학습교재 ‘하이라이트’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전국의 초중고생이 하이라이트로 공부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온 48년 전통의 지학사 창립자 권병일(81) 회장의 업적이다.

# 아들은 아톰을 좋아하고 만화책을 즐겨본다. 애니메이션 박람회는 빠지지 않고 간다. 재미로 하나 둘 사서 모은 만화책이 자그마치 3000권. 그의 방에는 만화책과 건담ㆍ원피스ㆍ키키 같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가 가득하다. 일본에 갈 때면 캐릭터 제품 한두개씩 사오는 게 그의 취미다. 그는 스포츠 마니아다. 축구ㆍ야구ㆍ농구ㆍ테니스ㆍ골프 모두 잘 한다. 대학 때는 스키도 잘 타서 스키부에 가입했다. 아마추어였지만 선수권 스키대회에 출전할 만큼 운동에 열의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공식적인 모임을 미룰 정도로 스포츠를 좋아한다. 오해도 가끔 산다. 약속을 취소하고 야구를 보러 갈 때가 많아서다. 그는 활동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듯하다. 굳건하고 꿋꿋한 성미를 가진 부친 권병일 회장과는 너무도 달라 보이는 권준구(44) 지학사 대표 이야기다.

권 대표가 처음부터 경영에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92년 대학(한국외대 서반아어학) 졸업 후 3년간 중소기업 일신산업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경영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유로운 게 좋았다. 부친의 회사로 들어가 경영을 배울까 잠시 생각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이 끌렸다. 때마침 유학 얘기가 나왔다. 애니메이션 공부하고 싶은 바람을 내비치니 부친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부친은 “국제경영을 공부하라”고 권했다. 부친과 싸워 이길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그는 1995년 미국으로 떠났다.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다. 국제경영의 세계에 심취할 정도였다. 그러던 1995년. 부친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부친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 “한국으로 들어와라.” 부친 밑에서 일을 배우던 형이 회사를 나갔기 때문이었다. 권 대표는 부친의 말을 거부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공부한 ‘국제경영’이라는 학문을 현장에서 적용해보고 싶었다. 1997년 경리부 대리로 지학사에 입사했다. 착실하게 경영수업을 받았다. 입사 2년차 때 영업관리부 과장을 달았고 이사와 부사장을 거쳐 2002년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그로부터 6년 후 대표이사 사장에 올라 지학사 경영 일선에 나섰다.

당시는 지학사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옷을 갈아입는 패션계처럼 교육환경도 상황에 따라 급변한다. 수시로 바뀌는 대입정책 때문이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면서 교육업계는 더욱 빠르게 변했다. 이런 상황이 지학사에겐 위기였다. 변화무쌍한 교육시장에서 지학사는 한 길만 걸어왔기 때문이다.

▲ 지학사를 설립한 권병일(가운데) 회장은 공교육 제고를 위해 평생을 교과서 사업에 바쳤다. 사진은 권 회장이 '2008 출판인 신년 교례회' 행사에 참석한 모습.

권 회장의 교육철학과 경영방침은 ‘공교육 제고’로 통한다. 남들이 프랜차이즈 학원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인터넷 강의로 떼돈을 벌어도 교과서와 독서잡지 「독서평설」에만 집중했다. 다른 사업도 했지만 대부분 공교육 수업과 연결되는 아이템이었다. 지학사는 교육환경이 급변해도 우수한 교과서와 교재 편찬에 공을 들였다. 교과서와 교재를 편찬하는 연구진 섭외에 적극 나섰다. 학생에게 학습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우수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교사에게 다양한 교수학습법을 선보였다.

명분은 훌륭했다. 지학사의 철학도 다른 교육업체와 차별화됐다. 문제는 실적이었다. 회사의 자금사정이 갈수록 악화됐다. 일부 교육업체가 자본을 앞세운 대기업과 손을 잡고 교육시장 판도를 바꿔놓은 게 이유였다.

지학사가 이처럼 어려움을 겪을 때 권 대표는 경영을 맡았다. 그는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무엇보다 교육업계의 트렌드를 간파하려 애썼다. 그러던 차에 교육과학기술부의 움직임이 읽혔다. 교과서를 공동으로 발행하는 제도를 없애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선제 대응했다. 개정 교과서 개발을 미리 준비한 것이다. 획기적인 교과서를 만들 수 있는 연구진도 손수 모았다. “눈에 띄는 교과서를 만들면 승부를 걸 수 있겠다” 싶었다. 부친의 뜻에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2009년 교과서 공동발행제가 폐지됐다. 당연히 지학사에게 기회가 왔다. 2008년 3월 중고등 검정교과서 영어ㆍ수학 등 10책이 합격하는 결실을 맺었다. 2008년 이후 지학사가 발간한 검인정 교과서만 109책에 이른다. 권 대표의 모험이 ‘알찬 결실’을 맺은 것이다.

권 대표의 승부수가 통한 사례는 또 있다. 그는 1993년 부친의 업적이자 지학사의 자존심인 고교 「독서평설」을 확대개편하기 시작했다. 유아ㆍ어린이를 위한 「독서평설」을 출간하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확신에서였다. 권 대표는 “ 「독서평설」이 교육출판업계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고등학생은 물론 어린이, 유아가 읽을 수 있는 콘텐트를 만드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2005년 초등 「독서평설」을 창간했다. 이 책은 지학사의 사업범위를 고등학생에서 유아•어린이로 넓히는 데 한몫 톡톡히 했다.

 

 

유아•어린이용 「독서평설」 화제

 

이후 권 대표는 자신의 관심사였던 애니메이션을 교육만화사업에 접목했다. 그는 유아ㆍ어린이 대상 브랜드 ‘아르볼’을 기획해 「테일즈런너 직업체험 시리즈」 「머리가 좋아지는 만화 시리즈」를 내놨다. 인기게임 ‘테일즈런너’ 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다양한 직업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 「테일즈런너 직업체험 시리즈」는 단번에 학부모와 어린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권 대표가 기획한 교육만화사업 성과도 눈부시다. 「테일즈런너 직업체험 시리즈」는 약 10만부 가량 팔려나갔다. 국위선양도 했다. 올해 7월 태국 출판사 SE-EDUCATION과 협약을 맺어 학습만화 수출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권 대표는 브랜드 ‘아르볼’을 교육만화사업으로 확장시킬 생각이다.

48년 전 배움에 뜻을 가진 이의 벗이 되겠다며 교육출판사를 설립한 부친은 우직하게 한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피규어를 수집하고 만화책 광인 그는 아버지가 세운 지학사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다. 권 대표는 “앞으로 오래도록 한 길을 걸어온 부친의 우직함을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지학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권 대표가 맑은 얼굴로 집무실 한켠에 걸린 아톰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김건희 기자 kkh4792 @ thescoop.co.kr |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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