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객주」의 작가 김주영

총 9권으로 구성된 장편 역사소설 「객주」는 지금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다. 저자 김주영(73) 작가는 끊임없이 현장을 찾아다니며 관찰하고 글을 쓴다. 그러다 보니 독자들은 그를 ‘길 위의 소설가’로 부른다.

▲ 김주영 작가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원동력으로 어린 시절과 어머니를 들었다.

김주영 작가는 ‘시골의 장’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다. 보부상의 이야기를 그린 그의 역작 ‘객주’는 장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김 작가에 따르면 장은 만능의 장소다.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자 처녀•총각들이 선을 보는 곳이다. 어떤 이는 그곳에서 사주팔자를 보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과의 소통은 모두 장에서 이뤄진다.

지난 10월 11일 인천시 학익동 경인방송 사옥에서 김 작가를 만났다. 그는 도회지에 사는 사람에게 시골장의 활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현재 김 작가는 경북 청송군청과 함께 ‘객주문화타운’을 만드는 중이다. 김 작가의 생가를 비롯해 소설 「객주」에 나오는 풍경을 배경으로 할 예정이다.

이어 오는 11월, ‘김주영 문학관’ 착공에 들어간다. 작가이름이 들어가면 왠지 촌스러울 것 같아 ‘김주영’은 빼고 그냥 ‘문학관’이라 이름 붙이려 한단다. 여러 작가가 함께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 계획이다. 선배 문인들의 작품과 유품 등도 전시된다.

그의 개인사가 궁금했다. 기본적으로 소설가는 ‘이야기꾼’이다. 그토록 방대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그는 다사다난했던 어린 시절과 어머니를 들었다.

“3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결혼을 두 번 하신 분이에요. 호적을 떼어보니 한 번도 남편 호적에 오르지 못한 분이셨어요. 불행한 분이셨습니다. 편모슬하에서 자라다 보니 어린 마음에 창피하기도 했어요. 때문에 말을 별로 하지 않는 학생이었죠. 지금 말로 하면 왕따, 외톨이 같은 거였죠.”

올해 5월, 김 작가는 자전적 소설 「잘 가요 엄마」를 펴냈다. 아프지만, 꼭 한 번은 털어놓아야 하는 어머니에 대한 참회록이었다. 김 작가는 어머니와 별로 대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매일 끼니 걱정을 하게 한 원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머니를 이해한다.

“제가 40, 50대쯤 ‘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신 어머니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린 시절 나쁘게 행동한 것을 반성했습니다. 어머니께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들도 생각나더군요. 이를 고백한다는 차원에서 책을 냈습니다.”

「잘 가요 엄마」는 집필하는데 1년 반이 걸렸다고 한다. 분량은 원고지 900매 정도다. 김 작가의 집필속도를 감안할 때 5개월 정도면 거뜬한 양이다. 하지만 애정을 담아 진솔하게 쓰다 보니 시간이 걸렸다. 개인적인 치부가 드러나는 일이라 용기도 필요했다. 작품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다. 50•60대에게 편지도 많이 받았다. 그는 다시금 어머니와 함께 했던 삶을 회고했다. 그 시절은 외로웠다. 그리고 가난했다.

“초등학교 때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소풍이나 운동회 때를 빼 놓고는 밥을 잘 먹지 못했습니다. 요즘에도 수제비, 감자, 고구마, 죽 이런 것은 먹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너무 물려서 먹기 싫더라고요.”

두 번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

그는 학창시절 가난 때문에 가슴 아팠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기억에 또렷이 박혀 있는 그 시절 미술시간….

“선생님께서 산과 하천을 그리라고 하셨어요. 그림을 그리려는데 크레용이 없잖아요. 옆에 있던 친구가 하얀색 크레용을 쓰지 않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산을 푸른색으로 칠하지 못하고 하얀색으로 칠했죠. 선생님께서 그 그림을 보시고는 귀를 잡아 당기시더군요. 크레용이 없어 친구가 안 쓰는 하얀색으로 칠했다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죠. 마음이 복받쳐 엉엉 울어버렸어요. 얼마나 서러웠던지.”

그의 말에 기자도 눈물이 핑 돌았다. 김 작가는 초등학교 시절 기성회비를 낸 적도, 교과서를 사본 적도 없다고 했다. 기성회비를 내야 졸업장을 준다는 선생님의 으름장도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기성회비를 내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찾아와 졸업장을 놓고 갔다. 비록 친구들보다 한 달이나 늦게 받은 것이었지만….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쳤다.

▲ 김주영 작가는 현장을 돌아다니며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 무시당하는 상황이 계속 된다고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대한 반항심이 저절로 생깁니다. 하지만 (특이하게) 나는 그런 마음이 자리 잡지 않았어요. 이건 정말 다행스런 일입니다”

그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뒤 말을 이었다.

“그런 경험들이 나를 소설가가 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죠. 지금은 (그런 경험들이) 감사해요. 그 때 귀를 잡아당겼던 선생님도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이 이제는 들어요.”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고맙다고 말하는 김 작가. 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김 작가의 본업인 ‘창작’과 그가 그토록 좋아한다는 ‘술’로 넘어갔다. 그는 창작에 대한 고통과 가정생활로 스트레스 받을 때면 지인들과 술을 마신다고 했다.

“작가생활과 가정생활을 조화롭게 하기가 힘들어요. 글 쓰는데 필요한 것이 안정과 평화, 조용한 곳, 뭐 그런 것인데 결혼을 하게 되면 그것들과 거리가 멀어지죠. 아이들 교육, 생활비 등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아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직업은 소설가이지만, 소설가가 위대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원래 그는 작가생활에 더 의미를 두고 싶어 했다. 그런 김 작가의 모습은 가족과의 마찰로 번졌다. 결국 술을 더 마시게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술을 마시니, 배가 나오고 행동이 느려지는 것 같아요.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이고, 원고료로 생활을 이어가잖아요. 그러다 보니 밤새 글을 쓰다 건강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장이 꼬이고 쇠약해졌죠, 간도 안 좋고요.”

그의 말처럼 소설가는 원고료로 생활을 한다. 그렇다면 김 작가는 원고료 관리를 어떻게 할까. 답은 조금 의외였다.

“내가 한 번도 저축을 해본 적이 없어요. 보험도 없고요. 원고료를 받으면 집에다 일부 떼어 주고, 나는 술을 사 마셔요. 그리고 나머지로는 여행을 다니죠. 다른 사람이 보면 ‘배짱이 같은 삶’이라고 비난 할지 모르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원망이 없어요.”

창작 고통 술로 풀어

김 작가의 책은 해외에서도 유명하다.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터키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돼 세계 곳곳에 출간됐다. 번역된 책이 너무 많아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할 정도다.

현재 김 작가는 파라다이스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재단에서 그가 힘을 기울이는 일은 중국작가들과의 교류다. ‘한•중작가회의’를 개최하며 한해 한 번씩 중국과 한국을 오간다. 그렇게 문학교류를 하고 관광도 한다. 올해는 중국작가 20여명과 제주도에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고령의 나이도 문학에 대한 열정 앞에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이가 70살이 넘으니 예전보다 글을 쓰는 속도는 느려졌어요. 하지만 열정은 더 깊어졌죠. 풍부해진 이 감수성을 어쩌지 못하겠어요.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청춘인 걸….”

앞으로도 한국문학을 외국에 소개하고, 외국 작가와의 교류도 활성화시키겠다는 김 작가. 그의 모습에서 대가大家 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느껴졌다.

☞ Who is 김주영?
1939년 경북 청송에서 출생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소설 「휴면기」로 월간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김동리문학상과 가천환경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객주」 「빈 집」 「천둥소리」「멸치」 등이 있다.

김주현 경인방송 기자 hahaha@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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