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총론] 한국경제 부활코드 ‘군살빼기’

어둠의 연속이다. 사방이 막혀서다. 글로벌 경제가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다. 국가도, 기업도, 가계도 어렵다.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불황탈출 히든카드는 번번히 통하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석학들은 이렇게 말한다. “군살을 빼야 할 때가 왔다.”

 
경고등 켜진 수출 원ㆍ달러 환율이 심상치 않다. 심리적 마지노선이라는 ‘1100원’에 바짝 다가섰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돈이 많이 풀려서다. 미국의 QE3(3차 양적완화), 유럽중앙은행(ECB)의 무제한 국채매입으로 글로벌 유동성이 높아진 것이다. 한국경제로선 무서운 ‘암초’를 만난 격이다.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 경쟁력이 하락할 수밖에 없어서다.

 
실제로 수출이 한국경제에 미치는 ‘순純성장 기여도’는 지난해 2.6%에서 올해 1.2%로 1.4%포인트 떨어졌다. 한국경제가 진짜 난관을 만났다. 빨간불 켜진 내수 올 여름, 밀가루ㆍ옥수수ㆍ대두 등 국제곡물가격이 껑충 뛰었다. 이상기온 탓에 생산량이 줄어서다. 금융시장 안팎에선 “4~5개월 후가 걱정된다”는 우려가 나왔다. 국제곡물가격이 국내물가에 영향을 끼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이기 때문이다. 밀가루 예를 보자. 밀가루는 원맥 값이 원가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원맥이 제품생산에 사용되기까지는 길게는 5개월이 걸린다. 곡물값 상승이 식료품 가격을 끌어올리는 데는 이 정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는 얘기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애그플레이션이 한국경제를 덮치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올해 말 애그플레이션이 본격화될 것으로 내다봤다. 애그플레이션 탓에 물가가 오르면 소비자는 당연히 지갑을 닫는다. 그러면 내수시장이 위축되고 기업의 제품수요가 떨어진다. 곡물이 기업실적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얘기다.

▲ 원, 달러 환율이 10월 17일 연중 최저인 1105.50원을 기록했다. 심리적 마지노선인 1100원이 깨질 위기에 몰렸다. 수출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수출 부진한데 환율하락까지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2%대다. 말 그대로 ‘저성장’ 국면이다. 수출 경쟁력 약화에 내수부진, 그리고 물가상승까지…. 한국경제는 외줄을 타야 할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
세계경제가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유로존 재정위기가 재확산되고 있는데다 미국의 재정절벽(재정지출 축소로 경제가 충격을 받는 것) 가능성이 거론되면서 세계경제에는 또 다시 한파寒波가 몰아칠 태세다. 특히 한국경제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앞서 언급했듯 원ㆍ달러 환율이 떨어지면서 수출경쟁력이 약해질 위기다. 내수시장마저 위축돼 기업제품이 예년만큼 팔리지 않는다. 가장 민감한 업종은 유통이다. 내수부진에 영업규제까지 겹치면서 유통은 ‘시련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재계에 부는 ‘다이어트 열풍’
롯데그룹은 올 6월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그룹 계열사의 실적이 하락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다. 롯데쇼핑의 상반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보다 17% 이상 줄었다. 6년 만에 가장 큰 하락률이다.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도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각각 1.6%, 0.7% 떨어졌다.
자금사정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현금확보에 나선 기업이 수두룩하다. 현대상선은 2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추진하고 있다. GS칼텍스와 현대중공업은 올 들어 각각 1조1500억원, 1조2000억원 가량의 회사채를 발행했다.

 
세계불황이 국내 부동산 시장을 위축시키면서 건설업계도 ‘사선死線’을 넘나들고 있다. GS건설ㆍ삼성물산 등 메이저 건설사마저 수주와 영업이익이 기대치를 밑돌 것으로 전망된다. 중견 건설사의 사정은 더 나쁘다. 시공능력평가 100위권 건설사 중 법정관리나 워크아웃 중인 곳은 21개에 달한다.
고소득자의 소득은 아래로 흐르지 않지만 대기업ㆍ중견기업의 실적하락은 작은 규모의 회사에 영향을 끼친다. 이상한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가 나타나고 있는 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소규모 기업의 34.4%가 한계기업이다. 2006년 16.6%에서 두 배로 늘어났다. 한계기업은 금융차입에 의존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운 기업을 말한다. 특히 부동산ㆍ임대업, 음식ㆍ숙박업종의 소규모 기업 가운데 60%가 한계기업이었다.

소규모 기업의 건전성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마다 나빠지고 있다. 부채비율은 2008년 203.3%에서 2011년 235.1%로 크게 늘어났다. 영업이익률은 지난해 -5%에 육박했다. 2006년에는 -0.4%였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음식숙박업, 부동산ㆍ임대업 등을 중심으로 창업이 크게 늘어났지만 경기부진이 계속되면서 한계기업이 급증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 자산매각 한창
경기침체가 길어질 때 기업이 택할 수 있는 전략은 간단하다. 불필요한 사업이나 자산을 매각해 몸집을 가볍게 만드는 거다. 몸집을 줄이면 고정경비가 적게 들어 효율성이 높아진다. 게다가 현금 확보가 가능해 유동성 위기에 빠질 확률이 적어진다. 실제로 불황 때 가장 믿을 수 있는 건 현금이다. 1년 후에 100억이 들어와도 당장 쓸 돈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비상상황이 찾아오더라도 ‘측면돌파’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최근 몸집 줄이기에 전력을 기울이는 기업이 늘어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양그룹은 최근 이마트에 보유하던 동양리조트 주식 전량(77만주)을 392억원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동양 관계자는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동양리조트를 처분한다”고 설명했다. 하이트진로도 자회사인 페르노리카코리아임페리얼의 주식 전량을 영국의 주류업체 앨라이드 도메크에 700억원을 받고 매각했다. 역시 재무구조개선이 목표였다.

SK텔레콤은 남산 그린빌딩과 구로ㆍ장안사옥 등 서울시내 사옥 3곳을 매각한다. 서울 사옥 매각은 ‘세일 앤드 리스백(sale & lease backㆍ매각 후 재임대)’ 방식으로 추진된다. 매각대금은 3개 사옥을 합쳐 2000억원대 중반일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업황 하락으로 고전하고 있는 STX그룹 역시 STX메탈과 STX중공업을 합병함과 동시에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 더욱이 STX에너지 지분매각을 위해 우선협상 대상자까지 선정하는 등 유동성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특단의 대책도 발표했다.
과감하고 선제적인 자구책 필요

 
2005년 이후 꾸준한 인수ㆍ합병(M&A)으로 규모를 키우던 롯데그룹도 불황을 돌파하기 위해 체질개선을 꾀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주력 식품 계열사로 부상하고 있는 롯데삼강을 중심으로 계열사 합병작업을 벌이고 있다. 롯데삼강이 롯데햄을 내년 1월에 합병하는 방안이다. CJ그룹 역시 택배 계열사인 CJ GLS와 CJ대한통운을 합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기침체의 늪이 예상보다 깊어지고 있기 때문에 각 기업은 리스크 관리를 위해 합병과 계열사 매각 등의 조치를 취하고 있다”며 “내년 중반까지는 이런 흐름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불황일수록 기업은 과감하고 선제적인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 주식투자자들이 손절매를 못해 큰 손실을 보게 마련이듯 우량기업을제때 매각하지 않으면 (장부상 자산이 제아무리 많아도) 부도 위기에 몰릴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몸집 줄이기 전략이 인적 구조조정으로 연결됐을 때 발생한다. 실제로 경기 침체가 깊어지면서 이런 우려는 벌써 현실이 되고 있다. 자동차ㆍ건설ㆍ정유ㆍ화학업종을 중심으로 인력 구조조정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은행•증권 등 금융계도 인원 감축에 나서고 있다. 산업계 전반에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불어 닥쳤던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몰아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르노삼성은 2000년 회사 출범 이후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연구개발(R&D)과 디자인 부문을 제외한 4700명(80%) 가량이 대상이다. 한국GM은 현재 부장급 이상 130여명의 퇴직 절차를 밟고 있다. GS칼텍스, KCC도 최근 희망퇴직을 받거나 수십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실적이 나빠진 기업이 인력을 잘라 몸집을 줄이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인력 구조조정이 기업은 살고 경제는 죽이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1997년 외환위기 시절과는 달리 구조조정 대상 인력이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외환위기 때는 창업전선에 뛰어들어 자영업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자영업계가 포화상태에 다다른지 오래다. 구조조정된 인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거의 없다. 한국경영자총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전체 취업자 수 대비 자영업자 비율은 26.5%에 달한다. OECD 평균(14.4%)의 두 배 규모다. 미국 7.3%, 일본 9.9%에 비해 2~3배 높다.

인력 구조조정은 마지막 수단
비핵심사업과 자산을 매각해 ‘날쌘 조직’을 만드는 건 어쩌면 중요한 일이다.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효율성이 높아져서다. 하지만 불황의 탈출구를 감원에서만 찾는 것은 지양해야 할 전략이다. 기업이 직원을 버리면 그 직원은 갈 곳이 없다. 그러면 한국경제의 선순환 고리가 끊어질 수밖에 없다. 김병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센터장은 “외환위기 때만 해도 명예퇴직자 등 구조조정 인력이 사회에 재취업할 수 있는 여건이 어느 정도 조성돼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구조조정 대상자들은 허허벌판에 내몰려 갈 길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자영업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정부 차원의 대책 등 사회 안전망이 갖춰져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군살을 빼야 위기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군살을 빼기 전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구조조정 인력이 살 수 있고, 시장에 활력이 돈다. 기업이 살을 뺀다고 시장까지 살이 빠져선 안 된다. 시장의 진리다. 

김미선 기자 story@thescoop.co.kr|@itvfm.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