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1회

▲ <일러스트:이진호>
관문을 연속하여 받은 이순신은 담이 찢어지는 듯하고 마음이 답답하였다. 순신은 곧 장계를 썼다. “국가의 수치를 씻기를 원치 않는 자 없으니 곧 경상도로 출전하여 함께 싸우라는 명령을 엎드려 기다립니다.” 이수사는 출전준비에 힘을 쓰며 조정에서 회답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임진1592년 4월 15일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관문1)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가덕加德첨사 전응린田應麟과 천성天城만호 황정黃珽의 급보를 접하건대 4월 12일 신시에 일본대선 90여척이 부산항을 향하여 나오니 세견선인지도 모르거니와 90여척이나 다수한 배가 나온다는 것은 그 연유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연속하여 다수한 배가 나온다고 하니 심상치 아니한 듯도 하다.”

수사 이순신은 이 관문을 보고는 정녕코 풍신수길이 조선에 출병한 줄을 안다. 곧 우후 이몽구 이하 제장을 신칙2)하여 소속 5읍 6진에 군사와 병기 병선을 정돈해 두어 하시를 물론하고 장령일하에 즉각 출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순신은 전라감사 병사 우수사 등 각처에 지급히 통지하여 준비하도록 하였다.

4월 16일에 경상감사 김수의 관문이 순신에게 왔다. “금월 13일에 일본 병선 400여척이 부산포에 내박하였다.” 또 경상우수사 원균의 관문이 왔다. “부산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병사 이각과 좌수사 박홍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래성 뒤까지 왔다가 적을 겁내 회군하였다.” 4월 22일에 또 경상감사 김수의 관문이 왔다. “양산군도 함락이 되고 적군이 매우 강성하여 도무지 대적할 수가 없이 승승장구하여 무인지경과 같이 쳐들어오니 영공은 전함을 인솔하고 와서 구원하라.”

이러한 관문을 연속하여 받는 이순신은 담이 찢어지는 듯하고 마음이 답답하여 칼을 빼어 들고 서안을 치며 통분함을 마지 아니하였다.

더구나 병사니 수사니 하는 무리들이 일도一道의 대장으로서 군사를 끌고 동래성 뒤까지 갔다가 적세가 치장3)한 데 겁이 나서 달아난 것이며 적이 상륙한 지 사오일이 못 되어 동래 양산 김해金海 같은 거진이 무너진 것에 순신은 통분함을 금치 못하였다.[감사 병사 수사가 있는 곳은 주진主鎭, 목사 부사 방어사 변지邊地는 거진巨鎭, 만호 이하는 제진諸鎭] 곧 함대를 통솔하고 경상도 바다로 나가고 싶었으나 조정의 명령이 없이 자의로 내 관할 밖의 타도로 움직임은 국법이 불허한다. 순신은 곧 장계를 썼다. 그 글에는 이러한 말을 기록하여 성화4)같이 조정에 올렸다.

▲ 수사 이순신은 이 관문을 보고는 정녕코 풍신수길이 조선에 출병할 줄을 안다. 곧 우후 이몽구 이하 제장을 신착하여 소속 5읍6진에 군사와 병기, 병선을 정돈하고 장렬일하에 즉각 출전하도록 하였다.
“적세가 이처럼 치장하여 거진들이 연달아 함락되고 내지까지 범하게 되니 이런 통분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하된 자가 누구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국가의 수치를 씻기를 원치 않는 자 없으니 곧 경상도로 출전하여 함께 싸우라는 명령을 엎드려 기다립니다. 곧 출병하지 않으면 앉아서 기회만 잃어버릴 듯합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조정에 있는 대관이란 무리들이 당파싸움과 피난준비 등으로 세월만 보낼 것을 근심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순신은 관찰사 이광, 방어사 곽영郭嶸, 병사 최원崔遠, 우수사 이억기 등에게 이 뜻을 통지하고 경상도의 순변사 이일, 관찰사 김수, 우수사 원균 등 제장에게 도내 수로의 형세며, 전라 경상 양도의 수군이 어디서 모일 것이며, 적의 병선이 있는 곳이 어디며, 기타 대응할 모든 사정을 일일이 회답하여 주기를 요청하는 파발마를 보냈다. 본영의 소속인 방답5)사도6) 여도7) 발포 녹도 가리포 6진이며 순천 광양光陽 낙안 흥양8) 보성 5읍에 발령하여 이달 29일을 기약하고 본 좌수영 앞바다로 모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수사는 출전준비에 힘을 쓰며 조정에서 회답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일본 제1군 장령 소서행장 종의지 등이 부산 동래를 연달아 점령하니 제이군 장령 가등청정 과도직무 등은 웅천9)에 상륙하여 동래로 모였다. 제9군 장령 구귀가륭 협판안치 가등가명 등당고호 등이 통솔한 수군만 빼어놓고 전부가 상륙하여 동래성으로 모여들었다. 수군 제장들도 동래성 싸움에 참가한 이가 많이 있었다.

동래부에 모인 일본제장은 서울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을 네 갈래로 나누어 중로에는 소서행장, 좌로에는 가등청정, 우로에는 흑전장정, 수로에는 구귀가륭 협판안치 등이 각각 나가기로 하였다. 조선 남도는 수백년 동안 전쟁이란 것은 해보지 못하던 일이라 졸지에 창검을 번득이고 조총을 놓으며 쳐들어오는 일본군사 앞에는 수령이며 방백이며 병수사 방어사들이 당할 자가 없었다.

다대포첨사 윤흥신은 그 아우 흥제興悌와 더불어 적군과 싸워서 전사하였다. 밀양密陽부사 박진朴晋은 군사 2000을 거느리고 동래를 구하러 가는 길에 중로에서 좌병사 이각을 만나 황산黃山에 내진한 적군을 같이 막기로 하였더니 이각이 먼저 달아나버렸다.

박진이 고립된 부대로 싸워 적 수급을 베었으나 중과부적하여 소서군에게 패하여 군관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와 군사 3백여 명을 잃고 밀양으로 퇴각하여 군기와 군량이 든 창고를 태우고 산중으로 달아났다. 박진은 활이 뛰어났고 그 당시에는 유명한 무변이었다.

좌병사 이각은 동래성에서 빠져나와 소산역도 버리고 박진과도 배신하고 울산병영으로 돌아와 인마를 빼내어 그 애첩과 군포 1000필을 한성 본댁으로 보낼 때에 그를 반대하는 진무조차 목을 베었다. 그날 밤에 병영 안에서 일본군이 온다는 헛소동이 수차나 일어났으되 대장인 이각이 그것을 진정시키지도 못했다.

이때 울산병영 성내에는 13읍의 군사가 5만 명이나 모였다. 소위 대장인 좌병사 이각이 먼저 달아날 계교를 내는 기색이 보였다. 안동판관 안성安性이 이각을 꾸짖어 “영감, 못 가오!” 하고 막았다. 이각은 “나는 성 밖 서산西山의 험준한 곳에 유진하여 의각지세를 지었다가 적이 오거든 내외로 협격하는 것이 득책일 것이다” 하여 안성을 속이고 서산으로 나가서 말을 채찍질하여 박홍과 매한가지로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안성은 이각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칼을 만지며 분개하였다.

이각은 그 당시에 상당한 무장으로 무예와 용맹이 과인한 사람이었다. 울산병영에서 자의로 대포를 제작하여 파도에 갈고 닦인 바닷가의 둥근 돌을 탄환으로 대용하고 화약으로 시험 발사해본 결과 그 파괴력이 무서웠다. 그때에 대포의 비법을 알기로는 이순신 김시민 이장손李長孫 등과 이름이 나란하였기에 사람들이 기대하였더니 급기야 난을 당하여 일본군이 무섭다는 데 혼이 나서 부하를 속이고 달아나기만 하였다. 참 이일 원균의 선배요 박홍의 아류였다.

좌병사의 부관인 우후 원응두元應斗도 밤에 도망하고 그 뒤를 이어 각읍 수령들과 군관 사졸 할 것 없이 다투어 달아났다. 병영에 모였던 13읍의 5만대군이 적의 그림자도 보기 전에 군량만 썩히고 흩어지고 말았다. 판관 안성까지도 고장난명孤掌難鳴이 되어 이각을 욕하고 달아나 버렸다.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이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과 합세하여 김해성을 지키다가 서예원이 먼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서예원은 밀양으로 갔다가 그의 외숙에게 크게 책망을 당하고 진주晋州로 향하였다. 초계군수 이유검도 서예원의 뒤를 이어 달아났다.

오직 김해 수성장 송빈宋賓 등이 역전하여 적 2급을 베고 군관 김득기金得器 등 합 4인이 장렬히 전사하고 성은 결국 함락되었다.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일본군이 무서워서 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선조가 김성일이 일본 사정을 잘못 보고하였다는 죄로 좌천하여 진주병사10)를 시켰더니 대간의 상소가 일어나 “서생으로서 병사라는 곤임11)을 맡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선조는 “일본 갔던 사신으로 일을 잘못하였다” 하여 상소를 불청하고 진주에 부임하여 적을 막으라 하였다.

▲ 선조는 유성룡을 도체찰사로 임명하고 수륙군의 최고 감독권을 주었다. 사진은 유성룡의 갑옷.
경상감사 김수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에 있었다. 부산과 동래 양산이 연해 함락이 되고 정발 송상현 조영규 등 제장이 죽었다는데 겁이 나서 군사도 버리고 영산靈山으로 달아났다. 영산에서 합천陜川으로 합천에서 지례知禮로 달아나면서도 초계군수 이유검을 만나서는 그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는 죄목을 잡아 이유검을 처참하였다.

경주부慶州府는 가등청정의 군사에게 포위되었다. 부윤12) 윤인함尹仁涵은 대구大邱 순영13)에 가고 없었다. 판관 박의장朴毅長과 장기長鬐현감 이수일李守一 등이 싸우지도 아니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부산함락의 보고가 서울에 올라온 것은 4월 17일이었다. 좌수사 박홍이 달아나면서 보낸 장계였다. 이 경보를 본 선조는 이것이 전부 김성일이 일본 군정의 보고를 잘못한 것이라 하여 우병사 김성일을 잡아 올려 금옥에 가두었다. 선조는 곧 영상 이산해, 좌상 유성룡, 우상 이양원 등을 불러 방적할 계책을 물었다. 그러나 삼대신은 묵묵히 서로 볼뿐이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들은 다 군비를 하자는 데 반대한 작자들일뿐더러, 서울에 군사라고는 명색뿐이요 정말 싸울 만한 군사는 몇천명도 못 되었다.

하는 수 없어서 대신들과 비변사에서는 이일로 순변사를 삼아 중로를 막게 하였다. 성응길成應吉로 좌방어사를 삼아 좌로를 막게 하였다. 조경趙儆으로 우방어사를 삼아 우로를 막게 하고, 조방장 유극량劉克良으로 죽령竹嶺을 지키게 하였다. 조방장 변기邊璣로 조령鳥嶺을 지키게 하고, 변응성邊應星으로 경주부윤을 맡길 것을 상주하였더니 그대로 임명되었다.

선조는 좌의정 유성룡을 신임함이 자못 두터워서 유성룡과 상의하고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을 물리고 김응남으로 대임케 하고 심충겸沈忠謙으로 병조참판을 삼았다. 이는 일국 병마의 권을 유성룡의 손에 잡히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조는 유성룡으로 도체찰사14)를 삼아 수륙군의 최고 감독권을 주었다. 유성룡은 병조판서 김응남으로 부체찰사를 삼고 전 의주義州목사 김여물金汝岉로 수행원을 삼기를 상주하여 임명되었다.

김여물은 전년에 신립의 일파가 수군 전폐론을 주장할 때에 그를 비평하여 “일본엔 육지가 없다는 말인가, 수전만 잘하게? 공연히 강적을 내지로 끌어들여 싸운다는 것이 무슨 어리석은 소리냐?” 하고 분개하여 그 불가함을 말하였다. 조정에서 “조정의 방략을 비방한다”는 죄명을 덮어씌워 의주목사의 직을 파직시키고 금옥에까지 잡아 가두었다. 정말 김여물의 의견은 이순신과 방불한 곳이 있었던 것이었다.

유성룡은 김여물의 재명을 듣고 옥중에 갇혀 있는 김여물을 불러보고 시국 형세를 토의한 뒤에 기재로 인정하였다. 선조에게 청하여 자기의 수행원을 삼아 두었다. 유성룡은 당대 용맹한 장수라고 이름난 순변사 이일을 재촉하여 속속 출발하게 하였다. 서울의 각 마을 군정들은 거의 도망하고 없으므로 이일은 데리고 갈 군사가 부족하였다.

본인은 겨우 300명을 데리고 출발하고, 별장15)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떨어져서 군사를 모집해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였다. 이일이 명장이라는 이름을 믿고 서울 인심은 적이 안정되나 밀양이 함락되고 경주가 점령되었다는 경보가 연속하여 끊이지 않았다. 종남산16) 봉화불은 쉴 날이 없어서 서울의 인심은 물 끓듯 하였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판윤 신립을 불러서 계책을 물었다. 신립은 이일보다 더한 명장이라는, 집안 대대로의 무관이었다. 신립은 “대감은 무장이 아니시니까, 쓸 만한 장수를 가려서 이일의 뒤를 돕게 하는 것이 양책일 것 같소” 하고 신립은 자기가 나서고 싶은 뜻을 보였다. 유성룡이 다시 묻기를 “적군을 파할 방략이 있소?” 하였다. 신립은 자신이 있는 듯한 어조로 웃으며 “당대 명장 신립이 적군을 못 무찌르면 살아서 돌아오지는 아니하겠소!” 하고 호기를 부렸다.

신립이 큰소리치며 장담한 것은 그 의기와 충용에서 나온 바였다. 당시에 소위 원수니 대장이니 병수사니 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달아나기만 일삼는 판에 이러한 장수가 그 누구인고. 정발 정운 두 장수 외에는 신장군의 담기膽氣는 오히려 뭇 장수를 뛰어넘는다 하겠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대장 신립의 의기 넘치는 뜻을 장하게 여겨서 어전에 상주하여 도순변사17)로 임명되게 하였다. 신공은 수군 전폐론자이다. 그 제승방략은 일본군과 싸우는 데는 해상에서 막지 말고 육지로 상륙시켜 놓고 쳐부수자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은 물속에 있는 섬나라이니만큼 물에 익숙할 것이니 수전으로는 당하기가 어려운즉 내지에 끌어올려 놓고 우리 편에서 제일 잘하는 육전으로 대번에 섬멸하자는 데 있었다. 신공의 이 제승방략은 서인들이 이순신의 수군확장안을 제지하려는 음모였다.

 
김여물이 죄를 입은 것도 그를 반대한다는 때문이었다. 만일에 일본이 육전도 잘한다 하면 육전으로는 당치 못할 것이니 육전전폐론까지 주장할 뻔하였다. 신립이 도순변사의 임명을 받고 어전에 하직 인사를 할 때에 선조가 “경은 무슨 계책으로 적을 막으려 하는고?” 하고 물었다. 신립은 대답하되 “적이 용병할 줄을 모르니까 염려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선조가 “무엇을 보고 적이 용병할 줄을 모른다 하는가?” 하고 다시 물었다. 신립은 “적군이 상륙한 뒤로 내지로 들어오기만 힘쓰니, 병법에 ‘군대가 길게 늘어져 적지 깊이 들어가면 패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하는 이런 것을 모르는 적군이니, 두려울 것이 없는 줄로 아룁니다. 소신이 비록 재략은 없어도 며칠 지나지 않아 적을 평정하겠습니다” 하고 극히 쉽게 대답하였다.

선조는 신립의 말을 못미더워하는 태도로 탄식하며 “변협이 매양 이르기를 [변협은 대장으로 형조판서에 이르고 지금은 사망하였다] 일본군이 강하여 격파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더니 경은 어찌 그리 쉽게 여기는가? 부디 삼가라” 하고 손수 보검을 주며 “이일 이하로 명에 따르지 않는 자를 참하라” 하였다.

선조는 신립을 보내고 그 대답이 경솔하고 생각이 정밀치 못함을 우려하여 여러 번이나 “변협이 살아 있었던들…” 하고 변협이 죽었음을 한탄해 마지 않으며 훌륭한 장수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신립은 비변사 빈청에 나와 세 대신에게 하직하고 나갈 때에 신립의 머리에 쓴 사모紗帽가 땅에 떨어졌다. 신립은 사모를 주워 쓰고 의기자약하게 길을 떠났으나 이것을 본 사람들은 다 실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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