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캇 보라스의 ‘협상’기술

▲ 스캇 보라스가 지금까지 성사시킨 계약의 총액은 약 40억 달러에 달한다. 그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에이전트라고 불리는 이유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에이전트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한 사람을 꼽는다. 선수에게는 큰돈을 안기지만 구단에게는 피를 말리는 심리전을 유도하는 스캇 보라스다. 박찬호의 대박 계약을 이끌었고 최근 추신수, 류현진과도 계약을 맺어 국내에도 화제가 되고 있다.

2000년 천재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미국 메이저리그 FA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그는 10년 2억5200만 달러(약 2700억원)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받고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했다. 시애틀에서의 7년간 그의 성적은 타율 0.309, 출루율 0.374, 장타율 0.561, 189홈런 595타점. 역사상 최강의 유격수로 손꼽힐 만했다. 그러나 2억5200만 달러는 분명 세상을 놀라게 하는 금액이었다.

 
이 계약의 뒤에는 선수에게는 ‘천사’, 구단에게는 ‘악마’로 불리는 스포츠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가 있었다. 톰 힉스 텍사스 구단주가 긴 협상 끝에 보라스에게 제시한 금액은 1억5000만 달러. 충분히 큰 금액이었지만 보라스는 힉스 구단주에게 전화를 걸어 “이미 2억 달러를 제시한 구단이 있다”며 “로드리게스를 영입하고 싶으면 더 많은 돈을 내야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로드리게스를 놓칠까 봐 조바심이 난 힉스 구단주는 결국 사상 유례가 없는 돈을 쏟아 부었고 이 계약 이후 텍사스는 보라스의 현금인출기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다.

협상 당시 보라스가 언급했던 2억을 제시한 구단이 정말로 있었는지는 지금도 논란거리다. 진실은 보라스를 제외하면 아무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실제로 2억을 제시한 구단이 있었든 아니든 보라스가 구단들을 선수 영입전에 끌어들이고 경쟁을 붙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스캇 보라스는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에이전트로 꼽힌다. 일명 보라스사단이라고 불리는 그의 고객 중에는 슈퍼스타가 즐비하다. 최근에는 정상급 아마추어 선수마저 보라스가 싹쓸이하고 있다. 보라스에게 이같이 선수들이 모이는 이유는 딱 하나다. 300만 달러를 받는 선수에게 1000만 달러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보라스가 국내에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박찬호의 에이전트로 활동하면서 부터다. LA다저스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던 박찬호는 보라스의 도움으로 5년 5600만 달러(약 600억원)라는 빅딜을 성사시켰다. 이후 김병현, 김선우 등이 보라스의 손을 거쳤고 윤석민, 추신수, 류현진 선수가 보라스사단에 합류하며 국내 야구팬에게도 친근한 이름이 됐다.

보라스의 본래 꿈은 메이저리거였다. 그러나 선수 보라스는 실력이 신통찮았다. 197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한 보라스는 더블A팀에서 3루수로 뛰었다. 이후 메이저리그 무대는 한 번도 밟지 못한 채 무릎 부상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대학에서 화학, 대학원에서 약학을 전공했고,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던 중 변호사 자격증까지 얻은 그는 이후 의료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팔색조 변신으로 에이전트 세계 입문

그러던 중 고향 친구이자 마이너리그 동료였던 마크 피실린으로부터 연봉 협상을 대신해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직접 연봉 협상에 나서보니 선수출신, 약학과 법학 전공이라는 모든 경력이 큰 도움이 됐다. 변호사 생활로 다져진 유창한 언변도 빛을 발했다. 그는 무릎을 치며 “아! 스포츠 에이전트가 내가 갈 길이다”고 외쳤다.

보라스가 에이전트로 세간에 이름을 날린 것은 1985년 마이너리그 동료였던 빌 코딜에게 5년간 750만 달러를 안기면서부터다. 크게 주목 받지 못하던 선수였던 코딜에게 당시 불펜투수로선 역대 최고 금액을 손에 쥐어준 것이다. 보라스의 전화벨이 불이 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보라스는 그가 기록한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액 계약’을 그의 손으로 연이어 갈아치웠다. 1997년 제구의 마술사로 불리는 그렉 매덕스에게 5년간 5750만 달러의 계약을 성사시켜 주며 기록을 세웠고 불과 1년만인 1998년 LA다저스와의 계약으로 케빈 브라운에게 1억500만 달러를 쥐어줬다. 1억 달러 계약의 시대를 만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알렉스 로드리게스와 텍사스의 2억5200만 달러는 미국 프로스포츠를 통틀어 최고 금액이었다.

보라스는 2008년 한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계약 규모를 다 합하면 약 40억 달러(약 4조3400억원)가량 된다”고 밝혔다. 선수마다 계약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에이전트의 보수는 계약 총액의 5%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체결한 계약의 대가로 챙긴 보수는 한화로 2200억원에 달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보라스가 구단에게 ‘악마’,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단순히 슈퍼스타의 대형계약 협상을 잘해서만이 아니다. 보라스가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오히려 신인 드래프트 시장이다.

 

1996년 보라스는 미국 야구판을 뒤흔드는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신인 지명 사실을 15일 이내 서면으로 통보해야한다’는 규정을 관행적으로 어겼다. 보라스는 이 사실을 교묘히 이용해 자신의 고객이었던 트래비스 리, 존 패터슨, 맷 화이트, 바비 셰이를 FA선수로 만들어 버렸다. 덕분에 트래비스 리와 맷 화이트는 1000만 달러, 존 패터슨은 600만 달러, 바비 셰이는 300만 달러의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는 대박을 터뜨렸다.

또한 보라스는 이듬해 JD 드류를 전체 2순위로 지명한 필라델피아 필리스에게 1100만 달러를 요구하며 신인선수의 몸값 폭증 현상을 주도했다. 당연히 유망한 신인들은 돈을 많이 쥐어주는 보라스와 계약했고 각 구단들은 신인 드래프트에서조차 보라스의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 됐다.

치밀한 사전준비로 협상왕 등극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보라스의 에이전트 능력은 치밀한 정보력과 사전준비에서 나온다. 보라스 코퍼레이션에는 NASA출신의 통계 전문가, MIT 출신의 엔지니어, 메이저리그 선수 출신의 스카우트, 변호사 등이 포진해 있다. 그의 사무실에는 메이저리그 전 경기가 녹화되고 있고 14명의 연구원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모든 경기를 분석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이들이 모두 힘을 합쳐 구단이 반박할 수 없도록 치밀한 자료를 만들어 낸다. 보라스가 구단과의 협상때마다 100쪽에 달하는 선수들의 데이터 및 가치 분석 자료를 내놓는 것은 정평이 나 있다. 보라스가 이 자료를 고급스런 가죽양장으로 포장하는 것 역시 치밀하게 계산된 심리전의 일환이다.

보라스를 두고 구단들은 갖은 악평을 쏟아낸다. 돈만 밝히는 냉혈한이라고도 한다. 철저하게 비즈니스에 입각한 에이전트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대형 빅딜은 언제나 팬들을 열광시키고 선수에게는 강한 동기부여가 된다. 비록 그가 성사시킨 계약 이후 ‘먹튀’로 전락하는 선수들이 허다하더라도 말이다.
심하용 기자 stone@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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