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위치 신세 전락한 국내 소형차

국내 소형차가 위기다. 종류는 턱없이 부족하고 포지션도 애매하다. 경차와 준중형 사이에 끼어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폭스바겐의 폴로가 국내 소형차 시장을 공략한다. 이 시장을 호시탐탐 노리는 다른 수입차 업체도 있다.

 
# 직장인 A씨는 서울에 위치한 현대차 판매 대리점을 찾았다. 자신의 첫차로 소형차 엑센트를 살 요량이었다. 첫차인 만큼 눈으로 직접 보고 고르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대리점에는 엑센트가 전시돼 있지 않았다. 다른 판매 대리점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A씨에게 판매직원이 말했다. “소형차를 전시한 대리점은 많지 않습니다. 찾기 어려울 겁니다.” 국내 소형차가 외면받고 있다.

# 일본 자동차 시장의 대세는 소형차다. 일본거리를 질주하는 자동차 두 대 중 한대는 소형차라는 얘기도 있다. 사상 유례없는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유럽시장에서도 소형차가 강세다. 경기침체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유럽인으로선 큰 차를 타고 다닐 여력이 없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판도 역시 달라졌다.

3종류밖에 없는 국내 소형차

▲ 세계 자동차 시장의 무게중심이 소형차로 바뀌고 있다. 하지만 국내 소형차 시장은 반대로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불황의 늪이 깊어지면서 완성차업체들의 소형차가 인기를 끌고 있다. 도요타의 ‘야리스’, 마쓰다의 ‘데미오’, 닛산의 ‘노트’, 폭스바겐의 ‘폴로’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 자동차 시장의 무게중심이 소형차로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소형차는 배기량 1000~1600cc의 차량을 말한다. 국내 소형차의 배기량은 주로 1400cc, 1600cc다.

반대로 국내 소형차 시장은 위기다. 경쟁력은 일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종류 또한 많지 않다. 국내 출시되는 소형차 모델은 ‘엑센트’ ‘프라이드’ ‘아베오’ 3개뿐이다. 소형차 시장의 위기는 국내 특유의 트렌드 때문에 비롯되고 있다.

다른 나라와 달리 국내 소비자는 소형차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국내 자동차업체는 소형차 개발을 등한시하고 있다. 수요가 없는데 공급을 맞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차의 올 10월까지 승용차 판매량(32만5595대)에서 소형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7%다. 기아차와 한국GM의 소형차 비중 역시 각각 5%, 2%에 불과하다. 업계에선 ‘실용성이 아닌 과시형으로’ 자동차 문화가 흘러감에 따라 국내 소형차 시대는 조만간 끝이 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불과 20년 만에 시장판도가 바뀐 것이다.

국내 자동차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모델은 소형차였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기아차 프라이드는 수입차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소형차는 판매 부진을 겪었다. 과거 내 차를 갖는 게 목적이었던 시대(이른바 마이카 시대)에서 배기량이 큰 차, 과시용의 자동차 시대로 들어서면서 소비자는 중•대형 자동차만을 바라봤다.

국내 자동차업계는 이런 흐름에 자연스럽게 동참했다. 비교적 판매수익이 적은 소형차엔 소홀했다. 반면 돈이 되는 중•대형은 집중 공략했다. 그 결과 소형차의 실적은 해마다 줄어들었다. 기아차 프라이드의 판매대수는 2008년 2만2197대에서 지난해 1만47대로 약 50% 감소했다. 한국GM의 아베오는 2008년 8689대에서 지난해 3595대로 줄었다. 올 10월까지 누적판매는 1797대로 대폭 감소했다.

그나마 선전한 소형차는 현대차의 엑센트뿐이다. 2008년 9103대가 팔린 엑센트는 올 10월 현재 2만5465대를 판매했다. 하지만 국내시장에서 차지하는 현대차의 브랜드 네임과 지난해 10만대를 넘어선 아반떼의 판매실적과 비교하면 판매량이 너무 적다.

 
국내 소형차 시장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애매한 포지션을 들 수 있다. 국내 소형차는 경차와 준중형급 차량에 밀리면서 소비자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경제적인 측면을 고려한 소비자는 경차로 눈을 돌렸다. 보다 좋은 성능을 원한 소비자는 배기량이 한 단계 높은 아반떼•K3•SM3 등 준중형 차량으로 갈아탔다.

자동차업체 측에서 보면 소형차는 성능과 연비를 동시에 갖춰야 하고, 가격 역시 소비자에게 매력적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까다롭다. 경차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을, 준중형 또는 중형차는 성능을 내세울 수 있지만 소형차는 둘 다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어중간한 위치에 놓일 수 있다.

특히 가격경쟁력이 문제다. 3개 소형차 중 판매량이 가장 많은 엑센트의 판매가격(최저가 기준)은 1143만이다. 국내 대표 준중형 차량인 아반떼(1340만원)와 약 200만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국GM 아베오의 최저가는 1227만으로, 아반떼와 비슷하다. 연비(수동 기준) 역시 큰 차이가 없다. 엑센트와 프라이드는 18㎞/L고, 아반떼 17.5㎞/L다. 소비자로선 굳이 소형차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겉모양을 중시하는 국내 소비자의 특성도 무시할 수 없다. 자동차의 실용성 보다는 남에게 보여주기, 체면 차리기 등 과시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 소비자 대부분은 차량을 선택할 때 디자인•외관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있다. 자동차 전문 리서치업체 ‘마케팅인사이트’가 최근 실시한 ‘2012년 자동차 품질 및 고객만족’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소비자들이 신차를 구입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디자인(68%)’으로 나타났다.

판매실적에서도 소비자의 성향을 쉽게 알 수 있다. 올 10월까지 국내 자동차 판매 현황을 보면, 준중형 아반떼가 1위(9만117대), 중형 쏘나타가 3위(7만8331대), 대형 그랜저가 4위(7만2754대)를 기록했다. 10위권 안에 포함된 소형차는 없다.

소형차의 애매한 포지션이 화 불러

 
약해질 대로 약해진 국내 소형차 시장을 수입차가 파고들고 있다. 다운사이징을 무기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는 폭스바겐코리아는 내년 국내에 소형차 ‘폴로’를 출시한다. 지난해 일본시장에 선을 보인 폴로는 ‘일본 최고의 수입차’로 뽑히는 등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에서도 경쟁력을 갖기 충분하다는 평가가 많다.

박동훈 폭스바겐코리아 사장은 “2013년 소형차 폴로를 수입해 국내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겠다”고 밝혔다. 폴로가 출시되면 다른 수입차업체의 소형차 러시가 시작될 수 있다. 한 수입차업체 CEO의 말에서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한국의 수입차 시장은 꾸준히 성장할 것이다. 이런 성장세를 이끄는 모델은 소형차가 될 것이다.” 국내 소형차 시장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내 자동차 업체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현대•기아차 관계자는 “기존 소형차 모델을 꾸준히 업그레이드해서 새롭게 출시하고 있다”며 “특히 소비자의 취향을 고려해 디자인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차종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성장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필수 대림대(자동차학) 교수는 “이제는 에너지절약형, 친환경 자동차 시대”라며 “국내 자동차 시장에 다양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경제성과 효율성이 높은 소형 자동차가 늘어나야 하고, 이를 중심으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용선 기자 brave11@thescoop.co.kr | @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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