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업계 ‘시련의 계절’

섬유업계의 부도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면사제조ㆍ합성섬유ㆍ염색가공 등 업종을 가리지 않는다. 한편에선 유력 섬유업체들의 법정관리ㆍ잠적ㆍ폐업매각소식이 들려온다. 1997년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한 상황이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 섬유업체의 부도가 이어지면서 업계 안팎에 '도미노 부도' 우려가 감돌고 있다. 이런 경우 섬유업계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니트제조업체 A사는 최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11월 10일 관할 법원으로부터 재산보전 처분을 받았다. 현재 모든 채권채무가 동결됐다. 업계에 따르면 A사의 부채는 150억원이다. 금융권 부채만 110억원, 원사대금ㆍ편직료ㆍ염색가공료에서 기인한 부채가 4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A사는 작지만 내실이 탄탄한 섬유업체다. 대표 B씨는 해외영업과 국내영업 업무를 직접 챙길 정도로 열성적이고 영업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A사는 원단과 원사 제조로 매출을 끌어올렸다. 특히 해외영업에서 호조를 보였다. 주로 미주ㆍ중동ㆍ일본ㆍ중국에 원단을 주로 납품했는데, 실적이 괜찮았다. NICE 신용평가정보에 따르면 A업체는 지난해 매출액 392억원을 달성했다. 미래를 위한 투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11년 9월 경기도에 편직공장을 세웠다. 편직기 18대를 가동할 만큼 거래량이 많았다. 업계에서 탄탄한 기업으로 정평이 나있던 A사가 돌연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 화섬직물업체 D사는 대표이사가 몰래 회사 문을 닫고 해외로 잠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테면 야반도주다. D사는 중동 두바이를 중심으로 이란에 블랙드레스를 수출해왔다. 그러나 최근 이란시장이 막히면서 경영위기를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부채 규모는 기술보증기금 등 금융권과 원사대금ㆍ임직제직료ㆍ염색가공료를 포함한 5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2001년 설립된 D사는 섬유내수와 수출사업에 주력했다. 수출물량 대부분은 하청업체에 의존해왔다. 이 때문에 업계는 D사와 거래한 업체가 상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D사는 2011년 매출액 135억원을 올렸고, 영업이익은 8억원을 기록했다. 업계에 따르면 대표 E씨는 회사가 보유한 셔틀직기 40여대를 올봄에 매각했다. 이 와중에 대표 E씨가 돌연 잠적해 대금을 받지 못한 원사메이커와 거래원사 등 영세업체의 피해가 예상된다.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D사 대표 E씨와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최근 섬유업계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 부도대란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업계 안팎에선 니트제조업체 A사가 법정관리를 극비리에 신청하는 바람에 기존 거래처들이 연쇄 도산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나돈다. 그만큼 섬유업계는 흉흉하다.

실제로 부도기업의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올해 부도를 낸 섬유업체는 총 4곳. 그중 법정관리를 신청한 곳은 A사를 포함해 2곳이다. 면직물 제조업체 베가는 올 8월 24일 기업회생절차에 따른 재산보전처분을 신청했다. 곧바로 1차 재산보전처분이 내려져 모든 채권채무가 동결됐다. 개시결정은 한 달여 만에 내려졌다. 베가는 대구 지방법원 파산부가 기업회생절차 신청을 승인함에 따라 9월 23일 10시를 법정관리에 돌입했다.

섬유업계에 부는 부도대란

▲ 올 들어 부도를 맞은 섬유업체가 속출하고 있다. 법정관리에 들어갔거나 매각된 업체가 잇따르고 있다.
1994년 8월 설립된 베가는 에어제트직기 32대와 데피아직기 32대를 보유하고 있다. 베가의 대구시 청도군 공장은 기능성 메모리직물을 생산해 국내외에 납품했다. 하지만 베가는 총 100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금융권 부채가 90억원, 원사대금•가공료 등 상거래 채권이 10억원에 달했다. 김재관 베가 이사는 “빠른 시일 내에 기업을 정상화해 채권을 상환할 것”이라며 “현재 수출과 내수가동이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회사 문을 닫은 섬유업체 소식도 들린다. 합성섬유 제조업 계림섬유는 올 10월 폐업했다. 금융결재원에 따르면 계림섬유는 10월 12일자로 당좌거래가 정지됐다. 1986년에 문을 연 계림섬유는 주로 면사와 실을 가공해왔다. 서울과 경기 양주에 사업체를 두고 나일론을 생산할 만큼 사업규모도 꽤 컸다. 하지만 계림섬유는 27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공장이 매각되면서 막다른 길을 걷고 있는 섬유업체도 많다. 염색업체 쌍호염직은 지난해 초 공장 일부를 대도무역에 매각했다. 올 초에는 본 공장을 제준염직에 매각해 몸집을 줄인데 이어 동산양말 공장을 임대로 전환했다.

사염업체 대동섬유는 올 7월 대영염공에 공장을 매각했고 대도무역도 염색공장을 직물수출 업체인 은성무역에 팔았다. 염색업체 유상실업도 매각되면서 회사주인이 바뀌었다. 유상실업 관계자는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몸집을 줄인 것”이라고 말했다.

섬유업계가 추풍낙엽처럼 흔들리고 있는 건 글로벌 경기침체로 섬유수출경기가 침체됐기 때문이다. 이번에 부도를 낸 업체들은 모두 수출기업이다. 특히 국내업체의 대표 해외시장 터키가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는 게 치명타가 됐다. 터키시장은 한국산 원단을 들여가 봉제한 후 유럽과 중앙아시아 각국에 공급했었다. 하지만 유로와 미국 등 선진국의 섬유소비가 침체를 맞으면서 시장이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섬유수출을 지탱해준 환율도 상황이 좋지 않다. 달러당 1200원에서 1000원대로 하락하면서 원자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대형악재는 또 있다. 미국의 면ㆍ니트 주문이 대거 중국으로 이동했다. 국내업체는 품질ㆍ가격ㆍ배송 등 모든 면에서 중국기업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있다. 홍콩계 중국공장은 홍콩에 본사를 두고 중국에서 설비를 가동한다. 이런 이유로 해외수출에 방점을 찍었던 업체들은 경영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있다.

내수경기가 얼어붙은 것도 섬유업체에겐 악재였다. 섬유업계는 올해 내내 불황에 시달렸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올 상반기 섬유수출은 77억63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79억6200만 달러보다 2.5% 줄었다. 특히 섬유사(실)의 수출실적도 같은 기간 3.9% 줄어들었다.

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부도나 법정관리는 산업계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수년간 잠잠했던 부도기업이 잇달아 발생한 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기 때문이다. 섬유업계는 IMF 전후로 부도대란이 터지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겪었다. 업체들은 저마다 차별화 전략을 세우며 고군분투했다. 덕분에 섬유업계는 안정을 되찾았다.

 
제2의 베가 사태 일어날 수도
그러나 베가의 법정관리 사태는 얘기가 다르다. 한 기업의 고통이 아닌 제2의ㆍ제3의 베가가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업계엔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박진일 제일주름 이사는 “올 들어 수년간 잠잠했던 부도기업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다”며 “업계에서는 하루라도 빨리 섬유공장 정리하고 의류업으로 전환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고 말했다.

문제는 부도업체 대부분이 수많은 거래업체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과 거래하는 영세 업체의 피해는 불 보듯 뻔하다. 업계 내 연쇄 도산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섬유업계는 또다시 제2의 구조조정을 거쳐야 한다.

섬유산업은 그동안 숱한 위기를 돌파해 왔다. 특단의 자구책을 마련해 위기를 넘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라 보인다. 유력 섬유업체의 부도행렬은 심상치 않은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나비의 작은 날갯 짓이 폭풍을 부를지도 모른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 @itvfm.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