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4회

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4회 순신은 미리 준비하여 둔 술과 안주를 올리라 명하여 술잔을 서로 권하여 잔치로 놀게 하고 순신이 손수 술잔을 들어 제장에게 권하며 마음을 합하고 죽기로써 힘써서 사직과 창생을 붙들자고 국가에 대한 성의를 피력하였다. 처음에는 나아가 싸우기를 원치 아니하던 사람들도 죽기로써 싸우기를 자원하였다.
 
임진1592년 4월 29일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시국의 급박함에 관하여 출전의 준비를 회의할 차로 부하 제장을 불러들여 좌수영 파리각璃閣에 모았으니 출석한 관하제장은 아래와 같았다.

좌수영 우후 이몽구李夢龜
순천부사 권준權俊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가리포첨사 구사직具思稷
낙안군수 신호申浩
보성군수 김득광金得光
녹도만호 정운鄭運
흥양현감 배흥립裴興立
광양현감 어영담魚泳潭
사도첨사 김완金浣
발포만호 가장1) 영군관營軍官 나대용羅大用
여도권관 김인영金仁英
군관 급제2) 최대성崔大晟
군관 급제 배흥록裴興祿
군관 전 봉사 변존서卞存緖
군관 전 봉사 김효성金孝誠
군관 정로위3) 이언량李彦良
군관 별시위4) 송한련宋漢連
군관 전 만호 송희립宋希立
군관 전 선전관 정사준鄭思竣
포탄제성도감砲彈製成都監
군관 전 봉사 이설李渫
군관 정로위 이봉수李鳳壽
화약자성도감火藥煮成都監
군관 급제 태귀생太貴生
창검제조도감槍劍製造都監
군관 전 봉사 신여량申汝樑

이상 열석한 제장은 합 24인이었다. 수사 이순신이 정면에 좌정하고 관하 제장이 계급을 따라 좌우로 차례를 좇아 앉았다. 이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청병하는 관문이 온 까닭이었다. 이순신은 부산 동래가 다 함몰이 되었다는 경보를 들은 이래로 부하 제장을 좌수영으로 모아가지고 조정에서 출전하라는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오직 신립과 이일 두 장수만 믿고 있다가 이일이 상주에서 패주하고 신립이 충주에서 전사하고 보니 그만 한성을 버리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달아나 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 조정이라는 곳에서는 아무 명령을 내린다는 정신적 경황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때에 이순신은 헛되이 장계만 올려 출전하기를 자청하고 세월만 보낼 때에 원균의 청병 관문을 가지고 율포5)만호 이영남이 순신에게로 온 것이었다. 사실인즉 청병 관문이 아니라 패주하였다는 보고서와 다름이 없었다. 당시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자기 관하에 속한 가덕 천성 제포6) 안골포7) 영등포8) 옥포 등 제진 변장을 명하여 쳐들어오는 일본수군을 막으라 하였더니 일본수군의 선봉 등당고호 관야정영의 무리 함대와 고성固城 당포9) 앞바다에서 대적하여 싸우다가 원균이 겁을 내어 구하지 않으므로 대패를 당하여 수군 700여인을 상실하였다.

원균이 이 패보를 받고 더욱 창황망조하여 저는 한 번도 싸워볼 뜻이 없던 차에, 바다에 뜬 우리나라 어선의 야화夜火를 보고 적의 병선이 쳐들어온다 하여 자기의 전선 70여척과 많은 군량 군기를 바닷물 속에 침몰시켜 버리고 수군 6000여인까지도 해산시켜 버리고 자기는 혼자 경쾌한 소선 한 척을 잡아타고 박홍 이일 김명원의 무리와 같이 남해도南海島로 달아났다.

 
원균의 부하인 옥포만호 이운룡, 영등포만호 우치적禹致績, 율포만호 이영남 등 몇몇 사람은 상당한 무장으로 조정에서 선발하여 남변南邊에 배치한 인물들이었다. 원균이 달아났다는 말을 듣고 그 뒤를 추종하여 남해도 앞바다에 와서 원균과 서로 만났다. 그중에 이운룡 이영남은 전년 함경도 녹둔도 싸움에서 이순신과 힘을 합해 오랑캐를 격파한 일이 있어서 순신의 용기와 지략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원균이 육지로 올라 도망하려 하는 것을 이운룡이 항언하되 “달아나다니 안 될 말이오. 사또가 나라의 간성이 되는 중한 임무를 받았으니 죽더라도 내 지역 안에서 죽을 것이지 육지로 올라 도망을 하다니 될 말이오. 이곳 노량露梁은 전라 충청 양도로 가는 인후목이니 이곳을 한번 잃으면 양호兩湖가 위태할 것이오. 이제 경상우도의 우리 수군을 사또가 해산시켰다 할지라도 도리어 새로 모으려면 아직 다시 모을 수 있을 것이오. 또 우리 등이 사또를 추종하여 이곳까지 오기는 전라좌도 이순신의 수군을 청병하여 와 우리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며 순신은 족히 믿을 만한 당대 명장이오” 하여 굳세게 주장하는 바람에 원균은 오도 가도 못하고 이운룡이 무서워 그 말대로 하겠다고 승낙하고 원균은 이운룡더러 “군은 과연 순신의 수군을 청해 올 수 있겠느냐?” 하였다. 이운룡은 답하되 “죽는 것도 사양하지 않으려거든 어찌 안 가겠소마는 율포만호 이영남이 더 이순신과 친선한즉 율포를 보내는 것이 가할 것이오” 하였다. 이영남을 파송하고 이운룡은 순신에게 글을 써서 꼭 와야 된다는 뜻을 고하고 이영남더러 사사로 이르기를 “내가 없으면 원균이 필정 달아날 것이오. 원균이 없고 보면 영남 해상은 주장을 잃어버려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니 그런 고로 내가 같이 가지를 못하오” 하였다.

이영남은 전라좌수영에 득달하여 순신을 만나보고 원균의 청병 관문과 이운룡이 쓴 서간을 올렸다.
순신은 보고나서 그것을 토의할 차로 이렇게 군사회의를 소집한 것이었다. 나아가 싸워야 된다는 대장의 호령 한번이면 그만일 듯도 하지만 이때 인심이 나아가 싸우기를 기피하는 때이므로 순신은 관하 제장을 될 수 있으면 자신들로 하여금 나아가 싸우자는 여론을 자발적으로 일으키게 해보자는 계획을 써보는 것이었다.

▲ 이순신은 부산 동래가 다 홈몰이 되었다는 경보를 들은 후 부하 제장을 좌수영으로 모았다. 조정의 출전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사진은 KBS드라마 중 한 장면.
좌석에 모인 제장들은 모두 얼굴에 긴장한 색채를 띠었다. 반드시 무슨 큰 결과를 짓고야 말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신은 우렁찬 목소리로 “제공을 이렇게 모은 것은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우리에게 청병 관문이 왔기 때문이오. 여기 앉은 율포만호 이영남 군의 말에 의하면, 경상우도 수군은 전쟁에 상실된 군사가 700여인이요, 해산시켜서 흩어진 군사가 6000이라 하오. 원균은 병선 70~80척이나 되던 배를 행여나 적군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바닷물 밑에 침몰시켜 버리고 배 한 척을 남겨 가지고 남해 노량 근처에 피하여 와 있다 하오. 부산과 남해간의 수백리 해역은 일본군의 횡행하는 장소가 되었다 하니 어찌하면 될지 참으로 사세가 대단히 중대하니, 제공과 난상협의하여 최선책을 강구 실행하기를 바라오!” 말하고 순신은 눈을 들어 사람들을 둘러본 뒤에 조용하게 착석하였다.

순신의 엄숙한 지시방침의 설명을 들은 제장은 숨까지도 막힌 듯하였다. 한동안 서로 돌아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전란이 가까워 오는 줄은 알았지만 큰 강적이 바로 발부리에 와 닿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편할 이치가 없었던 것이었다.

“사또께 아뢰오!” 말하고 일어선 장수, 신장은 7척이 넘고 목소리 우렁차고 얼굴빛 검은 장수는 녹도만호 정운이었다. 정운은 언성을 높여 “적이 문안에 들어왔거든 치지 않을 수 있소? 국은을 입은 무신이 되어 가지고 앉아서 기다릴 수 있소? 지금 다행히 서남풍이 부니 오늘 밤으로 조수를 따라 본영에 있는 병선을 몰고 달려가 원수사를 구원하는 것이 옳은 줄로 아뢰오” 하는 정운의 그 어조는 강개하고 장렬하였다.

“정녹도의 말이 옳은 줄로 아오” 하는 장수는 키 작지 아니하고 체격과 용모가 당당 준수한 광양현감 어영담이었다. 좌석은 긴장미를 더하였다. “아니오 그렇지 아니하오” 말하고 나서는 장수는 순천부사 권준이었다. 권준은 키 크고 잔나비 팔과 곰의 허리에 무예가 과인한 인걸이었다. 권준의 말은 “경상좌우도의 수군은 워낙 도가 크니만큼 그 수군의 수효가 조선 팔도 중에 제일 많은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싸워보지도 못하고 좌수사 박홍과 우수사 원균의 무리가 다 스스로 무너지고 스스로 도주하였소.

그렇거든 하물며 우리 전라좌도의 외롭고 약한 수군 형세로는 출병한다 하더라도 승승장구하는 강적 앞에서 승산이 만무하니 승산 없는 진전을 하는 것이 우매한 일일 것이오. 그뿐 아니라 우리 호남이 각기 맡은 경계가 있은즉 내 구역 안을 버리고 남이 맡은 구역으로 구원을 나갔다가 만일에 불행한 일이 있다하면 조정의 죄를 면할 수 있겠소?” 하며 말을 조리 있고 유창하게 도도한 강물이 흐르듯 하였다. “아니오.” 하고 한편에서 나서는 장관은 그는 본 좌수영 대솔군관 전 지도智島만호 송희립이었다.

우렁찬 목소리에 신장은 8척이며 이마와 광대뼈가 내어 밀어서 범상치 아니한 장사의 기운이 당당하여 정운과 어영담 두 사람과 방불한 인걸이었다. “여보, 순천영감! 영감의 말씀은 청종할 수는 없소. 영남이거나 호남이거나 한가지로 우리나라의 영토니, 우리가 우리나라의 영토를 지키는 무신이 되어 영남이 스스로 무너지고 스스로 도주하였다고 우리는 수수방관만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소? 또 영남과 호남이 실낱같은 섬진강 하나로 접경하여 순치脣齒의 관계가 분명하니, 영남을 지켜내지 못한 금일에 호남만을 지키려 함은 마치 적이 문안에 들어왔거든 나는 방안만을 지키려 함이나 다름이 없으니 말이 되오? 또 조정의 명령이 없다 하거니와, 지금은 이일과 신립의 무리 육로 장수들이 다 실패하는 바람에 적병이 중로에 가득하여 통로가 끊어졌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찬 무리들이 당파싸움과 자기네의 세력 신장하기만 하는 무리뿐이니 우리 수군을 알기를 없는 듯이 생각하고 있소. 그러니 설사 조정의 분부가 없다 하더라도 대적이 문에 닥치면 변경의 장수가 되어 선참후계先斬後啓하는 것이 당당한 일이요, 또 용병하는 법은 신속함을 귀하게 여겼으니 사또께서는 아까 정녹도의 말씀대로 이 밤으로 행선 출정하시도록 분부하시기를 바라오!” 하였다.

송희립의 말을 들은 여러 장수들은 그의 나라에 대한 충의와 불이 타오르듯 한 열성에 감동하였다. 그러나 좌중에 앉은 수령이며 변장들 중에는 일본군이 무섭다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은 사람이 적지 아니하여 좌중 형세만을 관망하고 앉았을 따름이었다. 대장인 수사 이순신은 양편의 논전만 듣고 말이 없었다. 순천부사 권준 우후 이몽구를 중심으로 지키자는 파와 녹도만호 정운 군관 송희립을 중심으로 나아가 싸우자는 파가 대립하여 서로 자기네들 편으로 수사 이순신의 마음을 끌어오려고 하는 심리로 격렬한 논전이 일어나 몇 시간을 계속하였다.

정운이 자리를 차고 일어나서 “사또! 소인은 물러가오. 소인은 녹도로 돌아가오. 적병이 문전에 온 이때에 밤이 새도록 논전만 하고 있는 이런 자리에는 소인 같은 성급한 사람은 있을 곳이 아니오. 소인 물러가오!” 하고 자리를 떠나 나간다.

▲ 임진 1952년 5월 1일부터 각하 각처의 병선이 차차로 좌수영 앞바다로 모여들었다. 사진은 KBS드라마 중 한 장면.
좌수사 이순신이 호상에서 벌떡 일어나 그 팔척장신의 건장한 몸에 긴 팔뚝을 내어 밀어 정운의 손을 잡으며 “여보, 녹도! 이리 앉으오. 내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러한 장렬한 말을 들으려고 하던 것이오. 국가의 존망이 우리 무신에게 달렸으니깐” 하였다. 우후 이몽구 순천부사 권준 이하로 모든 사람들은 수사의 행동에 대하여 다 긴장감을 띠고 주시하였다. 순신은 다시 허리에 찼던 큰 칼을 쭉 빼어 들었다. 서릿발 같은 긴 무지개 한줄기가 일어났다. 이 칼은 중량이 보통 환도와는 다르다. 보통 군관의 환도는 대략 12근 이상이 별로 없었다. 이 칼의 중량은 20근이나 되는 7척 대도였다. 이 칼에는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10)이라는 여덟 자를 새긴 명도였다.

손에 큰 칼을 빼어 든 순신의 두 눈에는 형형한 광채가 일어나 사람을 향하여 쏘았다. 순신은 언성을 높여 “우리 모든 사람은 국록을 받고 국은을 입었으며 황차 난세를 당한 국가의 무신이 되어 나라를 위하여 어찌 싸우러 나가지 아니하리오! 장령이 한번 내리면 비록 부탕도화11)라도 할 것인즉 장령을 어기는 사람은 이 칼로 베리라! 5월 초 3일의 밤 조수가 들기까지 제공은 각기 병선 군사 병기 군량을 단속하여 본 좌수영 앞바다로 모여서 명령을 듣게 하오. 만일에 시기를 어기는 자에게는 군법이 엄할 것이오” 하고 선언하였다.
순신은 분육의 용기가 있는 줄을 제장은 잘 알고 두려워한다. 범 같은 울지내와 니탕개 등도 한칼에 벤 명장이다. 조정에서 특별히 추천하여 일방의 대장인 좌수사가 된 것까지도 제장들은 다 잘 안다. 그 힘차고도 엄숙한 명령에 좌중은 고요하였다. 제장들의 몸에는 소름이 끼치고 머리카락은 하늘을 가리켰다. 제장 일동은 일어나서 각기 칼을 빼어 들어 맹세하고 군령판軍令版에 이름을 적어 표시하였다.

순신은 미리 준비하여 둔 술과 안주를 올리라 명하여 술잔을 서로 권하여 잔치로 놀게 하고 순신이 손수 술잔을 들어 제장에게 권하며 마음을 합하고 죽기로써 힘써서 사직과 창생을 붙들자고 국가에 대한 성의를 피력하였다. 처음에는 나아가 싸우기를 원치 아니하던 사람들도 순신의 성의에 감동을 받아 나아가 죽기로써 싸우기를 자원하였다. 임진1592년 5월 1일부터 관하 각처의 병선이 차차로 좌수영 앞바다로 모여든다. 순신이 진해루鎭海樓에 올라 앉아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흥양현감 배흥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러 병기를 강론하였다. 순신은 그날 일기에 이 장수들의 이름을 기록하고는 다 분격하여 자신을 잊는 것을 보니 천하의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고 하였다.

2일에 군관 송한련이 경상도의 남해도를 염탐하고 달려와서 그 정황을 알렸다. 그날 일기에 “군관 송한련이 남해로부터 돌아와 보고하되 남해현령, 미조항12)첨사, 상주포13) 만호, 곡포14) 대장,15) 평산포16) 권관 등이 적병이 온다는 소식을 한번 듣고는 바로 달아나서 그 병장기 등이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한즉 경상도 연안의 상황은 놀랍고 놀랍다”고 기록하였다.

3일에 중위장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을 불러 내일 새벽에는 영남 바다로 출전하기로 약속을 정하였다. 이날에 여도진 수군 황옥천黃玉千이 도망하여 제 집에 가 숨은 것을 잡아다가 목을 베어 효시하여 사람들에게 경계하였다. 군법은 참 엄숙하여 일푼 용서가 없었다.

5월 4일 이른 새벽이 되어서 이순신이 수군함대를 통솔하고 출발하였다. 동쪽 하늘이 붉으려 할 때에 세 발의 대포 소리를 군호로 하여 대소 합 86척의 병선이 일제히 돛을 달고 뱃머리를 동으로 향하여 출발하니 기고가 당당하였다. 수로를 잘 알고 성실하고도 용감한 광양현감 어영담으로 지로선봉장指路先鋒將을 삼고, 중위장의 하나인 순천부사 권준은 감사 이광의 부름으로 전라감영에 가고 없기 때문에 방답첨사 이순신과 가리포첨사 구사직으로 중위장을 삼고, 낙안군수 신호와 보성군수 김득광으로 좌우부장을 삼고, 흥양현감 배흥립과 녹도만호 정운으로 전후부장을 삼고, 사도 첨사 김완으로 우척후장을 삼고, 여도 권관 김인영으로 좌척후장을 삼고, 군관 급제 최대성으로 한후장17)을 삼고, 군관 급제 배흥록으로 참퇴장18)을 삼고, 군관 이언량으로 돌격장을 삼고, 군관 신여량으로 귀선장을 삼고, 우후 이몽구는 본영을 지키게 하였다. 병선의 종별과 수효는 아래와 같다.

판옥대맹선 24척 승선 장졸 3130여명
협판중맹선 15척 승선 장졸 730여명
포작소맹선 46척 승선 장졸 1380여명
총계 85척 5400여명

한편, 일본 수군은 구귀가륭 등 여러 장수가 탄 병선 500여 척은 부산, 김해, 양산, 명지도, 가덕도, 거제도 등의 곳에 나눠 정박하여 경상도 연안 각 관포와 좌, 우 수영은 다 적군의 그림자도 보기도 전에 적선이 온다는 소문만 듣고 달아나기만 일삼았다. 대소 공관이며 여사가 일제히 비어 남해도 동쪽은 집에 불 때는 연기가 없었고 창고는 문이 다 열려있었다. 수군과 육군의 모든 장수들이 하나도 항거해 싸우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달아나기만 생각하는 장수는 적군이 오기만 하면 손바닥을 뒤집듯 쉽사리 함락당하기 마련이다. 원균이고 박홍이고 이각이고 이일이고 김명원이고 이양원이고 할 것 없이 다 도망하고 말았다. 싸운다는 것은 어떻게 무서웠던지 일본군만 온다 하면 달아나기가 제일 상책이던 터였다.

 

1) 가장假將 : 싸움터에서 어느 장수의 자리가 비게 될 경우 주장主將의 명령에 따라 임시로 그 자리를 대신하던 장수.
2) 급제及第 : 과거 급제 후 아직 벼슬을 받지 않은 사람.
3) 정로위定虜衛 : 조선 중종 7년(1512)에 처음 설치되어 광해군 무렵까지 존속한 병과. 지배신분층이면서도 현직을 가지지 못한 부류, 특히 한량들의 병역을 필하게 하고, 고급 군사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선발 조직하였다. 한때 정로위 1인이 일반병사 10인을 능가한다고 할 정도로 우수성이 인정되었다. 참고로, 성종 11년(1480)에 북경 방비를 위해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정로위와는 무관하다.
4) 별시위別侍衛 : 양반의 자제들 중에서 뽑아 만든 장교 부대.
5) 율포栗浦 :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율천리. 그 후 여기 있던 율포보는 현종 때(1664) 가배량加背梁의 우수영으로 옮겼다가 숙종 때(1688) 거제시 동부면 율포리로 옮겼으며 고종 때(1889) 통제영과 함께 철폐되었다.
6) 제포薺浦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제덕동(행정동으로는 웅천동)에 있던 포구. 내이포乃而浦라고도 했음. 동래 부산포釜山浦, 울산 염포(鹽浦 : 경남 방어진方魚津과 장생포長生浦 사이)와 함께 세종 때 왜인들의 왕래를 허가한 3포의 하나.
7) 안골포安骨浦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안골동(행정동으로는 웅동2동).
8) 영등포永登浦 : 경남 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9) 당포唐浦 : 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
10)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떠는도다.
11) 부탕도화赴湯蹈火 : 끓는 물이나 뜨거운 불을 밟고 건너간다는 뜻. 힘들고 괴로운 일을 말함.
12) 미조항彌助項 : 경남 남해군 미조면 미조리.
13) 상주포尙州浦 : 경남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14) 곡포曲浦 :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
15) 대장代將 : 남의 책임을 대신하여 출전한 장수.
16) 평산포平山浦 : 경남 남해군 남면 평산리.
17) 한후장後將 : 후미를 지키는 역할을 맡은 장수.
18) 참퇴장斬退將 : 후퇴하는 군사를 처벌하는 역할을 맡은 장수.
19) 배도裴度 : 당 헌종憲宗 때의 명재상으로, 당시 회서淮西 지방의 채주 자사蔡州刺使로 있던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3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았다. 이에 헌종 12년(817) 7월, 조정에서는 배도를 회서 초토사淮西招討使로 삼아 토벌케 하였더니 3개월 만에 난이 평정되었다. 배도는 그 공로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졌다. 만년에는 환관의 발호에 환멸을 느끼고 은퇴한 뒤에 녹야당綠野堂이라는 별장을 짓고서 백거이白居易•유우석劉禹錫 등과 풍류를 즐기다가 세상을 마쳤다.
20) 강좌江左 : 양자강 하류의 동쪽 지역. 강동江東지방.
21) 관중管仲 : 관중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 환공桓公의 명재상으로 이름은 이오夷吾인데, 환공桓公을 도와 부국강병에 힘썼고, 제후諸侯를 규합하여 환공을 오패五覇의 으뜸이 되게 하였다.
22) 좌임左 : 옷깃의 왼쪽을 위로 오게 하는 것으로 중국의 변방의 풍속이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관중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관중이 없었다면 나는 산발散髮하고 좌임을 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23) 조적祖 : 서진西晉 때에 북방 민족들이 중국을 쳐들어와서 한족은 양자강 남쪽으로 피난하여 동진東晉을 새로 건국하였다. 그리고 다시 양자강 이북을 차지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였는데, 그 앞장에 나선 사람이 조적이었다. 조적은 중원의 회복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서 군대를 이끌고 양자강을 건너갈 적에, 비분강개한 심정으로 뱃전을 치며 “중원을 평정하지 못하고서는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겠다”고 맹세한 고사가 있다.
24) 온교溫嶠 : 온교는 동진東晋 원제(元帝 : 사마예 司馬 睿) 때의 명신으로 소준蘇峻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게 되었는데, 이때 소준의 죄상을 낱낱이 열거하자 7000 군사가 눈물을 뿌리며 배에 올랐다는 기록이 『진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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