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5회 ②

▲ 순신이 제장을 상선上船으로 불러 모아놓고 친히 술을 부어 금일 승전의 제장의 충용을 위로하고 삼군을 배불리 먹여 전승 축하의 기쁨 속에 밤을 지냈다. 사진은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중 한장면.
이신동이 말하였다. “완전한 승리를 하시고 하니 참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보는 대승첩이오. 소인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부지하다가 우리 장수가 승천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소?”하고 순신을 향하여 무수히 절하였다.

순신은 전승한 자리에 밤을 지내는 것이 옳지 못하다 하여 영등포 앞바다로 몰려와 진을 치고 군사로 하여금 나무를 하고 식수를 길어 밤을 지내려 할 즈음에 신시 말이나 되어서 바다에 적의 대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척후장의 보고가 있었다.

갑옷을 벗고 쉬려 하던 차에 이 보변을 듣고 순신은 곧 제장에게 영을 내려 적을 파한 후에 모아 자기로 하고 적선을 추격하라 하였다.

비록 옥포 싸움에 몸이 피곤하지만 금일 승전에 기세를 얻은 장졸은 의기충천하여 함성을 지르며 배를 몰고 황혼이 가까운 때에 바다의 물결을 차고 풍우같이 적선을 쫓았다.

적선 5척은 힘을 다하여 싸우면서 도망하여 웅천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그 일본군은 당황하고 겁내어 병선을 버리고 육지에 뛰어내려 도망해 버렸다.


다정하고 의를 중히 여기며 부하를 보살피고 충성을 권하는 심지를 가진 이는 이순신 공이었다. 이운룡을 위하여 옥포의 적을 먼저 격파하고 또 우치적을 위하여 영등포의 적을 쫓아내 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 양인은 그 성곽과 민중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순신은 전령하되 “싸운 자리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는 병가에서 삼가야 할 일인즉 곧 행선을 재촉하라” 하여 함대를 몰고 창원昌原 지방 남포1) 앞바다에 와서 진을 치고 순신이 제장을 상선上船으로 불러 모아놓고 친히 술을 부어 금일 승전의 제장의 충용을 위로하고 삼군을 배불리 먹여 전승 축하의 기쁨 속에 밤을 지냈다.

▲ 총체극 '옥포해전과 불멸의 이순신'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승전무를 추는 장면.
이튿날은 5월 8일이다. 조반도 먹기 전에 진해鎭海 지방 고리량2)이라는 데서 적선이 유진하고 있다는 보고가 왔다. 순신은 곧 영을 내려 배를 재촉하여 함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 동서로 행진하여 양편으로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저도3)를 지나 고성지방 적진포4) 앞바다에 이르니 적의 병선 13척이 바다 어구에 한 줄로 늘어서고 적군은 반은 마을에 내려가 재물과 부녀를 노략질하고 집에 불 지르고 배에는 반 정도 남아 있다. 그러하므로 싸움은 힘들지 아니할 것 같다.

순신이 탄 상선에서 북을 울려서 나가 싸우기를 재촉하였다. 낙안군수 신호 순천대장代將 유섭이 동력하여 적의 대선 1척을 깨뜨리고, 낙안군 급제 박영남朴永南, 보인5) 김봉수金鳳壽 등이 합력하여 대선 1척을 깨뜨렸다.

화전과 천•지•현자의 각양 대포의 위력 하에 모조리 깨뜨려 불살라 버린6) 뒤에야 아침밥을 먹고 휴게하는 중에 웬 사람 하나가 등에 어린아이를 업고 산으로부터 울며 내려와서 함대를 향하여 하소연할 것이 있는 모양을 보인다.

순신은 종선을 보내어 그 사람을 태워 오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순신의 앞에 와서 더욱 슬퍼 울었다. 아비가 우는 모습을 보고 등에 업힌 어린것도 울었다.

성명이 무어냐고 군관이 묻는 말에 그 사람은 “소인은 적진포 근방에 사는 백성이옵고 성명은 이신동李信同이라고 하오” 한다. 그제는 순신이 “그래 무슨 말이 있어서 왔는가?” 하였다.

이신동은 사또께서는 주사7)를 거느리시고 멀리 오시와 어제부터 거제도에서 적선 백여척을 깨뜨리시고, 웅천에서도 승전하였소, 여기 적진포 앞바다에서도 저렇게 완전한 승리를 하시고 하니 참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대승첩이오. 소인이 오늘날까지 목숨을 부지하다가 우리 장수가 승전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기쁜 일이 어디 있소? 소인은 죽어도 여한이 없소. 대체 어떠하신 양반인가 한 번 뵈옵고 이런 하소연이나 할 생각으로 사또께 찾아왔소” 하고 순신을 향하여 무수히 절하였다.

그 모양이 하도 정성스럽고 측은하여서 보는 장졸들도 다 감동하였다. 순신은 또 “적병이 그동안에 어찌 하였느냐?” 하며 그 백성의 찬양하는 말을 막고 적병의 행동을 탐문하였다. 

이신동은 “예, 적병이 어제 이 포구에 들어왔소. 포구에서 여염으로 돌아다니며 재물과 가축을 약탈해서 지금에 사또께서 불살라 버리신 배에 갈라 싣고 소를 잡고 술을 먹고 소리를 하고 피리를 불고 밤새도록 하였소. 그리고 오늘 아침에 반은 배를 지키고 반은 뭍에 내려서 고성읍내 방면으로 싸움하러 갔소. 소인은 노모와 처자를 데리고 적에게 쫓겨 길에서 서로 잃고 갈 바를 알지 못하여 이같이 하소연하오” 하였다.

순신이 측은히 여겨 “네가 여기서 있다가는 적이 되돌아오면 죽을지도 모르니 나와 같이 가는 게 어떠하냐?”고 하였다.

▲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해전승리를 기념해 건립한 거제도 옥포해전기념관.
이신동은 이마를 조아리며 절하고 “적을 파하신 사또의 은택은 잊을 수가 없으나 노모와 처자의 간 곳을 모니 소인은 혼자 사또를 따라갈 수가 없소. 이제는 적이 거의 죽었으니 찾아보아야 하겠소” 하고 어린것을 등에 다시 업고 하직을 고하고 배에서 내려갔다.

순신은 제장을 돌아보며 “이신동의 처지를 보니 제공의 소감은 어떠한가?”고 하였다.

제장들은 그것을 본즉 더욱 가슴이 아파서 서로 격려하여 한마음으로 힘써 적을 토벌할 것을 다짐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순신은 곧 주사를 몰고 천성 가덕 부산 등지로 가서 적의 소굴을 복멸8)할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아직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가 오지 아니하였은즉 미약한 힘을 가지고 혼자서 적의 근본인 부산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시기상조한 일이라 하여 거제읍 앞바다에 와서 진을 치고 이억기의 주사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이억기는 젊은 장군으로 족히 믿을 만한 명장인 줄을 순신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마침 이때에 문득 본영의 탐보선이 달려와서 전라도사 최철견崔鐵堅의 서간을 올렸다.

그 서간에는 4월 그믐에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관서지방으로 몽진하였다는 내용을 보고 순신은 엎드려 통곡하였다. 군중 모든 장졸이 이 소문을 듣고는 북향하여 통곡하기를 마다하지 아니하였다.

한성이 함락이 되고 도원수 김명원과 유도대장 이양원 등이 다 패주하였다는 데 이르러 이제는 다 망했구나 하는 격동을 준 것이었다. 순신은 심사가 답답하고 비참하여 전군에 영을 내려 본영으로 돌아가게 준비를 하라 하였다.

이때 이공이 한성 함락의 소식을 듣고 선조가 파천한 노고와 백성의 도탄을 생각하매 비분강개한 마음에 오장이 무너져 찢어지는 듯하여 그로 인해 회영하였다 하나, 그때 사정으로 미루어본대도 회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로 적을 찾아다니며 싸워야 하는 부하 장사의 노고를 잠시라도 위안 휴양코자 함이요, 둘째로 장차로 이억기의 함대와 병력을 합하여 일본군의 본거가 되는 부산을 소탕하기를 헤아린 것이요, 셋째로 관서방면으로 즉시 달려가 낭패 위급에 빠진 왕실을 호위하여 볼까 하는 충정을 품은 까닭이었다. 이 세 가지 심산 하에서 회군한 것일 듯하다. 이 세 가지는 이공이 일찍 그 부하 요인에게 말한 때문에 이렇게 설명한다.

순신에게는 또 한 가지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적군이 진주 하동河東을 육로로 지나서 섬진강을 건너는 길과, 함양咸陽 안음安陰으로 하여서 남원南原에 들어오는 길과 충청도를 거쳐서 전주에 들어오는 길이 세 길이 있었다.

 
만일에 진주와 남원과 전주가 무너지지 아니한다면 순신은 주사를 연합하여 부산의 적굴을 소탕할 계획을 가졌던 것이었다.

5월 9일에 순신은 주사를 몰고 영남 제장과 작별하고 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처음으로 옥포 영등포 웅천 적진포 등 여러 곳의 대승첩이 있은 뒤로 이 소문이 사방으로 크게 전파하였다.

일본군이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로는 조선군은 연전연패하여 일본군이라 하면 호랑이 떼와 같아서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는 줄로만 알았더니 이순신의 이 연전연승이 있고 난 뒤에는 조선 사람에게 큰 힘을 넣어 주었다.

200여 년이나 난리라는 것을 보지도 못하다가 졸지에 천하의 막강한 적을 만나 당해 내는 장수가 없어서 달아나기만 힘쓰다가 이 옥포승첩 이후로 그렇게 강한 일본군으로도 충의용략 앞에는 패하는 수 있다 하여 창의9)하고자 하는 사람은 큰 기운을 얻어서 각처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적군에게 항복하였던 사람은 이 소문을 듣고 우리 조선에도 영웅이 있다 하여 회심하였다. 보라.

함안군수 유숭인은 이순신의 함대가 옥포 기타 각 관포에서 연전연승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의분이 분발하여 병마 천여기를 모집하여 함안에서 궐기하였다.

곽재우는 의령宜寧 땅에 사는 거부인데 신장이 팔척이요 지용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일찍 조정에서 장수감으로 거론되기도 하여 이순신 김시민과 더불어 이름을 날렸다.

장차 대란이 일어날 줄 알고 자기 집에 하인 800명을 두었다. 이제 적군이 고을을 연달아 함락하자 곽재우는 동지 정기룡鄭起龍 박의장 등과 더불어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나 재산을 풀어 군사를 모집하여 용사 심대승沈大升 등을 얻어 사생을 같이하기로 맹세하였다.

이순신이 승전한 뒤를 타서 기병하여 각 군에 출몰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며 많은 적이 오면 피하고 소수의 적이 오면 유격하였다.

전 현감 조헌은 호는 중봉이니 이순신과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었다. 조헌이 일찍 전라도사로 있을 때부터 영서가 서로 비추던 사이다. 이 대란을 당함에 의분이 들끓어 그의 문도인 김절金節 박충검朴忠儉 등과 더불어 사람들 수백명을 모집하여 의기를 들고 일어나 충청도 보은報恩 차령車嶺의 험애한 곳에 웅거하였다.

경상도 곤양昆陽 출신 정기룡은 우로방어사 조경을 찾아보고 적을 막을 방략을 말한즉 조경이 기뻐하여 별장을 삼았다.

거창居昌 땅에서 적군 500여 명을 격파하고 또 조경을 따라 금산金山의 적을 치더니 김천역金泉驛에서 5급을 베고 돌아왔다.

정기룡은 힘이 대단하여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기가 있고 또 천리마를 타고 나는 듯 횡행하니 적의 장졸들은 다 두려워하여 정기룡을 가리켜 비장군飛將軍이라고 불렀다 한다.

정기룡은 체격이 웅장하여 신장이 8척이요 눈빛이 별과 같으며,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에서 무덤을 지킴으로 효도를 다한 인물이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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