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conomovie] 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던바 중위는 진절머리 나는 남북전쟁의 동부전선을 떠나 인디언 전쟁 중인 세즈윅 요새에 홀로 부임한다. 우범자들이 득실대는 동네 외진 파출소에 홀로 부임한 파출소장 꼴이다. 어이없는 발령이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날 미국의 입장에선 그 지역의 ‘조폭’ 격인 수우족 인디언들이 ‘세즈윅 파출소’를 찾아온다.

‘새로운 사실’을 접하려면 보수는 진보신문을 접하고, 진보는 보수신문을 접해야 한다. 하지만 보수는 악착같이 보수신문만 보고 진보는 악착같이 진보신문만 본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새로운 사실’을 접하려면 보수는 진보신문을 접하고, 진보는 보수신문을 접해야 한다. 하지만 보수는 악착같이 보수신문만 보고 진보는 악착같이 진보신문만 본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던바 중위는 인디언 전쟁 중인 세즈윅 요새에 부임한다. 전쟁 영웅치곤 초라하면서도 위험한 발령이다. 세즈윅 요새 주변에 미국과 전쟁 중인 수우족 인디언들이 득실거려서다. 그러던 어느날 수우족 인디언들이 세즈윅 요새에 찾아오고, 던바 중위의 커피 대접을 받는다. 

수우족 인디언이 별문제 없이 돌아간 뒤 던바 중위는 근무 일지에 그들의 방문을 적고, 말미에 ‘발로 차는 새’를 지칭해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인디언은 잘생겼다(good looking)’고 기록한다. ‘반역’의 기미가 엿보인다. 누구도 싫거나 적대적인 상대를 ‘잘생겼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아무리 잘생겨도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거나 ‘느끼하게’ 생겼다고 표현하게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군 병사들은 일본인을 ‘원숭이’로 묘사했다. 일본인 중에도 ‘잘생긴’ 일본인이 없을 리 없건만 적어도 미군에게 잘생긴 ‘원숭이’는 한 마리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원숭이는 원숭이일 뿐이다. 오다기리 조(일본 배우)를 보아도 감히 그를 잘생겼다고 느껴서는 안 된다. 

김일성도 ‘가치중립적’으로는 분명 ‘잘생긴’ 얼굴이지만 그를 미남이라고 하면 ‘문제적’이다. 적을 ‘잘생겼다’고 느끼는 것은 곧 그에게 적개심이 없다는 고백이다. 김일성의 얼굴에서는 ‘악마’를 느껴야 한다. 수우족의 지도자 ‘발로 차는 새’도 직감적으로 자신들을 적대시하지 않는 특이한 백인 던바 중위에게 적개심을 내려놓고 대한다. 그렇게 그들은 조금씩 소통하고 신뢰를 쌓는다.

던바 중위와 ‘발로 차는 새’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친구가 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던바 중위와 ‘발로 차는 새’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친구가 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던바 중위와 ‘발로 차는 새’의 관계 맺기는 던바 중위와 세즈윅 요새 주변을 맴돌던 들개 ‘흰 발’이 맺어가는 관계와도 같다. 

들개 ‘흰 발’은 자신을 보기만 하면 총질을 해대는 백인과는 달리 자신에게 육포 한 점을 건네는 던바 중위에게 경계심을 풀고 다가가기 시작해 서로 의지하는 ‘친구’가 된다. 들개와 친구처럼 어울리는 던바의 모습이 곧 그의 정체성인 그의 이름 ‘늑대와 춤’이 된다. 던바 중위에게 ‘늑대와 춤’이라는 인디언 이름을 붙여준 것은 ‘발로 차는 새’다. 

아마도 늑대와 어울리는 던바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저런 백인이라면 자신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던바 중위나 ‘발로 차는 새’는 상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대했기에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독일의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사회심리분석은 흥미롭다. 우리는 사람들이 신문과 뉴스를 보는 이유를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세상이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는 고정관념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기 위해서라고 분석한다. 따라서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뉴스’를 접하면 불안해지고 불쾌해하거나 믿지 않으려 든다. 

그것을 ‘가짜뉴스’로 치부하거나 혹은 그 기사를 쓴 기자를 ‘기레기’로 매도하기도 한다. ‘새로운 사실’을 접하려면 보수는 진보신문을 접하고, 진보는 보수신문을 접해야 하지만, 보수는 악착같이 보수신문만 보고 진보는 악착같이 진보신문만 본다. 그래야 속 편하다. 속은 편하겠지만 서로 ‘확증편향’만 공고화될 뿐이다. 서로의 고정관념이 완화되거나 변화해 접점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각 진영은 요즘 진영을 대변하는 신문만 보는 듯하다. 그러니 확증편향이 커질 수밖에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각 진영은 요즘 진영을 대변하는 신문만 보는 듯하다. 그러니 확증편향이 커질 수밖에 없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던바 중위나 ‘발로 차는 새’는 모두 상대진영의 신문을 구독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지닌 용기 있는 인물들이었기에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정관념을 깰 수 있는 정말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신문을 구독할 만한 인물들이었기에 ‘새로운 친구’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수많은 ‘고정관념’을 안고 살아간다. 각자 형성된 ‘고정관념’의 근거도 무척이나 다양하다. 학습효과일 수도 있고, 우연한 한두번의 경험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간접경험도 있고 직접경험도 있다. 모두가 자신들의 고정관념이 ‘절대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인정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자신들의 고정관념들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자신의 고정관념에 반하는 사례들이 아무리 많이 발견돼도 기존의 고정관념은 끊어지지 않고 탄력성 좋은 고무줄처럼 악착같이 늘어나기도 한다.

‘고정관념’에서 용기 있게 벗어난 던바 중위와 ‘발로 차는 새’는 서로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던바 중위와 늑대도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혹시 우리가 주변에서 혹은 나라 안과 밖에서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에 수많은 좋은 기회와 좋은 친구들을 놓쳐버리거나 밀어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적이라도 잘생긴 건 잘생겼다고 하자.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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