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19회

순신은 함대를 좌우 양익으로 2부대를 갈라 가지고 가덕 천성을 거쳐 동래 땅 몰운대 등지를 나아가 수색하였으나 적선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 기방 사람들에게 물은즉 이곳저곳에 터를 잡고 있던 적의 수군들이 그동안 자기네의 함대가 연전연패하여 죽기가 바빴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겁을 집어먹고 부산 본영으로 달아났다고 고하였다.

 

이때에 경상우수사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과 미조항첨사 김승룡 등이 이른 새벽녘에 배를 타고 달려와서 이순신 이억기의 승전하고 난 싸움터에 물에 빠져 죽은 적병의 시체를 건져 목을 잘라가지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하고 눈이 벌겋게 다투어가며 함께 적과 싸우던 의리도 집어치우고 50급이나 얻어가지고 의기양양하게 뱃머리를 돌려나갔다.

이것은 싸워서 적의 수급을 베었다고 나라에 거짓 장계를 올려 공을 세웠다고 할 계획이었다.[누구를 속이느냐? 하늘을 속일 셈이냐?]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적선을 수색하여 선두에 방이 있고 그 방안에 사람의 성명을 적은 발기發記를 얻었다. 성명 밑에는 모두 혈흔이 있다. 기명된 사람은 3000여 명이었다. 아마 피를 내어 서로 맹세한 것인 듯하다. 이 발기 외에도 갑주와 창검과 궁시와 조총과 표피豹皮와 마안馬鞍 등이 무수하였다.

이순신李純信은 이 각종 전리품을 봉하여 대장인 이순신에게 바쳤다.

싸우고 난 다음날인 6월 7일 아침에 웅천 증도1) 바다에 이르러 진을 치고 탐망선을 보내어 천성 가덕 등지의 적의 종적을 두루 염탐하게 하였다.

탐망선 선장 진무 이전李筌과 토병 오수吳水 등이 적병의 수급 둘을 베어가지고 돌아왔다.

▲ 순신의 공격에 일본수군은 물에 빠져 죽는 등 섬멸됐다.

그들의 보고하기를 “소인들이 가덕 바다로 갈 때에 어떤 배 한 척에 적병 3인이 함께 타고 오다가 소인들의 배를 보고 북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추격하여 잡아서 3인을 다 싸워서 베었으나 그중에 수급 하나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군관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수급 둘만 가지고 온 것입니다” 하며 분연하여 “경상우수영 놈들은 산 적병을 보면 무서워서 하나도 못 잡는 놈들이 죽은 적병의 머리 주워 모으기만 할 줄 아나 경칠 놈들!” 하고 떠들어 원균을 원망하였다.

순신의 전승에 달아난 적군

순신은 분부하되 말을 삼가라고 엄명하고 이전과 오수 등에게 술과 음식을 먹게 하고 다시 천성을 가서 적군의 종적을 더 알아오라고 명하였다.

대개 일본수군의 기의 색깔은 서로 달랐다. 전일 옥포의 적은 적기요, 사천의 적은 백기요, 당포의 적은 황기요, 이번 당항포의 적은 흑기인 것이 그 사연을 좇아 본다면 아마 부대를 나누어 전후좌우와 또는 중앙으로 표지함인 듯하다고 순신은 말하였다.[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중황의 뜻이다]

순신은 함대를 몰고 거제도 영등포 앞바다에 다다랐다. 영등포에서는 부산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어서 멀지 않았다.

선봉선으로부터 적선이 보인다고 마황기를 들었다. 과연 돛을 단 대선 3척과 중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서 부산을 향하여 달아난다. 이편에서는 바람을 거슬러 노를 재촉하여 적선을 따라잡았다. 그 적선들은 창황망조하게 배에 실었던 군량과 병기 화약 등을 물에 내버렸다. 아무리 하여도 죽음을 면치 못할 줄을 자각한 때문이었다.

 

우후 이몽구가 용기 있게 앞서 나가 대선 1척을 점령하고 적수 7급을 베고 또 1척을 불사르고, 사도첨사 김완이 대선 1척을 바다에서 빼앗고 머리 20급을 베고, 녹도만호 정운이 대선 1척을 점령하고 머리 9급을 베고, 광양현감 어영담과 가리포첨사 구사직이 동력하여 중선 1척을 불사르고, 구사직이 적수 2급을 베고, 여도권관 김인영이 머리 1급을 베고,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소맹선을 타고 적선중으로 돌입하여 머리 2급을 베고 중선 1척을 탈취하여 불살라 버렸다.

적병은 물에 빠져 죽고 목을 베어 죽고 하여서 섬멸이 되고 오직 중선 1척은 빠져 달아났다.2)

제장들이 끝까지 추격하려는 것을 순신은 징을 울려 군을 거두었다. 이것은 우리 병위가 어떠하다는 것을 부산의 적굴에 전파하라는 뜻이었다.

순신은 함대를 좌우 양익으로 2부대를 갈라 가지고 가덕 천성을 거쳐 동래 땅 몰운대3) 등지를 나아가 수색하였으나 적선의 그림자도 없었다. 그 지방 사람들에게 물은즉 이곳저곳에 터를 잡고 있던 적의 수군들이 그 동안에 자기네의 함대가 연전연패하여 죽기가 바빴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 겁을 집어먹고 부산 본영으로 달아났다고 고하였다.

초저녁이나 되어 거제 송진포4)로 돌아와 밤을 지내고 이튿날인 8일에 창원 마산포 안골포 제포 웅천 등지에 탐망선을 보내어 적의 종적을 염탐하였더니 탐망선들이 다 돌아와 적군의 그림자도 없다는 보고뿐이었다.

이제는 어찌 할까, 적의 소굴이 되는 부산을 칠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정운 어영담 같은 기개 있는 장수들은 이 길로 부산의 적의 근거지를 쳐 무찌르자고 주장하였으나 순신은 제장에게 그렇지 못한 이유를 설명하였다.

부산 공격의 불가함을 설명

▲ 순신이 본영인 좌수영에 돌아왔을 때 수많은 백성이 몰려들었다.

첫째로 지난 5~`6일 동안에 거의 하루도 쉴 사이 없이 큰 싸움을 여러 곳에서 계속하여 사졸의 예기가 피폐하였으며, 군량도 배에 실은 것은 다하여 가는데 경상도 연해에서는 식량의 운송 길을 지금 형편에 구하기 몹시 어려우며, 또 사졸 중에 전사한 자도 있고 상한 자도 적지 아니하나 그것을 보충하기가 어려우니, 이러한 형세를 가지고 조선 각처에 퍼져 있는 적군의 근거지가 되는 또 꼼짝 아니하는 부산의 적을 가서 친다는 것은 병가에 이른바 나의 피곤함으로 적의 편안함을 치는 것이라 백번 패함이 있을지언정 한 번 이김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양산의 적을 먼저 치지 않고는 부산의 적을 칠 수 없는 형세이니 뒤의 적을 두고 나아가 앞의 적을 치는 셈이 되는 것이며, 양산의 적을 치려면 낙동강이 좁아서 병선 하나를 겨우 용납할 정도인데 적선은 미리부터 험고한 자리를 잡아 웅거하였으니, 내가 싸우려 하면 적이 나오지 아니할 것이요 싸움도 못하고 물러나면 도리어 나의 약점만 보일 것이니, 그러한 형세인즉 육지로부터 함께 치는 육군이 없이는 수군만으로는 양산의 적을 격파할 도리가 없으며, 만일에 양산의 적을 그냥 두고 부산으로 향하다가는 부산의 적과 양산의 적이 서로 응하여 타도에서 온 우리의 원정대를 전후로 협격하여 급습을 한다 하면 우리 주사는 위태할 것이다.

이억기의 수급량 200여급

셋째로 또 전라병사의 관문에 의하건대 한성을 점령한 적군이 경상도 연해에서 자기네의 수군이 연전연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구원하려고 한성 서강西江에서 조운선漕運船[각도 각읍의 조세미를 한성으로 수운 상납하는 관선]을 빼앗아 타고 한강으로부터 호남을 향하여 내려온다 하였으니, 경기 충청 양도에도 수군절도사가 있어서 조운선을 빼앗길 리는 만무하지만 의외의 변고도 없으란 법은 없으니 그것도 염려하지 아니할 수는 없다.

그러니 각기 본영에 돌아가 가일층 준비나 더하여가지고 변고에 대비하자는 것으로 일장 설명을 하였다. 제장들은 순신의 주도한 방략에 꿈을 깬 듯이 알아듣고 찬동하였다.

순신이 다시 말하기를 “금번 작전 이래로 적선의 당파 분멸된 수량이 72척이요 적군의 죽은 것이 3000명은 훨씬 넘을 것이요 또 살아서 육지로 도망한 것이 수만이 넘을 것인즉 우리 주사의 병위가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였을 듯도 하다. 그러니 필연코 적병이 겁을 내어 가벼이 가덕 이서를 엿보지 못할 것인즉 아직 돌아가 전사한 군사를 장례하고 부상한 군사를 치료하고 새로 장정을 모집하고 군량을 준비하고 병기 화약 등을 제조하여 다시 적군의 책원지가 되는 부산 양산을 소탕할 계획을 세우자”는 취지로 훈시하였다.

이러하여 6월 10일에 남해 미조항에 와서 이억기와 원균이 각각 돌아갔다. 원균은 물에 떨어져 죽은 적의 목 200여급을 순신에게 허락을 얻어가지고 의기양양하게 경상우수영으로 돌아가고 이억기도 전승한 수급이 200여급이 넘었던 것이었다.

사천과 당포의 싸움 이래로 큰 싸움이 삼사차에 달하여 죽은 우리 군사가 모두 13인인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10명이요 화살에 맞아 죽은 사람이 3명이며 총 맞아 상한 사람이 이순신 나대용 이설 이하로 합 16인이요 화살에 맞아 상한 사람이 21인이니 경상자가 이순신 이하로 합 37인이었다.

전사한 사졸은 순신이 친히 제문을 지어 그 충혼을 추도하고 각기 그 고향으로 보내어 나라를 위하여 죽은 충의지사라 하여 그 지방 태수의 호상護喪으로 장례를 장엄하게 거행하여 전사자의 영광을 일반 민중으로 하여금 깊이 인식하게 하였다.

그리고 전사자의 유족 즉 그 부모처자는 각기 그 구역의 지방관청으로부터 구휼하기를 명하고 전상한 사람들은 순신이 친히 그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고 영문에 속한 의약사들로 하여금 특별히 치료하게 했다.

순신은 관하 제장을 보낼 때에 연회를 열고 술과 안주를 나누어 석별의 정을 표시하고 그동안 나라를 위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충용을 다하여 싸운 것을 찬양하고 또 “이번에 회군한 것은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요, 적이 이제 2번이나 우리의 출병한 데 패하였으니 반드시 복수하러 올 것은 의심 없는 일이오. 들은즉 적이 황해 평안 양도로 가는 수로의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하고는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니 적은 필연코 이를 얻기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더라도 크게 싸울 것이오. 그런데 이 적의 수군을 때려 부술 자는 오직 우리 수군이 있을 뿐이니 우리가 만일에 적을 놓아 보낸다 하면 평양에 들어가 웅거한 적의 육군이 수군의 응원을 받아서 수륙 병진하여 의주 행재소를 범할 것은 명약관화요, 또 요동을 거쳐 명나라 천진天津 산해관山海關 북경北京까지 들이친다면 우리 조선은 영영 없어지고 말 것이니, 이것을 생각하고 볼 때에 우리가 이때를 당하여 한 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갚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오!” 할 때에 순신의 태도와 어조는 강개 비분하였다. 이 연설을 듣는 제장들도 순신의 열렬한 장광설 사자후에 모두 감동이 되어 비장한 위국의 충정으로 뜨거운 눈물을 뿌렸다.

전장에서 피난민을 구휼

순신은 일층 소리를 높여 “그러니깐 제공은 돌아간 뒤에라도 군정을 정돈하여 가지고 한번 이긴 것으로 관습을 삼아 쉽게 여기지 말고 병사를 위안하고 병선을 더욱 정비하여 일이 있다는 영을 듣거든 곧 나오되 시작과 끝이 한결같게 하시오” 하였다.

순신의 훈시는 웅변이 아니라 오직 충의에 가득한 열변을 토로할 뿐이다. 이것이 즉 사자후이며 장광설이었다.

순신은 이번 싸움의 공을 정하여 1등으로부터 3등까지 일일이 발표하였다. 1등은 권준 이순신李純信 어영담 배흥립 신호 정운 김득광 김완 이기남李奇男 이언량 이몽구 김인영 가안책賈安策 변존서 나대용 송희립 이설 신영해申榮海 김효성 배흥록 이봉수 등이었다.

적의 수급을 벤 수를 따라서 하지 아니하고 싸우기에 힘쓰던 성적을 보아서 하였다. 순신이 스스로 논공행상을 한 데 대하여 선조에게 장계를 올렸다. 그 장계중의 구절은 이러하였다.
 

 

“행재소가 멀리 떠나 있고 길이 막혀서 통행하기 어려운데 적병은 아직 물러가지 아니했습니다. 논공행상하는 일을 만일에 조정에 보고하고 그 회답을 기다려 발표한다 하면 왕복하는 동안에 시일이 늦어질 것입니다. 군중 상벌은 때를 넘길 것이 못되오니 군심을 위로하고 격려하여야 앞에 닥칠 일에 힘을 쓸 것이기에 공로를 참작하여 일•이•삼등에 나누어 보고합니다.”
순신은 병선을 많이 더 짓고 묵은 것은 수선하여서 벌써 30여 척에 달하였다. 순신의 함대는 책응하는 사환선5)을 시켜 호남 영남 양도 연안에서 피난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적선에서 얻은 양미와 필목을 나누어 주어 생명을 유지하게 하고 또 가족을 끌고 주사를 따라오기를 원하는 무리 합 200여 가구는 농토 많고 해산물과 땔감의 물산이 풍부한 여수 장생포6) 근처에 머물게 하였다.

싸움에 나아갈 때마다 순신은 휘하 제장에게 당부하여 적군에게 붙들린 우리나라 사람을 힘써 구하되 적선을 불지르거나 적군을 무찌를 때에도 각별히 수색 탐사하여 한 사람이라도 죽이지 말라고 분부하고 또다시 당부하되 적에게 납치되었던 사람 하나를 되찾아 오는 공은 적의 수급 하나를 베는 것과 공이 같다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모든 장졸들은 혹시나 우리나라 사람을 상하지나 아니할까 하여 적선을 점령할 때에는 “이 배에 조선 사람이 있거든 나서라 우리 사또께서 조선 사람은 살리라신다” 하고 크게 외쳤다.

이렇게 하여 찾은 조선 사람이 이번 각처 싸움에 남녀 합 6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나이가 어려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고 그 중에 녹도만호 정운이 당항포 싸움에서 사로잡은 동래 사노 억만년億萬年이라 하는 13세 된 아이 하나가 매우 영리하여 묻는 말에 분명히 대답한다.

순신은 이러한 사람을 잡아온 때에는 반드시 몸소 신문을 하였다. 억만년의 진술하는 말은 “저는 동래부 동문 밖 연지동蓮池洞에 살고 나이는 13세요. 부산서 난리가 났다고 하기로 부모를 따라서 성 안으로 들어왔소. 일본 군사가 수없이 많이 와서 성을 다섯 겹이나 에워쌌는데 그중에 한 100명이 성에 뛰어올라 넘어 들어왔소. 성 안에 있던 우리 조선 군사들은 막 싸우다 죽었소. 소인은 친형을 잃고 갈 바를 몰라서 우는데 어떤 일본군사 하나가 소인을 붙잡아 가지고 부산으로 갔소. 5~6일을 지나서 배에 실렸는데 소인을 데리고 가던 사람이 소인을 배 밑에 숨겼소. 또 5~6일 뒤에 어느 동네에 들어가 말이랑 돼지랑 소랑 닭이랑 식량이랑 아니가지고 오는 것이 없습디다. 그러자니깐 우리나라 사람은 닥치는 대로 죽였다오” 하였다.

체포자 직접 심문한 순신

순신은 심문하는 말을 다 들은 뒤에 제장을 돌아보며 “어린것들이 어버이를 난중에 잃고 불쌍하니 사로잡은 해당 장수들이 각각 맡아 보살피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제 고향으로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이충무공은 동양의 신무7)일 뿐만 아니라 또한 남쪽 백성들의 활불이며 구세주였다.

이러하는 것을 보라. 의탁할 곳 없는 피난민을 밥을 주고 옷을 주고 살 곳을 데려다 주고 또 포로가 되었던 아이들을 이처럼 하니, 우리 삼남의 후인들이 품는 영감8)과 추모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일전에 순신의 함대가 이억기의 함대와 작별하여 이억기는 순신과 석별의 정을 머금고 아쉬움 속에 헤어져 우수영9)으로 돌아갔다.

순신의 함대는 6월 11일 석양 때에 본영인 좌수영에 돌아왔던 것이었다. 전자에 순신이 지나오는 길에 포구마다 도서 연안마다 백성들이 이순신 장군의 풍채를 한 번 보려고 애를 썼다.

아마도 이순신 장군은 풍운조화를 임의로 부르고 오방신장10)과 팔방뇌공11)을 지휘 진퇴하는 날개 돋친 장군이라고 생각하고 저 편 적군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여 어린 아이들이 밤에 울다가도 이순신 장군이 온다고 하면 울던 울음을 그치고 무서워하였다고 한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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