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현 동우약품 대표

그는 수줍음 많은 촌놈이었다. ‘사내가 소심해서 뭘 하겠는가’라는 말을 밥 먹듯 들었다. 어린 시절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그는 ‘무언가’ 보여주고 있다. 그가 창업한 회사는 연매출 500억원을 올리는 강소强小기업으로 성장했다. 김국현 동우약품 CEO. 그의 기적 같은 이야기다.

▲ 말수 적고 수줍음 많던 시골소년은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는 CEO로 거듭났다.
그는 땅끝 마을 해남의 촌놈이었다. 동네 첫사랑에게 인사조차 제대로 못하는 숙맥이었다.

말수까지 적었다. 눈앞에서 손해를 당하고도 따지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성격이 소심해서 장차 큰일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20년 후, 그 시골소년은 제약회사 CEO가 됐다. 김국현 동우약품 CEO의 이야기다.

널리 알려져 있진 않지만 동우약품은 만만한 회사가 아니다. 연매출은 500여억원, 글로벌 금융위기 후에도 ‘적자’ 한번 내지 않은 알짜배기 기업이다.

그에 대한 주변의 평가도 달라졌다. “승부사 기질을 가진 전형적인 돈키호테형 사업가다.” 수줍음 많던 시골소년이 자신감 넘치는 CEO로 거듭난 셈이다. 김국현 대표는 “수줍음 많고 소심한 성격을 고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골소년의 성격이 바뀐 첫번째 터닝포인트는 군 시절이다. 1978년 해군에 입대한 김 대표는 군대에서 주최한 웅변대회에 출전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사정이 생겨 대신 참가한 것이었다. 목포 비행장에서, 내무반에서, 운동장에서 힘차게 원고를 읽었다. 준비는 한달간 이어졌다. 김 대표는 2위를 수상했다. 처음으로 출전한 웅변대회에서 얻은 예상 밖의 결과였다. ‘노력하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다.

1982년 까스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에 입사했다. 회계부를 거쳐 약품을 납품하는 특수판매팀에 배치됐다. 예전 같으면 ‘못하겠다’며 손사래를 쳤을 부서였다. 하지만 그는 소심하던 그때 그 ‘시골청년’이 아니었다.

자신감 하나로 뛰어들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 얼굴을 트는 건 고역이었다. 거래처 담당자는 영업 초짜인 그를 건성으로 대했다. 머쓱해하는 그에게 거래처 담당자는 ‘의욕만 앞선다’며 핀잔만 줬다. 군대에서 얻은 자신감이 한순간 사라졌다.

어깨가 축 처져서 거래처를 나오는데 경쟁사의 영업사원이 눈에 띄었다. 손에 한가득 짐을 안고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제품 설명서를 나눠주는 듯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게 아니었다. 제품 설명서를 더 쉽게 풀어 쓴 종이였다. 김 대표는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이 많구나.”

동화약품 팀장 자리 버리고 창업

그는 지기 싫었다. 집에 가자마자 노트 한권을 준비했다. 약품의 원료만 일목요연하게 따로 정리했다. 기호와 전문용어 옆에 설명을 덧붙였다. 다음날 새벽 노트를 팔짱에 끼고 거래처를 찾아갔다. 대면조차 하지 않던 거래처 담당자가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담당자가 명함을 주면서 약품을 주문하겠다고 말했다. 신바람이 났다. 이를 계기로 동화약품 물건을 받겠다는 주문전화가 이어졌다. 김 대표에게 ‘제약업계 영업의 달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거래 실적이 쌓이면서 회사에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회사는 김 대표에게 원료의약품 판매팀을 맡겼다. 당시 국내 원료의약품 시장은 중국•인도산産 저가원료에 밀리고 있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순간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외산업체로부터 의약품 원료를 싸게 받아 성격과 효과에 따라 나눠 포장한 뒤 다시 돌려주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소분’이라고 불리는 판매방식이었다. 소분은 의뢰업체로부터 약품재료를 받아 작게 나눠서 포장해 다시 보내주고 가공비용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소분은 위기를 탈출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진짜 대안이 필요했다. 원료의약품으로 승부를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는 상사를 찾아가 이런 제안을 했다. “앞으로 의약시장을 주도하는 건 원료의약품이다. 이 시장에 투자해야 한다.”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료의약품에 치중하는 동화약품에서는 원료의약품에 집중적으로 투자할 수 없었다. 그는 회사를 떠나 창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1994년 9월 1일 동우약품을 설립했다. 첫 사옥은 서울 대림동에 있는 작은 건물의 지하실이었다. 직원이라곤 전화 받는 이가 전부였다.

안정적인 직장을 뿌리치고 초라하게 ‘일’을 벌이자 사람들은 ‘사서 고생한다’ ‘3년도 못 버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의약품 원료를 팔 만한 채널은 이미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그는 되레 ‘첫달에 이익을 내겠다’며 큰소리를 쳤고, 실제로 55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그는 더 큰 포부를 밝혔다. “내년엔 사무실을 1층으로, 내후년엔 2층으로 옮기겠다.”

포부는 또 현실이 됐다. 동우약품은 2년 후 지하건물에서 2층 건물로 이전하며 성장을 거듭했다. 창업 6년만인 2000년엔 매출 100억원을 올렸다.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했지만 그는 ‘할 수 있는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렇다고 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다른 의약품업체와 마찬가지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해외에 약품원료를 수출하는 동우약품은 세계경제 침체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2008년 19억원이던 영업이익이 1년 만에 3분의 1 토막 났다.

하지만 김 대표는 당황하지 않았다. 직장을 다니면서 창업을 준비한 것처럼 성장을 거듭할 때 위기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9년 어느 날. 그는 직원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올해 심장근육에 작용하는 조영제를 개발하겠다.” 조영제는 엑스선을 촬영할 때 사진이 명확하게 나오도록 장기나 조직에 넣는 물질이다. 김 대표가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연구였다.

임직원이 뜯어말렸다. 시장상황이 어려운데 투자를 단행하면 회사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논리에서였다. 더구나 조영제를 개발하는 데 최소 3년이 필요했다. 결단을 내리면 칼을 빼는 게 승부사의 섭리다. 김 대표가 그랬다. 연구개발사 동우신테크에 투자를 단행했다.

김 대표의 결단은 2년 후인 2011년 알찬 열매를 맺었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이 임상실험을 승인한 것이다. 김 대표의 추진력이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동우약품은 현재 임상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실패는 목표 이루는 과정”

물론 동우약품의 야심작 ‘조영제’가 실패할 수도 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 있다. 김 대표가 조영제 개발에 혼신의 힘을 쏟는 동안 영업이익은 6억원대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자칫 실패하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

김 대표는 “그래도 괜찮다”며 웃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조영제 개발을 꾀한 게 아니라서다. 그에겐 꿈과 열정이 있다. 동우약품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고, 국내 의약품 산업발전에 기여하는 게 포부다. 그는 뼈아픈 실패가 의약품 산업과 동우약품이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실패도 목표를 이루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얘기다. 그는 오늘도 달린다. 실패 따위는 무섭지 않다. 그는 승부사니까. 더 이상 소심하지 않으니까.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 @kkh4792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