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의 수출 경제학

▲ 역사 한줄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나 드라마 중에는 유독 흥행작이 많다. 역사 ‘한줄’ 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모티브는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는 ‘몇줄’이었다. 이 영화가 1000억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사 ‘몇줄’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역사 ‘한줄’로 만든 영화가 자동차 수천대를 수출한 경제효과를 올리기도 한다. 창조경제 아이템.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역대 사극물 중 가장 많은 관객(1230만명)을 동원한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의 매출액은 얼마일까. 영화진흥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889억원이다. ‘왕의 남자(2005)’는 660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최종병기 활(2011)’은 558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순수 영화입장료만 따졌을 때 얘기다.

영화는 해외 판권 수익, 비디오 판권 수익 등 부가수익도 올린다. 한국기업평가 자료(2006)를 보면 영화가 흥행하면 평균 300억원에 달하는 부가가치를 올린다. 영화입장료까지 감안하면 흥행영화 한편의 총 가치는 1000억원에 육박한다. 현대차가 2013년형 쏘나타(2.4L급) 4000여대를 수출한 것과 비슷한 수익이다. 

역사 한줄 경제효과 만만치 않아

과장된 분석이 아니다. 배기형 세종대(경제통상학) 교수가 2012년 발표한 ‘영화산업의 경제적 파급효과 분석’ 자료에 따르면 영화산업의 생산유발계수는 2.324로 전기•전자산업(1.924), 음식료업(2.130), 화학제품업(2.040)보다 월등히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 전체로 보면 네번째로 높다.

영화산업 산업의 소득유발계수는 교육•보건(0.610), 공공행정(0.547) 다음으로 높은 0.454를 나타냈다. 노동유발계수는 도소매(0.031), 사회•기타서비스(0.022), 음식점•숙박(0.0 21), 교육•보건(0.018)에 이어 다섯번째로 높은 0.017이었다. 생산유발계수는 0.110으로, 석유•석탄제품(0.179), 음식점•숙박(0.156) 사회•기타 서비스(0.139)에 이어 네번째로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영화 한편의 경제적 파급효과가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한국영화 역대 흥행 1위부터 10위 중 다섯편은 실제 사건에 상상력을 불어넣은 팩션(faction)이다. 실화가 바탕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역사극’이다. 흥행순위 상위 10편 중 4편이 역사극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4위)’ ‘왕의 남자(5위)’ ‘태극기 휘날리며(6위)’ ‘실미도(8위)’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흥행작의 아이템이 역사책 한줄, 사진 한 장이라는 점이다. ‘광해, 왕이 된 남자’가 탄생한 배경은 독특하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 일기’에서 광해군이 사라졌던 15일간의 승정원일기 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많은 얘기가 나오지도 않는다. 단 몇 줄에 불과하다. 영화 ‘가비’는 고종황제가 커피를 좋아했다는 에피소드에서 나왔고, ‘최종병기 활’은 “1637년 병자호란 후 나라의 송환 노력은 없었고, 다만 소수의 사람들이 그들만의 힘으로 돌아왔다”는 한줄의 기록에서 탄생했다. 영화 ‘포화속으로’는 1950년 한국전쟁에 참가했던 이우근씨의 일기와 학도병들의 사진 한장에서 비롯됐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드라마 ‘대장금’은 조선왕조실록 중 중종실록 일부에만 몇 줄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소설 속 주인공 임꺽정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도 명종실록의 일부 기록을 통해서 나왔다.

이처럼 역사 한줄, 사진 한장이 불러일으키는 경제적•문화적 파급효과는 크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이 덧붙여지긴 하지만 사실에 기반한 픽션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작가들이 더 많은 역사 한줄, 사진 한 장을 찾아낼 수 있다면 한국경제에 큰 도움을 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현실은 막막하다. 기초자료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역사연구자의 연구물을 작가 등 창작자에게 전달할 통로가 없어서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디지털국학실 실장은 “학자들과 창작자 사이의 간극이 크다”며 “연구물 공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광해군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학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창작자들은 그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았다. 학자와 창작자를 연결해주는 고리가 전혀 없다는 거다. 자료를 구하려면 창작자가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2011년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조선시대 법정 스릴러물 ‘조선변호사’로 대상을 수상했던 권기경 작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쓸 만한 역사자료를 찾으려면 학자들의 논문과 씨름을 해야 했다”며 “그나마 요즘은 한자를 많이 안 써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권기경 작가는 “학자들이 주로 다루는 건 거시적인 역사지만 작가들이 관심을 두는 건 미시적인 역사다”며 말을 이었다.

“김영현 작가는 조선왕조실록에 단 몇줄밖에 없는 기록을 바탕으로 수십부작의 대장금을 썼다. 대장금이 활동했던 당시의 기록들을 집대성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시청자나 관객은 좋아하지만 작가 입장에서 ‘역사물’을 쓰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부가 전문가를 중간다리 역할을 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거다.

더 큰 문제는 언어의 장벽이다. 이상호 실장은 “학자들이 역사자료를 연구해서 논문으로 결과를 내놔도 대부분의 창작자는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적인 용어가 많고, 한자가 많아 쉽게 읽을 수 없다는 얘기다. 이 실장은 “더구나 기초자료는 한문, 특히 초서(필기체 형식)라서 웬만한 한문학자들도 못 읽는다”며 “고서를 전문으로 해독하는 학자가 아니고선 해석 자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인 흥행작인 ‘해리포터’ 시리즈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작품은 실제로 그 나라의 역사자료와 전설•문화가 어우러져 탄생했다. 언어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까지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언어의 단절 때문에 고문서를 해독하는 것조차 애를 먹고 있다. 

고서만 잘 번역해도 창조경제 실현

더구나 우리나라에는 고문서를 해독하는 전문가도 많지 않고, 처우도 형편없다. 고서전문가인 하영휘 가회고문서연구소 소장은 “고서를 해독하는 일을 하면 제대로 단가를 책정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며 “한번은 국가에서 진행하는 고서 해독작업을 했는데 얼토당토하지 않은 금액을 제시하더라”고 털어놨다. 처우가 좋지 않기 때문에 고서 전문가를 희망하는 이들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하영휘 소장은 “고서전문가를 키우려면 도제방식(스승을 곁에 두고 배우는 방식)으로 10년을 공부해야 제대로 해독을 한다”며 “하지만 그 10년 동안 제자들은 먹고살 방법이 없으니 죄다 포기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30여년 동안 한림대가 부설의 태동고전연구소를 지원해줘서 고서전문가가 배출될 수 있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관련 예산마저 끊길 판”이라고 한탄했다. 상아탑마저 ‘취업공장’으로 변해 고서전문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상호 실장은 “역사 한줄로도 굉장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며 “역사자료를 해독해서 작가들이 제대로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만 갖춰져도 대량의 문화콘텐트가 쏟아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 정부의 창조경제. 어쩌면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잘 찾은 역사 한줄이 자동차 수천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는 경제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역사 ‘한줄’의 힘이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juckys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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