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오너, 국감 하찮게 보는 이유

대기업 오너는 국정감사장에 오지 않는다. 늘 그래 왔다. 국회의원이 제아무리 강력하게 호출해도 끄떡하지 않는다. 국감에 불출석해도 벌금 몇 푼 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제 솜방망이 처벌을 바로잡을 때가 됐다. 국감은 국민을 대리한 국회의원이 묻고 따지는 자리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과 정유경 신세계 사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지난해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침해문제를 다룬 국회 공정거래위원회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불출석한 혐의(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를 받고 있는 재벌가 경영인들이다.

이들 4명은 모두 국감에 출석하지 않았다. ‘해외출장 등 경영상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출석하지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전문경영인이나 임원을 내보냈다. 왜 그들은 국감증인으로 출석하는 것보다 법을 어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국감출석에 불응해도 솜방망이 처벌만 받으면 그만이라서다. 벌금을 내고, 아무 일 없는 듯 조용히 지나가면 끝이라는 얘기다. 국회에서 증언•감정에 관한 법 제12조에 따르면 정당한 이유 없이 국회에 출석하지 않은 증인은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 하지만 국정감사가 부활한 1988년 13대 국회 이래 국회 출석에 불응해 검찰에 고발된 증인 154명 중 징역형을 산 이는 3명뿐이다. 오너 일가는 대부분 벌금형이었다.

▲ 국정감사에 불출석한 기업 오너 중 징역형을 받은 이는 없다. 솜방망이 처벌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로 이들 4명은 벌금 500만~1500만원을 구형받거나 선고받았다. 일반사람들에겐 감당하기 힘든 벌금이지만 이들에겐 ‘껌값’에 불과할지 모른다. 연봉은 억대를 넘나들고, 주식보유액은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오너로서 자존심을 지킨다’는 부분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들 4명은 최고만을 누려왔고, 누구에게든 어디서든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이를테면 평생이 ‘갑甲’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출석해야 할 국감 또는 청문회는 ‘유통업체의 골목상권 침해와 관련해 잘잘못을 묻는 자리’였다. 신세계•롯데•현대백화점 등 유통그룹을 이끌고 있는 이들이 졸지에 ‘을乙 신세’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금배지들에게 질타를 당하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느니, 벌금 몇 푼 내고 끝내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기업 가치를 고려했을 가능성도 있다. 유통그룹을 이끄는 수장이 국회에서 질타당하는 모습이 공개되면 기업이미지가 추락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는 것이다. 일반인을 고객으로 하는 유통기업으로선 이미지 구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가치가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기업을 이끄는 오너 또는 CEO가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했을 때 주가가 되레 오를 때가 많다. 기업 리스크를 오너•CEO의 신뢰로 넘어선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 기업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는 잘못을 피하는 게 아니라 책임감을 보이면서 고쳐나갈 때 구축된다.”

국감 불출석 혐의로 벌금형을 맞은 유통그룹 수장들. 벌금 몇 푼을 물며 국회는 피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민의 눈은 피하지 못했다. 지금은 경제민주화 시대다.
박용선 기자 brave11@thescoop.co.kr | @brave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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