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5회

[CBS The Scoop] 순신은 한산도 수루 위에서 매양 달 밝고 한적한 밤이면 시사를 살폈다. 여러 방면으로 걱정이 많았다. 창연히 바다를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하루 밤은 시조를 지어 읊어 마음속을 드러내 보였다.

 
이순신 장군이 유진한 뒤가 안전지대라는 소문을 들은 삼남 유민은 난을 피하여 남부여대1)하며 부로휴유2)하고 순신의 행영 뒤로 연속하여 들어온다. 막으려야 막을 수 없다. 부득이 군량을 헐어 구제하였다. 태산이라도 부족할 것 같았다. 굶어 죽는 형상은 목불인견이었다. 순신은 하는 수 없어서 조趙나라 이목3)과 한漢나라 조충국4)의 둔전5)하던 예를 따라 조정에 장계하고 한산도 부근의 해평농장을 위시하여 순천의 돌산도 흥양의 도양장6) 해남의 황원곶7) 강진의 화이도8) 등으로 농장을 정하고 둔전을 시작하였다.

돌산도는 군관 송성宋晟을, 도양장은 이기남을, 화이도와 황원곶은 종사관 전 부사 정경달丁景達 등을 감독으로 보냈다. 개간이 시작되기 전에는 바다 요처에 어로를 짐작하여 어업을 하게 하며 항만 내의 평탄한 간석지에는 염전을 경영케 하며 점토를 발견하여 도기를 굽게 하며 해운업의 길을 열어 피난민 중에 상업가를 지휘하여 무역을 행하게 하여 군민이 단결하여 나중에는 양곡 어염 포목 할 것 없이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어 저장된 곡식이 수만석에 이르고 새로 만든 병기는 산과 같이 쌓였으며 병선이 삼도를 합하여 대소 1000척에 달하였다.

순신은 항상 말하기를 “개전한 이래로 종묘사직의 도우심과 제장의 충용을 힘입어 백전연승하였으나 금년에 이르러서는 7로에 가득하였던 적군이 경남일대로 모여들어 험고한 곳에 성채를 쌓고 곳곳마다 소굴을 지어 지키기만 하고 감히 우리 수군에게는 도전하지를 못하고 있다. 우리 군사는 해가 다 가도록 이들을 물리치지 못하여 분개함이 끝이 없으나 다행한 것은 병기와 군량이 유족하고 새로 만든 병선이 배倍가 되었으니 시기를 보아 한번에 부산의 적의 근거를 토멸하여 적으로 하여금 돛 조각이나 노 하나라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를 삼도제장과 약속을 신명하였다.

갑오1594년 2월 12일에 서울서 선전관 송경령宋慶苓이 한산도 행영에 내려와 선조의 밀지를 전하였다. 순신은 숙배한 뒤에 받들어 읽었다.

“경이 바다 위에서 해를 넘기며 나라 위해 수고함을 내 항상 잊지 않노라. 공을 세운 장병 중에 아직 상을 받지 못한 자를 알리도록 하라.”

고성현 벽방산碧芳山 망장望將 제한국諸漢國이 보고하되 적선 8척이 춘원포春院浦 선암仙巖에 정박하였다고 한다. 원균이 적선이 8척뿐이란 데 용기가 나서 손뼉을 치고 좋아하며 출전코자 하여 “선암에 들어온 적선은 소인이 치러 가겠소” 하였다. 순신은 불가하다 하여 “소리를 탐하면 대리를 잃는 것이니 소탐대실이란 말이 있지 아니하오? 아직 기다리시오” 하고 엄히 경계하였다.

또 군관 제재호諸在浩 등이 보고하기를 적선 30여척이 고성 진해 양현 일대에 침입하여 마을에 내려 분탕질이 악독하고 백성을 마구 죽이며 기왓장과 왕대를 그들의 배에 가득 담고 있다고 하였다.

적을 향해 위세 과시하는 조선군

▲ 한산도 진중에 전염병이 유행하면서 순신도 병으로 신음했다.
또 제한국이 다시 보고하되 적의 대선 10척 중선 14척 소선 7척 합 31척이 당항포와 오리량9)에 들어와 있다고 하였다.

순신은 삼도 주사의 정예만을 거느리고 한산도 앞바다에서 밤을 타서 잠행하여 지도10) 앞에 이르러 밤을 지내고 4일 새벽에 전선 20척을 견내량에 잠복하게 하여 웅천 김해 등지의 적이 함부로 준동할까 하여 불우의 변을 방비하게 하고 좌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일령장 노천기盧天紀, 이령장 조장우曹長宇, 좌별도장 전 첨사 배경남裵慶男, 판관 이설, 좌위장 녹도만호 송여종, 보주통장步駐統將 최도전, 우척후장 여도만호 김인영, 일령장 윤붕尹鵬, 귀선돌격장 이언량, 응양별도장 전라우수영 우후 이정충, 좌응양장 어란만호 정담수, 우응양장 남도포만호 강응표, 조전통장 배윤, 전 부장 해남현감 위대기, 중부장 진도군수 김만수, 좌부장 금갑도만호 이정표, 통장 곽호신, 우위중부장 강진현감 유해, 좌부장 목포만호 전희광, 우부장 주부 김남준, 전 부장 미조항첨사 김승룡, 좌유격장 남해현령 기효근, 우돌격장 사량만호 이여념, 좌척후장 고성현령 조응도趙凝道, 선봉장 사천현감 기직남奇直男, 우척후장 웅천현감 이운룡, 좌돌격장 평산포만호 김축, 우유격장 하동현감 성천유, 좌선봉장 소비포권관 이영남, 중위장 당포만호 하종해, 합 31 명의 장수를 선발하여 조방장 어영담으로 주장을 삼아 당항포를 몰래 습격하게 하고 순신은 이억기를 데리고 대군을 통솔하고 적의 구원의 길을 가로막기 위하여 학익진을 벌이고 거제 장문포11)와 웅천 등지의 적의 책동지를 향하여 위세를 과시하여 도전하였다.

이렇게 밤을 타서 행군하기는 적이 순신의 그림자만 보아도 달아나는 때문에 적을 섬멸할 수 없음이요, 병위를 보여 도전하기는 적을 속여서 당항포를 습격하는 줄을 모르게 하여서 안심을 주는 방략이었다. 이때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대중소를 합하여 31척의 적군은 이편의 광경을 바라보고 이순신이 또 온다 하여 낙담하고 혼을 잃어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진을 쳤다.

어영담은 제장을 지휘하여 바로 들어가 때려 부수려 하였다가 날이 저물기 시작하므로 포구에서 파수하며 밤을 보내고 5일 새벽에 순신은 이억기와 더불어 바깥 바다에서 그대로 진을 벌여 외선을 방어하고 어영담은 제장을 거느리고 당항포를 곧장 공격하였다. 31척의 대소 적선은 기왓장과 대나무를 가득 싣고 선창에 열박하여 있고 적군들은 우리 병위를 무서워하여 밤사이에 매를 두고 모두 도망하여 버렸다. 제장은 앞 다투어 당파 분멸하여 버렸다. 소위 일도의 수군대장인 원균도 적의 빈 배들을 보고는 탐공지심에 미칠 듯이 좋아서 때려 부수는 데 한목을 들어서 날뛰었다.

이날 순신은 주사를 전부 합세하여 진해만 바다를 덮어 동서로 진을 변화시켜 기정변화奇正變化로 엄습할 형세를 보이며 대연습을 거행하니 포성은 천지를 진동하였다. 영등 장문 제포 웅천 안골 가덕 등지에 자리잡은 행장 의지 등 적군들은 공격이 올까 무서워하여 복병하였던 임시막사를 저의 손으로 불사르고 깊이 소굴 속으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남해현령 기효근이 영등포 앞바다에서 나오는 적선 1척을 나포하니 명나라 병사 2인과 일본 병사 8인이 실려 있었다. 저들의 말에 “담도사譚都司의 패문牌文이 있다” 하여 순신의 장막에 그를 올렸다.
皇明宣諭都使譚宗仁禁討牌文
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前
宗仁仍留熊川行長陣中 以待天朝許和之命 近日倭人恐㤼貴下舟師之威 多般哀乞故牌文成送 日本諸將 莫不傾
 
心歸化 俱欲捲甲息兵 盡歸本國 爾各兵船 速回本處地方 毋得近駐日本營寨 以起釁端云云

황명선유도사 담종인이 토벌을 금하는 패문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앞
담종인은 웅천의 소서행장의 진에 머무르면서 중국 조정이 화의를 허락하는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요즘 왜인들이 귀하측 주사의 위세에 겁을 먹고 두려워하여 다수가 애걸하는 고로 패문을 써 보낸다. 일본 제장은 귀화하기로 마음이 기울지 않은 자가 없다. 모두들 무기를 거두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니 각 병선은 속히 본영으로 돌아갈 것이며 일본 진영 근처에 주둔하여 싸움의 단서를 일으키지 마라.

순신은 보기를 다하매 분개함을 금치 못하였다. 원균 이억기 이하 제장들도 분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그 회답문을 지어 보내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담종인을 볼 것보다도 명나라와 우리나라의 양국관계가 그러하였다.

순신은 원균의 손자 원의갑元義甲이 글 잘한다는 말을 원균에게 많이 들었다. 원균이 자청하되 “대감께서 심기가 좋지 못하오니 제 손자 의갑을 불러 지어 보내게 합시다” 하여 순신은 허락하였다.

원래 순신은 글이나 글씨를 남에게 대신 시키는 일은 일평생에 없었던 터이다. 그러나 오늘은 심기가 심히 불편하기도 하고 중국 놈들이 조선의 처지를 깔보는 것이 더구나 분하여 집필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원의갑이 지어 바치는 글은 합당치 못하였다. 순신은 할 일 없이 붓을 잡아 회답문을 새로 지어 정사준을 시켜 보냈다.

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謹答呈于 皇明宣諭都司譚宗仁大人前
敵人 自開釁端 連兵渡海 殺我生靈 一國臣民 誓不共戴 各道舟師 東西策應 使殘兇餘孽 隻櫓不返 不意大人宣諭牌文到陣 奉讀再三 諄諄懇懇 極矣盡矣 但敵人屯據 是皆我土而 謂我近日本之營寨云者 何也 謂我速回本處地方云者 亦未知在何所耶 惹起釁端者 非我也敵也 今敵人退據沿海 尙不斂惡 豕突諸處 刦掠人物 捲甲渡海之意 果安在哉 伏惟大人遍曉此意 俾知順逆之道 幸甚幸甚
왜적이 싸움의 단초를 스스로 열어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우리 백성들을 죽이니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왜적과 같은 하늘 아래서 살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각도의 주사는 동서로 책응하여 남아 있는 흉악한 왜적들로 하여금 노 1개도 가지고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자 합니다. 뜻밖에 대인의 타이르는 패문이 진중에 이르므로 받들어 재삼 읽어보니 정성스럽고 간절함이 극진합니다. 다만 적들이 머무르는 곳이 모두 우리 땅이거늘 우리에게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 함은 어찌된 것이며 또한 우리에게 빨리 본영으로 돌아가라 함도 또한 뜻하는 바를 모르겠습니다. 싸움의 단초를 일으킨 자는 우리가 아니라 왜적들입니다. 지금도 왜적들이 연해에 거하면서 험악한 짓을 그치지 않고 여러 곳에 쳐들어가 사람과 물건을 겁탈 노략하고 있으니 무기를 거두어 바다를 건너가겠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엎드려 청하니 대인은 이러한 뜻을 두루 깨달아 이치에 따름과 따르지 않음의 도리를 알게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순신은 의리 없고 예의 없는 담종인의 금토패문에 회답하여 보낸 뒤에 전일 당항포에서 전승한 제장들의 공을 고찰하여 보았다.

조방장 절충장군 어영담은 적의 대선 2척을 분멸하고
여도권관 김인영은 대선 1척 중선 1척을 분멸하고
녹도만호 송여종은 대선 1척 소선 1척을 분멸하고
귀선돌격장 이언량은 중선 2척을 분멸하고
사도첨사 김완은 중선 1척을 분멸하고
전 부산첨사 배경남과 판관 이설은 함께 대선 1척을 분멸하고
보주통장步駐統將 최도전과 일령장 노천기와 이령장 조장우는 삼장이 함께 소선 1척을 분멸하여버렸다.
이상은 전라좌도제장

전라우수영 우후 이정충은 대선 1척을 분멸하고
어란만호 정담수는 대선 1척을 분멸하고
해남현감 위대기는 중선 1척을 분멸하고
남도포만호 강응표는 중선 1척을 분멸하고
금갑도만호 이정표는 중선 1척을 분멸하고
목포만호 전희광은 소선 1척을 분멸하고
강진현감 유해와 주부 김남준은 함께 중선 1척을 분멸하고
일령장 윤붕과 충순위忠順衛 배윤과 보주통장 곽호신은 삼장이 함께 적의 소선 1척을 분멸하여버렸다.
이상은 전라우도제장

소비포권관 이영남은 대선 2척을 분멸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은 중선 2척을 분멸하고
사천현감 기직남은 대선 1척을 분멸하고
고성현령 조응도는 대선 1척을 분멸하고
웅천현감 이운룡은 대선 1척을 분멸하고
하동현감 성천유와 당포만호 하종해는 양장이 함께 중선 1척을 분멸하고
거제현령 안위安衛는 중선 1척을 분멸하고
사량만호 이여념은 중선 1척을 분멸하고
진해현감 정항鄭沆은 중선 1척을 분멸하여버렸다.
이상은 경상우도제장
순신은 제장의 공을 고찰한 뒤에 승전고를 울리며 삼도 주사를 거느리고 기고당당하게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는 담종인 무리의 금토문으로 하여 영등포 장문포[장문포의 적장은 그 성명을 누구인지 몰라도 영등포는 종의지였다]의 적굴을 그저 두고 돌아오게 된 것을 분개하였다. 이때는 삼도 수군의 전성시대였다.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육로 제장과 조정에 있는 일부 당인들은 말을 지어 선전하기를 이순신이 삼도의 6만 정예와 1000척 병선과 100만명의 유민을 안고 삼도 연해의 해왕海王 노릇을 한다고 떠들었다. 이는 원균과 이일의 무리로부터 비롯하여 일어난 말인데 권율 김응서의 무리들까지도 그 유언비어에 의혹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시사는 가히 탄식할 일이었다.

▲ 당항포에 정박하던 적군은 이순신이 온다고 하자 낙담하고 혼을 잃었다.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올라 진을 쳤다.
곤양군수 이광악은 진주성에서 목사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을 막아 승전한 장수였다. 이광악은 술을 배에 많이 싣고 한산도로 와서 순신을 보고 전승축하를 하였다. 이광악은 의승장 사명당이란 중 송운 임유정이 적장 청정과 왕래 문답한 기록을 구하여 순신에게 올렸다.

그 기록에는 갑오1594년 4월경에 의승장 송운 임유정이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원수 권율의 지휘를 받아서 가등청정을 만나보려고 3차나 울산 서생포에 찾아 갔는데 처음에는 거절을 당하고 그 뒤에는 겨우 청정이 그 부하 가등희팔加藤喜八이란 장수를 시켜서 임유정과 문답을 하더니 나중에는 청정이 임유정을 맞아들여 면회를 하게 되었다.

이 문답을 일본기록에는 송운문답松雲問答이라 하였다. 송운은 임유정의 호이다. 송운의 일행은 통역 김언복金彦福 장희춘蔣希春의 무리였다. 청정의 곁에는 일본장수들의 진중에 의례히 데리고 다니는 진승陣僧이라는 중 몇이 있었는데 청정의 진승은 일진日眞와 천우天祐라는 중이었다. 그 문답하는 가운데 청정은 조선의 내정을 자꾸 물었다. 임유정은 “장군의 당당한 자격으로 수길의 부하 노릇을 하지 말고 수길을 어떻게든지 조처한 뒤에 관백이 되시오” 하고 동문서답하였다. 청정은 임유정이 일본사정을 모르는 말은 제쳐놓고 “귀국은 보물이 무엇인가?”고 하였다. 임유정은 답하되 “장군의 머리로 보물을 삼소. 장군의 머리를 바치는 자 있으면 천금의 상, 만호의 봉이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소?” 하였다.

어영담 병사로 애통에 빠진 순신
청정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명의 장수 유정이 어찌하여 전라도로 진을 옮긴 것이오?” 하고 물었다. 임유정은 권율이 성주로 오니까 유정은 호남으로 이진하였다고 군사상 정세를 가르쳐 주었다. 임유정은 청정과 행장의 사이에 이간질을 붙여서 서로 싸우도록 애를 썼다. 청정은 거짓 골을 내어 “소서행장과 종의지는 궁벽진 섬에서 소금장사 해먹던 놈들이라오” 하여 거짓말을 하였다.

순신은 보기를 다하매 울분이 저절로 일어나 “어허, 또 큰일이 나겠군. 장래에 무슨 변괴를 빚어낼 모양인 걸…” 하고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당시에 다만 청정의 진뿐 아니라 이것이 일종의 관례가 되어서 행장과 김응서 간에도 왕래문답이 있었다. 권율은 임유정을 시켜 청정과 교섭하고 김응서와 행장은 사이에 요시라가 왕래하였다. 양국 장상將相이 서로 반간계를 쓴다고 하더니 결국은 조선편이 속아 넘어가 요시라의 반간이 성공이 되어서 충무 이공은 감옥으로 잡혀가고 용렬한 원균이 수군을 통솔하다 칠천도 싸움에 전멸을 당하게 되고 원균의 수급이 수길의 행영에 높이 달려서 일본 사람의 수전에 연패한 분풀이를 하게 되고 말았다. 이런 고로 이공은 이 송운문답을 보고 후사를 염려하여 서리가 내리면 곧 얼음이 언다는 의미로 그 난중일기에 통분함을 참을 수 없다고 기록하였다.

순신은 한산도 수루 위에서 매양 달 밝고 한적한 밤이면 시사를 살필 때 여러 방면으로 걱정됨이 많았다. 창연히 바다를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는 때가 많았는데 하루 밤은 시조를 지어 읊어 마음속을 드러내 보였다. 그 시조는 그 노래가 극히 슬프고 강개하며 의미심장한 가운데 은연중 나라를 근심하는 뜻과 세태인정의 험난함을 부르짖는 곡조였다. 그 당시에 누구나 이 음조를 듣고는 동정의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였다.

갑오1594년 4월 9일에 조방장 어영담이 한산도 진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때 한산도 진중에 전염병이 유행하여 순신까지도 병으로 신음하고 난 뒤였다. 아, 슬프다. 전년에 정운이 전사하고 금년에 또 어영담을 병으로 상실하게 되니 순신의 애통함은 말할 수 없었다. 당시 난리 초에 적극적으로 출전하기를 주장하던 장수는 정운 어영담 송희립 이운룡 이영남의 몇몇 사람이던 것인데 이러기에 순신은 어영담을 위하여 광양현감을 그대로 두어 달라는 장계와 또 조방장을 시켜 달라는 장계를 조정에 올려서 철저하게 돌보아 변호한 것은 그 장수로서의 지략과 기량을 사랑하여 국사國事에 힘을 함께하자는 것이었다.

이때 명나라 경략사 송응창, 제독 이여송의 무리 대군은 벽제관 패전 이후로는 일본군의 전투력을 두려워하여 한번도 옳게 다시 싸우지 못하고 심유경 일파의 화의에 쓸리어 우물쭈물 하다가 중국으로 철수하여 돌아가고 오직 유정과 왕필적의 군사만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정도 일본군이 무섭다는 생각에 진주성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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