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8회 ②

순신은 백성들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상감께오서 잡아들이라는 명이 계시니 아니 갈 수 없소. 여러분들의 정성은 고마우나 이렇게 길을 막으면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니 도리어 옳지 못한 일이오.” 순신이 배에 올라 나갈 때에 바다에 지키고 있던 병선과 민선에서는 일제히 통곡소리가 일어났다. 

 
순신은 우후 이몽구, 거제현령 안위, 고성현령 조응도 등 제장을 불러 울분에 찬 군사와 백성을 타일러 진정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간성1)으로 믿고 자기네의 부모와 같이 우러르던 이순신이 아무 죄 없이 이처럼 항쇄2)를 차고 상투를 풀어 뒤로 제치고 옷고름을 풀어헤친 모양을 보고는 군사들은 비록 군령을 지켜서 잠잠하고 있으나 백성들의 울분은 풀릴 수 없었다. 금부도사들은 겁을 집어 먹고 결박한 것을 끌러 놓으라고 명하고 군복을 입히려 하였다.

순신은 듣지 아니하여 “왕명으로 결박한 것을 또 왕명이 아니고 누가 끄르느냐?” 하였다. 그리고 순신은 제장을 불러 진중 창고에 쌓아놓은 군량미 9900석과 화약 4000근과 기관포 300문과 그 외 각선에 비치된 총포와 삼도 각처에 저장된 군량 수만석을 상세히 기록하여 장부를 작성하여 후임자가 오거든 인계하라고 부탁하여 조금도 창황한 기색이 드러나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 이튿날 금부도사는 순신의 앞에 공손히 읍하고 “대감, 어찌 하오리까?” 하고 처분을 물었다.

순신이 떠나자 울부짖은 백성들

▲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이 삼도통제사를 맡게 됐다. 순신의 신임을 받던 부하용사와 제장들을 쫓아내고 괄시한 탓에 군기가 어지러워졌다.
순신은 나섰다. 백성들이 산야를 덮어 모여들고 배를 타고 제승당 앞바다를 덮어 모여들었다. “대감, 못 가시오.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 하고 울며 길을 막았다. 그 중에도 노인 하나가 도사들 앞에 나아가 말하되 “우리 통제사대감이 아니시면 적의 수군이 의주까지 조선 연해 전부를 짓밟아서 오늘날 상감님께선들 조선 땅에서 평안히 앉아서 위엄을 부릴 수 있겠소? 이제 우리 대감을 잡아 가시면 3~4개월이 못하여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는 적왕敵王 수길의 땅이 되지 아니하겠는지 보시오, 내말을” 하고 간곡하게 말하였다. [보라, 과연 그 말대로다.]

순신은 백성들을 바라보며 “상감께오서 잡아들이라는 명이 계시니 아니 갈 수 없소. 여러분들의 정성은 고마우나 이렇게 길을 막으면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니 도리어 옳지 못한 일이오” 하였다. 순신이 배에 올라 나갈 때에 바다에 지키고 있던 병선과 민선에서는 일제히 통곡소리가 일어났다. 순신이 6년 동안에 한산도에서 국방을 위하여 사직을 위하여 애를 쓰다가 떠난 데 대하여 본 저술자는 시 두 수를 지어 영탄의 뜻을 우寓하였다.

전 군수 이기조李基祚의 시는 충렬사忠烈祠의 원운元韻이 된 고로 아래에 기록한다.

육지에 올라서도 삼도지방 내에서는 몇 번이나 많은 민중에게 포위를 당하고 질문을 당하는데 “왜 잡아가느냐, 우리 국민의 은인을!” 하고 민중의 힐난을 종종 받았다. 금부도사들은 순신에게 좋게 하여 달라고 의뢰하고 빌었다. 순신이 민중을 대하여 어명을 순종하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고 타이르니 길을 비켜 주긴 하나 수십리씩 따라오며 분연히 떠들며 “전에 충용장군忠勇將軍 김덕령을 그 무죄한 것을 알고도 때려죽이더니 금년에 또 우리 은인이신 이통제를 잡아간다!” 하며 백성들의 곡성이 길에 끊이지 아니하여 금부관원들은 큰 두통을 알았다.

조정에서 원균 이일 이억기 3인을 당대 명장이라 하여 이순신의 후임으로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이산해 윤두수 이항복의 무리가 원균을 제일로 무서운 장수라 하여 강력 추천하여 순신을 대신해서 삼도통제사를 맡게 되었다. 원균이 병조의 세 당상관을 찾아보았다. 병조판서 이항복은 일찍 말하기를 “이순신 원균 권율은 다 같은 당대 명장이라” 하고 또 어떤 때에는 말을 변하여 “원균은 타인으로 인해 일을 이루는 자이니 어찌 이순신과 대등하게 맞세우겠는가?” 하여 말이 전후가 달라서 이항복이 원균을 옹호하는 심정을 가히 알 것이었다. 이날 이항복이 원균을 보고 통제사가 되었은즉 응당 노력하여 적을 격파하라고 권장하였다.

 
원균은 답하기를 “이 직책이 영화로운 것 아니라 이순신에게 당한 수치를 씻는 것이 상쾌하오” 하고, 적과 싸우는 방략을 말하면 “멀면 편전으로 쏘고 가까우면 장전으로 쏠 것이요, 박격할 때에는 검을 쓰고 이어서 몽둥이를 쓰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지요” 하고 큰소리로 장담을 하였다. 병판 이항복은 원균을 보낸 뒤에 탄식하여 “대장이 된 자가 계책을 운용하여 승리를 거두는 방법은 모르고 창검을 먼저 말하니 이는 일개 군관의 일이라” 하여 탄식해 마지않았다.

오성이 지인지감은 있건만 왜 원평중을 천거하였나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원균은 통제사가 된 것이 큰 성공이나 한 듯이 의기양양하게 미첩을 데리고 한산도에 도임하였다. 순신이 있을 때에 신임을 받던 부하용사며 제장들을 혹은 벼슬을 떼어서 내어 쫓고 혹은 그동안의 전공을 괄시를 못하여 먼 곳에 만호 별장 같은 벼슬을 시켜 좌천을 시켰다. 그런 뒤에 한성서 대관들에게 청탁을 받은 무식한과 부랑자와 주색도 오입장이 파락호들을 통제사의 막내幕內 간부를 삼고 자기는 제승당

 
에서 밤낮으로 여자와 풍악으로 일을 삼고 군사의 조련과 병기의 수리 개선 같은 것은 일체 망각하여 버리고 말았다. 도임한지 석 달 만에 양가 유부녀라도 자색만 있다 하면 탈취하여 통제사 60옹의 미첩이 12인이라고 들리는 말이 해괴하였다.

정유1597년 2월 3일에 이순신이 서울에 잡혀 들어와 그날 밤을 전년 김덕령을 가두었던 금부의 철창 안에서 큰 칼을 쓰고 지냈다. 이튿날 선조가 친국하려 하는 것을 서인 대관들이 반대하였다. 그것은 순신의 웅변과 큰 공이 선조를 깨우치게 할까 두려워함이었다. 그래서 좌찬성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왕명을 받아 추관3)이 되었다. 추관은 삼공4)이 아니고는 못하는 임무지만 찬성은 이상5)이라 하여 추관이 되는 전례가 있었다. 영상 유성룡 좌상 김응남 우상 이원익은 다 이순신과 사사로운 정과 교분이 있다 하여 특별히 윤근수가 추관이 되어 추국을 하게 된 것이었다.

 
순신은 건장한 팔척장신에 큰 칼을 쓰고 금부나졸 수십명에게 끌리어 황토黃土마루를 지나 정릉貞陵골 의정부로 올 때에 길가에는 서울 백성들 수만명이 한산도에서 호랑이떼 같이 무서운 일본군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는 우리 대장군 이순신을 볼 것이라고 식전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충용장군 김덕령도 아무 죄 없이 모모 대관이 몰아 죽이고 이번에는 더 무섭고도 공 많은 우리 장수가 또 몰려서 죽는다고 하여 우리 조선은 소국이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은 용납을 못한다느니 하는 유언비어가 많았다. 혹자는 간신의 무함이니 적국의 반간이니 하는 별별 말이 떠돌았다.

상소로 순신 변호하는 정경달

그 대의는 이순신을 변명하는 문구였다. “적국이 두려워 꺼리는 장수는 이순신이니, 순신의 벼슬을 체직함이 불 가하고 원균으로 대신하게 함도 불가합니다.”

형조좌랑 강항姜沆이 상소를 올렸다. “이순신은 바다의 장성長城인데 그 죄상이 아직 드러나지 아니하였거늘 갑자기 관리들의 의견에 따라 잡아들이고 원균으로 대임시킴은 불가합니다.”

강항의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수은睡隱이다. 적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들어갔다. 풍신수길이 그 학문적인 명성과 신망을 중히 하여 쓰고자 하나 강항이 기탄없이 말하며 굽히지 않으니 일본인이 옛날의 소무蘇武와 같다고 하였다. 귀국할 때에 마침 김섬金蟾과 배를 같이 타게 되었다. 김섬은 함흥 기녀로 천곡 송상현의 시첩이었는데 일본군이 동래를 함락시킴에 천곡은 절사하였으나 김섬은 천곡이 죽은 줄을 모르고 포로가 되어 바다를 건넜다. 수길이 그 문학과, 송부사의 측실이란 말을 듣고 예우하여 일본 부녀자의 훈도를 하게 하였다. 강수은과 같은 배로 돌아와 송씨 댁으로 들어갔다.[수은일기 중에서]

호조정랑 정경달이 상소를 올려 순신을 변호하였다. “이순신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적을 막는 재주는 옛날에도 짝을 이룰 자가 없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진중에 머물러 있는 것도 또 하나의 병법입니다. 어찌 기회를 보고 형세를 살피면서 방황하여 싸우지 않는다고 하여 죄가 되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사람을 죽여 사직이 망하게 되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한산도에 다녀온 위유사 황신이 한성에 도착하여 조정에 진언하였다.

“악의를 내보내고 기겁騎劫이 대신함과 같으니6) 삼도의 장사들이 이로부터 사이가 나빠질 것이요, 염파가 물러가고 조괄趙括이 옴과 같으니7)일국의 백성들은 이로부터 전쟁에 지리라 생각할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이상 여러 현인 지사의 상소와 경고를 다 불청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