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39회

윤근수는 이순신의 영웅적 기백과 전략적 논리에 심취가 되었다. 그 도도유창한 물 흐르듯 하는 웅변에 윤근수의 정신은 출렁이고 의지는 멀리 돌아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인형과 같이 우두커니 앉았다가 악형할 것을 잊어버렸다. 이날은 그만 하고 말았다. 그 진술기록을 본 대소관리들은 다들 탄복하여 모두 순신 같은 당대 영웅을 한번 대면하기를 원하였다.

 
제1차 국문의 상황은 이러하였다. 윤근수는 이순신을 바라보며 “네가 나라의 은혜가 지중하거든 어찌해서 두마음을 품고 적장의 뇌물을 받고 청정을 잡지 않고 놓쳤느냐?” 하는 것이 첫 번 심문이요 또 순신의 죄를 적은 기록의 요지였다. 국문하는 윤근수는 관복을 입은 키가 자그마한 중키 이하 되는 사람이나 심문하는 음성은 웅장하였다. 연령으로 말하면 금년이 회갑인 정유생 61세의 노인인데 순신보다 8년 위였다. 순신의 첫 번째 답은 “의신1)의 책무는 국가의 간성이 되는 데 있었으며 전란 이래 6년 동안이나 되어서 대소 100여번을 싸웠으나 지금까지 재략이 모자라 적을 섬멸하지 못한 죄는 만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지마는, 적에게서 뇌물을 받고 적을 놓아 준 일은 없소!” 하였다.

윤근수 왈 “너는 금번 금부관원이 왕명을 받들고 너를 잡으려 내려갔을 때에도 거만하게 관원을 욕하고 사졸과 백성을 선동하여 왕명을 받든 금부관원에게 폭행을 가하도록 시키고 남삼도의 연로에서도 관원들에 대한 방해가 대단하였다한즉 네 죄를 네가 알겠지?” 하는 것이 둘째 번 심문이었다. 그러나 순신은 이런 가치 없는 질문에 변명하려고도 아니하고 입을 다물고 말이 없어 천연한 태도로 앉았다.

첫날 국문은 이러한 말들로 그치고 말았다. 윤근수도 순신과는 초면상봉이고 또 그 무죄유공한 것은 마음속에는 아는 까닭이었다. 조정에서는 순신을 미워하는 무리들은 첫날의 국문이 철저하지 못함을 공격하는 의논이 또 일어난다. 순신의 죄는 임금을 속이고 적장에게 매수가 되어 조국을 팔고 한 악인이니 마땅히 정강이뼈가 부러지도록 엄형을 하여야 실토를 하리라고 떠들어서 기어코 김덕령과 같이 장하杖下의 원혼이 되게 하기를 주장하였다.

윤근수는 자기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을 후회하였다. 악비를 몰아 죽인 진회秦檜의 일을 생각하고 후세의 공론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퍽 영리하다. 만일에 조금이라도 공정한 체하는 태도를 취하여 순신을 유리하게 하다가는 자기마저 순신과 함께 몰릴는지도 모르는 국세였다. 눈치 빠르고 영민한 윤근수는 첫날 국문에서 벌써 이순신의 위인을 간파하였다. 그 당당한 태도와 늠름한 기개가 자기를 위하여 구구한 변명을 하지 아니하는 정중한 아량은 추관인 윤근수뿐만 아니라 모든 참석한 관리들로 하여금 그를 두려워하는 관념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이튿날은 모든 악형하는 형구를 법정에 진열하고 순신의 제이차 국문이 개시되었다. 윤근수는 묻기를 “경상우수사 원균이 네게 청병할 때에 너는 어찌 해서 곧 출병하지 아니하여 원균이 고군으로 분전하다가 대패를 당하게 하였는가?” 하였다. 순신은 우렁찬 목소리로 “아니오, 사실이 그렇지 않소. 그때는 원균이 이미 패전한 뒤이며 의신은 몸이 변방의 장수가 되어 그 관할하는 경역을 넘어 타도로 출전함에는 조정의 왕령이 없고는 자의로 못하는 것이나 국가의 위급지시를 당하여 부득이 조정에 보고만 하고 그 허락을 얻기 전에 경상도로 경역을 넘어 출전하여 원균을 응원하여 각처 연해에서 적의 함대를 격파 소탕하였은즉 임의로 월경한 죄밖에는 없소” 하였다. 윤근수는 순신의 대답을 듣더니 무엇을 생각하는지 앉았다가 다시 “옥포 당포 사천 당항포 한산도 견내량 안골포 부산진의 여러 번 싸움에 원균이 매매히 공이 으뜸이거든 어찌해 너의 공인 것같이 성상께 아뢰어 군부를 속였는가?” 하였다.

순신의 당당한 기세에 눌린 윤근수

▲ 충효를 모두 잃은 이순신을 주변인들은 측은하게 여겼다.
순신의 대답은 “그는 갑의 공이니 을의 공이니 할 것 있소? 사직의 신령이 도우심이요, 삼도수군 제장이 역전한 공이며 만인이 본 바이니 세상에서 정평이 있을 것이오.” 하였다. 윤근수는 또 묻기를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제승당이니 운주각이니 하는 집을 짓고 밤낮 주색에 빠졌다는 죄에 관하여서도…” 하고 질문하였다. 순신은 말이 너무 비루하여 대답이 없었다. 순신이 제 죄를 자인하여 대답이 없다는 것으로 기록관이 적었다.

윤근수는 또다시 “적장 청정이 나온다는 일자를 알고도, 또 잡으라는 도원수의 장령을 받고도 왜 잡지를 않았는가? 청정에게 뇌물을 받고 놓아버린 것이라지?” 하는 데 대해서는 순신이 비로소 말문을 열어 그때 사정을 설명하였다.

“청정과 행장 두 놈이 비록 반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저의 나라의 군사상 비밀을 우리나라의 군인에게, 하물며 일도의 육군대장이 되는 병마절도사[김응서]나 또는 도원수의 진중을 찾아와서 누설할 리가 있소? 정녕코 간교한 말로써 우리 주사를 대해로 유인해 내어서 십면매복2)으로 일거에 격멸하자는 것이니 그 이리떼 같은 놈들이 와서 고하는 감언이설을 믿고 그 함정 속에 스스로 빠지겠소? 그놈들이 임진이래로 수전이란 우리 수군에게 백전백패하여 배겨 낼 수가 없으니깐 궁여의 일책으로 이런 사특한 반간계를 짜낸 것인데 어찌 빤하게 알고 속겠소? 그러니까 설사 그날 그 시에 청정의 병선이 나온다 하더라도 정녕코 대마도 해로에다가 복병을 많이 하고 대기하고 있을 것이니 우리가 병선을 많이 몰고 간다하면 적이 모를 리가 없을 것이요, 그렇다고 적게 몰고 간다하면 도리어 적의 반격을 받아 전멸이 될 것이 아니겠소?

또 풍신수길은 수전에 연패한 분을 갚으려 하여 새로 병선을 많이 지었다 하니 적은 일본 전국의 힘을 기울여 오거든, 우리는 다만 남삼도의 수군만을 가지고 지리의 험이와 조수의 순역을 잘 이용하여 이소격중3)하는 전법을 취할 것이요, 적이 아무리 많은 병선을 가졌다 하여도 한산도 요새를 넘지 못하고는 조선의 해상권을 즉 제해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니 무슨 소용이 있겠소? 부산일대에만 웅거하고 있은들 조선해상 즉 삼남 해상의 경략 상에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요해지처를 지키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출동하여 교전을 한다면 모든 도서와 항만이며 조수의 순역과 강해의 천심과 암초의 유무가 다 우리의 도움이 될 것이 아니겠소?

그런데도 만일에 섣불리 대해로 나갔다가 소수의 병선을 가지고 적에게 기선을 빼앗겨서 적들이 우리의 허를 찔러 한산도를 넘어 전라도 바다로 나아가서 충청도 연해를 분탕한 뒤에 한강을 거슬러 올라 서강西江을 점령하고 용산창龍山倉의 식량길을 끊는다면 조선천하는 전쟁의 와중에 다시 들어가게 될 것이요, 우리 수군은 신중히 큰 것을 지켜 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오.”

윤근수는 이순신의 영웅적 기백과 전략적 논리에 심취가 되었다. 그 도도유창한 물 흐르듯 하는 웅변에 윤근수의 정신은 출렁이고 의지는 멀리 돌아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인형과 같이 우두커니 앉았다가 악형惡刑할 것을 잊어버렸다. 말하자면 악형할 용기를 상실하였다. 그 진술기록을 본 대소관리들은 다들 탄복하여 모두 순신 같은 당대 영웅을 한 번 대면하기를 원하였다. 이는 충무전서 중의 행장록에 있는 일편이었다.

조정에 충만한 서인과 북당들은 제이차 국문하는 날에도 이순신이 그 죄를 자백 또는 자복하는 실토를 받지 못하였다 하여 해평부원군 윤근수를 불신임하는 의논이 일부에서 끓어올랐다. 그날 밤에 윤근수의 집에는 순신을 죽도록 엄형만 하면 견디지 못해 무복4)하여 실토를 하든지 또는 혹형에 죽든지 할 터이니 사정을 부디 두지 말고 청정에게 매수되어서 도원수의 장령을 거역하였다는 죄상을 자복하게 하라는 서간과 방문이 연속하였다.

이튿날인 셋째 번 국문에는 윤근수는 자기의 벼슬과 처지를 돌아보는 필요상 순신을 고문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이날 국문의 중심문제는 “네가 적장 청정에게 뇌물을 받고 사로잡지 않고 놓아 주었다지? 바로 자백하라!” 하는 것이었다. 순신은 처음에는 부인하였지마는 여러 번 물음을 받을 때부터는 “나는 할 말을 다하였소” 하고 입을 다물었다. 윤근수는 마지 못하여 고문 악형하기를 엄명하였다.

금부형라들은 순신을 주리를 틀기 시작하였다. 순신의 두 다리는 살이 터져 피가 흘러서 정강이뼈가 허옇게 들어나 보인다. 전년에 사천 바다의 싸움에 제일선에서 적의 총알에 맞던 고통보다 더 지독하였다. 순신은 두 눈을 감고 말이 없었다. 주리 뇌형을 틀어도 불지를 아니한다 하여 효과를 보지 못하고 단근질을 또 시작하였다. 벌겋게 달은 인도引刀는 순신의 넓적다리를 찢었다. 순신의 얼굴빛은 변함이 없었다.

윤근수는 순신을 가리켜 “전에 훈련원에서 말을 달리다가 말이 무릎을 꿇어서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도 제 손으로 버들가지를 벗겨 끌어매고 다시 말을 타고 달리던 독한 인물이다.” 하고는 고문을 파하였다. 순신은 긴장하였던 신경이 풀어지는 서슬인지 몰라도 그만 기절하여 버렸다.

금부 옥졸마저 순신을 추앙하다

▲ 이순신의 죄를 자백받지 못하자 조정의 간신들은 윤근수의 집에 협박장을 보내 자복을 받으라고 조정했다.
53세의 몸이며, 6년 동안이나 전쟁에서 노심勞心 노력努力으로 쇠약해진 몸이며, 8•9일간이나 걸음을 재촉하여 천리의 길을 잡혀온 몸이며, 억울한 무함의 악형을 당하는 입장이라 비록 철석같은 마음인들 아니 분하랴! 순신은 그날 밤에 옥중에서 몸에 열이 심하고 고통이 대단하였다. 명의 양동지가 영웅을 염려하여 옥문 밖에 찾아와서 위문하고 씻을 약과 가루약을 드렸다. 금부 옥사들도 순신의 일에 동정하여 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에게 몰래 말하되 “성상의 총신이 되는 모모대관에게 뇌물과 인정人情을 쓰고 주선하면 면죄할 수도 있으리라” 하여서 이분은 이 말을 숙부 순신에게 고하였더니 순신이 이분을 질책하되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도를 위반하여 살기를 바라겠느냐?” 하고 불청하였다. 그 도리를 지켜 흔들리지 않는 지조가 이러하였다.

이때에 서울에서는 순신의 인척과 지우와 옛 부하로 있던 사람들과 지금 한산도에 있는 제장들의 식솔이 혹시나 순신의 진술 속에 자기네의 이름이나 나오지 아니할까 두려워하며 혹시나 그 죄를 자기네에게 덮어씌우지나 아니할까 하여 모두 전전긍긍할 뿐이요 아무도 감히 돌보아 주는 이가 없었다. 오직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옥중으로 그 군관을 보내어 인삼탕을 드리고 미음을 쑤어 들여서 위문하고 서간을 올렸다. 금부 옥졸들도 순신의 충의를 추앙하는 사람들이 알선하여 준다.

저술자는 여기에 의민공毅愍公 완흥군完興君 이억기의 행장을 약기한다.

이억기의 자는 경수景受요 종실 심주군沁州君 연손連孫의 아들이니 어릴 때로부터 재지와 용력이 과인하였다. 나이 약관에 한강을 건너는 때에 갑자기 폭풍을 만나 나룻배가 거의 전복하게 되었다. 이때에 이억기는 10여장이 되는 언덕 위로 배에서 뛰어올라 건너 나가 버렸다. 부친의 병에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자르기까지 하여 효행이 드러났다. 무과에 올라 경흥부사에 올라 울지내와 니탕개를 쳐 파하고, 온성부사에 옮겨가 울마적鬱馬赤을 쳐 베었다. 당시 우상 정언신은 “이순신 이억기는 명장 중에도 으뜸”이라 하였다. 순천부사로 되었다가 조정의 천거로 전라우수사가 되어 칠년간 바다에서 40여차로 승첩하여 이순신의 유일한 고굉심려5)로 근무하던 명장이었다.

순신은 이억기의 군관을 보고 “다시는 내왕을 하지 말게. 혐의를 받을 것이야. 내가 죽으면 영감밖에 수군을 맡을 사람이 없지 아니한가? 나를 생각지 말고 나랏일을 위하여 영감의 몸을 생각하라고 말하게. 일본수군이 전라우도 바다를 범할 날이 멀지 아니하리니 영감께 준비하라고 하게” 하고 이억기의 서간을 읽으라 하여 들은즉 그 요지는 이러하였다.

今觀主帥元公之制置方略則 舟師不久必敗 我輩不知其死所矣

“지금 통제사 원공의 방략을 보니 수군이 오래지 않아 반드시 패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죽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 글은 의미가 심장하여 닥쳐올 사변을 역력히 간파하고 순신의 비참한 횡액에 동정의 눈물을 뿌리는 말이었다. 이억기는 또 자기와 친분 있는 병조판서 이항복과 경림군 김명원에게도 서간을 보내어 순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실을 열렬하게 말하고 자기 집안 식구 100명으로써 이순신의 충의를 담보하겠다고 상감께 진달하라고 권고하였다.

순신의 부하군관이던 송희립 황대중黃大中의 무리가 견족6) 상경하여 대궐문 앞에 나아가 순신의 원통하고 억울한 사유와 한산도의 당일 사정과 암행어사란 작자 남이신의 무고를 일일이 변호하여 극구 읍소하였다.

마침 이때에 함경북도 북병영 군관 10여명이 오랑캐의 사건으로 상경하였다가 병조판서 이항복과 도승지 심희수沈喜壽 등의 사저를 방문하고 탄원서를 제출하여 말하되 “이순신은 당대 명장이옵고 또 충의강개한 사람이오니 대감께서 성상의 탑전에 여쭙고 북병사를 삼아서 호적을 소탕하게 하옵소서” 하였다. 심희수만은 이순신의 재략을 숙지하는 바이라 상주하여주마고 쾌락하였다.

해평군 윤근수는 선조에게 아뢰되 “이순신을 아무리 고문 엄형을 하여도 실토를 하지 아니하오니 그 유죄무죄를 알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유성룡은 묵묵무언하고 그 외 제신은 모두 “가참可斬이로소이다” 하였다. 경림군 김명원이 나서서 “일본인이 섬나라에서 생장하여 배타는 기술에 익숙하다 하거든 청정이 어찌 7일 동안이나 섬에 걸려 있었겠습니까? 아마도 순신의 죄는 무고인가 합니다” 하였다. 선조는 김명원의 말을 듣고 깨달아 “내 생각에도 그러하다”고 하였다.

伏以 李舜臣 罪名甚嚴 聖上不卽加誅 或示可生之道也 凡罪人 一次經訊 或多傷斃 雖有可論之情 已無所及矣 臣竊憫焉 今舜臣 旣經一次刑訊 若又加刑 難保其必生 當壬辰敵艘蔽海 勢若滔天 守土之臣 棄城者多 專閫之將 全師者少 倡率舟師 連挫兇鋒 國內人心 稍有生意 倡義者增氣 附敵者回心 厥功鉅萬 至加崇秩 賜以統制之任 手下才勇 咸樂爲用 夫將臣者 軍民之司命 國家安危之所繫 故古之帝王 別示恩信 以盡其用 雖一藝之士 皆曲護而全安之 以示人主愛惜人才之意 況將臣之有才如者乎 才兼水陸 無或不可 如此之人 未易可得 邊民之所屬望 敵國之所畏憚 若不念功罪之相準 而終致大辟 有功者無以勸 有能者無以勵 而徒爲敵國之幸也 一舜臣之死 固不足惜 於國家所關非輕 豈不重可爲之慮乎 伏乞特減刑訊 使之立功自效則 其感戴聖恩 當隕首圖報矣 我聖主 中興圖閣之勳臣 安知不起於今日之罪人乎

“엎드려 아룁니다. 이순신은 죄명이 심히 엄하나 성상께서 즉시 벌주지 아니하심은 혹 그 살릴 수 있는 길을 보이심일 것입니다. 무릇 죄인이 한번 심문을 거치고는 그대로 상하여 쓰러져 버리고 말아 설사 좀 더 논의할 마음이 있더라도 이미 목숨이 끊어진 뒤라 어찌할 길이 없으므로 신은 속으로 안타깝게 여겨왔습니다. 이제 순신이 이미 한번 형벌을 겪었는데 만약 또 형벌을 가하게 되면 반드시 산다고 보장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임진년에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어 세력이 하늘까지 치솟는 듯했을 때 국토를 지키던 신하는 성을 버린 자가 많고 국방을 맡은 장수는 군사를 보전한 자가 적었는데 수군을 거느리고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나라 안 민심이 차츰 생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자들은 기운을 돋우고 적에게 붙었던 자들도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의 공로야말로 참으로 컸으므로 벼슬을 더해주고 통제사의 소임을 내렸으며 부하들의 재주와 용력이 모두 즐겁게 쓰였습니다. 하물며 순신과 같은 장수의 재질을 가진 자는 수륙전의 재주를 모두 겸비하여 못하는 일이 없으니 이런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변방 백성들이 바라는 자요 왜적들이 무서워하는 자입니다. 만일 공과 죄를 서로 확실히 견주어보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리기까지 한다면 공이 있는 자도 권하지 않을 것이요 능력이 있는 자도 애쓰지 않을 것이니 도리어 적국에 다행스러운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한 사람 순신을 죽임은 굳이 아깝지 않으나 나라에 관계된 것은 가볍지 아니하니 어찌 걱정할 만한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탁은 또 “순신이 만일에 두마음이 있다하면 신의 권속 40여인 들어 보증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간하였다.

나라일이야 어찌 되었던 나만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무리들, 내 당색의 다수인의 비위만 맞추어 내 벼슬길이나 올라가기로만 일을 삼는 무리들, 내 공을 들어내기 때문에 승기자勝己者를 배척하고 무함하는 무리들, 이러한 충량지신을 참해하고 모함하는 사간원이니 사헌부니 홍문관이니 승정원이니 하는 무리들, 붓을 잡고 문장으로 업을 삼아 오군요순吾君堯舜이니 교풍정속矯風正俗이니 하는 무리들, 외모는 당당하나 내정은 부패된 무리들이 국가의 원로인 정탁의 상소에 대하여 그 글 뜻의 정대 충직함에 감히 정면으로 싸우지 못하였다.

선조는 무죄한 김덕령을 형살한 뒤에 후회하던 때이며 순신의 전후의 큰 공을 돌이켜 생각하던 때이라 마침내 정탁의 소장을 보고 기뻐하며 순신의 죄를 특사하고 백의종군을 명하였다.

4월 1일에 순신이 옥문 밖을 나왔다. 2월 3일에 입옥하였다가 4월 1일에 출옥하니 그 기간이 57일이었다. 순신이 한산도에서 체포 명령을 받을 때에 명이육오7)를 얻어 “태양이 땅속에 들어가는 것이 명이”라느니 “재지와 역량을 감추고 마음만을 밝힌다”느니 “기자箕子의 바름”이니 하여 전도가 험난할 것은 예측하였으나 “나중에는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순신은 역리에 밝아 매일 괘를 뽑아보는 관례가 있었으며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순신을 반갑게 맞은 백성들

 
순신이 옥문을 나와 남대문 밖 여차旅次로 나왔다. 판서 윤자신尹自新과 비변사 낭청郎廳 이순지李純智가 사처까지 찾아와 위문하였다. 영의정 유성룡, 판부사 정탁, 도승지 심희수, 경림군 김명원, 대사헌 노직, 병조참판 이정형, 병사 곽영의 무리 여러 대신과 대관이 그 자제 및 겸인을 보내어 위문 서간을 드렸다.

순신은 도원수가 유진한 초계로 가는 길에 고향인 아산에 들어가 분묘와 사당에 배알하였다. 그때에 순신의 모부인 변씨는 아직도 전라도 순천부 고음천리古音川里 정씨가丁氏家에 있었던 것이었다.

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에 모부인을 순천에 있게 하고 공무의 여가에 종종 근친하던 것이었다. 아주 한산도나 또는 더 가까운 곳에 모시지 아니한 것은 다른 제장들이 멀리 부모처자를 떠나 있는 정경을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 모부인 변씨는 순신이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서 노병이 더하여 순신의 꿈자리가 사납던 4월 11일에 83세의 노령으로 별세하였다.

11일 새벽에 순신은 꿈이 지극히 흉하여 병중에 계신 모친을 우려하여 눈물을 금치 못하였다.

16일에 모부인의 영구는 그 아우 우신禹臣과 모든 조카들이 모시고 뱃길로 아산 본댁에 돌아와 빈소를 차렸는데 주상은 장조카 전 찰방察訪 뢰蕾가 승중상8)으로 주장하고 호상9)은 오종수吳從壽요 제복製服은 전경복全慶福이 맡아 하였다. 17일부터 금부관원이 길을 떠나기를 재촉하였으나 19일에야 모친의 영전에 곡하고 금오랑을 따라가며 애통하여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이미 이르렀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였으나 부모 또한 돌아가셨으니 천지간에 나와 같은 일이 있으랴” 하고 통곡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충효를 모두 잃은 데 대해 이충무와 김충용10)이 다 같이 한숨지었다.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나 죄가 이미 이르렀고, 부모에게 효도를 하고자 하였으나 부모 또한 돌아가셨다” 함은 이충무의 큰 탄식이요, “충을 펴지도 못하고 도리어 효를 굽히게 되었다” 함은 김충용이 죽음에 이르러 한 말이었다.

순신은 중로에서 도원수 권율이 순천부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27일에 순천부에 당도하였다. 전날의 부하이던 장사들이 구름 모이듯 모여들어 순신이 간신들 손에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을 반갑게 여겨 조문하였다. 권율도 군관을 보내어 순신에게 문안하고 상중에 멀리 와서 몸이 곤할 터이니 원기가 회복되거든 일을 보라고 은근한 인사를 전하였다. 권율은 순신을 두려워하며 미워하며 멀리 한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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