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47회

막내 이면은 나이 스물하나요, 아직 총각이었다. 혈기가 넘치고 말타기, 활쏘기와 검술에 정통하였으며 무용이 절륜하여 그 부친의 풍도가 있었다. 순신도 항상 자기를 닮은 것을 더 사랑하였다. 이면은 신주와 모친 방씨와 집안사람들을 피난가게 하고, 자신은 7척 장검을 들고 적병이 온다는 곳으로 마주 나갔다.

 
남원 선비 조경남趙慶男은 충의지사였다. 의병을 일으켜 죽음을 각오한 부하 10여인을 데리고 지리산에 웅거하여 운봉 각 마을에 횡행하는 적들을 습격하여 합 50여급을 베고 또 남원 요천蓼川에서 요시라의 소부대를 격파하고 진안鎭安현감 오장吳長의 군사와 운봉현감 남간南侃의 군사와 합세하여 평조신의 후군을 물리치고 안음에 흩어져 있는 적을 사살하여 200여급에 달하였다.

평안병사 이경준李慶濬은 평안도 정병 2000을 거느리고 남원에 내려와 구례와 곡성지방에 있는 소서행장의 후군을 물리치고 10여급을 베었다.

정유1597년 10월 14일에 이순신은 밤에 꿈이 흉하여 궁금하고 걱정하던 차에 집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개봉하기도 전에 골육이 떨리고 심기가 어지러웠다. 서간은 차자 예䓲의 것인데 겉면에 통곡痛哭이 썼기에 떼어본즉 막내 면葂의 전사한 소식이었다. 순신은 애통하기를 금치 못하였다.

벽파정하의 싸움에 일본의 대함대가 참패를 당하고 관야 사령관이 이순신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는 말을 들은 모리수원 가등청정 흑전장정의 무리는 충청도 천안 방면에 있었다. 부하를 명하여 아산에 있는 이순신의 가족을 잡아다가 군중에 볼모를 삼으려 하여 사로잡아 오기를 엄명하였다.

순신의 본가에서는 하루는 일본군 일개 부대가 백암리를 향하여 풍우같이 몰아온다는 급보를 받았다. 장자 회薈는 그 부친을 따라 순신의 진중에 있었고 차자 예가 부친으로부터 가호를 보전할 방책을 들었기 때문에 가정家丁을 내놓아 사방의 동정을 살피고 신주와 모친 방씨와 집안사람들을 데리고 피난할 준비를 하였다. 막내 이면은 나이 스물하나요, 아직 총각이었다. 혈기가 넘치고 말타기 활쏘기와 검술에 정통하였으며 무용이 절륜하여 그 부친의 풍도가 있었다. 순신도 항상 자기를 닮은 것을 더 사랑하였다.

이날에 면은 “그놈들이 분명히 한산도와 벽파진 대패전의 원수를 우리에게 갚으려 하여 우리 가족을 잡아다가 부친을 곤란케 하자는 계획적 행동인 듯하니 나는 앞을 서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하여 그런 비루한 계획을 단념하도록 할 것이니 형님은 신주와 모친을 모시고 뒷문으로 나가 피난하세요” 하고 “수단경예귀신동색手剸鯨鯢鬼神動色” 1)이라고 새긴 7척 장검을 들고 적병이 온다는 곳으로 마주 나갔다.

일본 장수와 맞서 싸운 이면

이면은 집 동쪽 적은 고개를 넘어 말을 달렸다. 5리나 간즉 약 50명의 기보병이 항오를 지어온다. 이면은 적을 향하여 “너희들 중에 통역이 있거든 나서라” 하고 외쳤다. 말 탄 적장과 통역이 나서며 “네가 누구냐? 이순신의 아들이냐?” 하고 묻는다. 이면은 “오냐, 나는 이통제의 셋째 아들 이면이다 너희들에게 깨우쳐 줄 말이 있어서 왔다. 들은즉 너희 임금 풍신수길이 100만의 군사와 천척의 병선이 있다 하거든 벽파진의 원한을 못 갚아서 충신의 집을 습격하고 그 가족을 해하려고 하니 그런 비겁한 야만적 계획이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적병은 그 당돌하고도 대담한 것을 보고 놀랐다. 적장은 “내가 너의 가족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 만일에 네가 항복만 하면 너도 살리고 너희 가족도 해하지 아니하고 데려다가 평안히 살게 할 것이다” 하였다. 이면은 껄껄 웃으며 “이통제의 아들이 항복할 듯 싶으냐? 잔말 말고 내 칼을 받아라!” 하고 칼을 들어 그 장수를 겨누었다. 좌우에 있던 적병들이 이면에게로 달려들려 할 때에 그 적장은 소리를 질러 그것을 못하게 막았다.

▲ 일본 적군들과 장수 용천대도는 당돌하고 대담한 이면을 보고 과연 장군 이순신의 아들답다고 생각했다.
적장은 “오냐, 네 뜻이 장하다. 그러면 나하고 싸워볼까?” 하고 그 장수는 말을 달려 나왔다. 그 장수의 이름은 용천대도龍泉大刀라 하는 사람이니 흑전장정 막하의 일류 검객이었다. 수염이 팔자로 나고 얼굴이 크고 눈에 광채가 있고 키가 장대하고 몸에 갑옷을 입었다. 그는 이면을 보고 “네가 갑옷과 투구를 아니 입었으니 나도 갑옷과 투구를 벗을 테다” 하고 저의 진중에 들어가 벗고 나왔다. 이면은 적장의 행동을 보고 적이나마 무사의 기풍이 있는 것을 장하게 여겼다. 적장 용천대도는 칼을 들어 이면의 머리를 엄습하였다. 그는 이면을 어리게 본 것이었다. 이면은 적의 칼을 피하면서 적장의 왼편 옆구리를 칼끝으로 찔렀다. 적장의 왼편 옆구리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러나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닌 듯하였다. 적장 용천대도는 전년의 용인 싸움에서 삼도 감사의 5만대군도 이 칼로 물리쳐 버리고 조선의 용장 백광언 이시례도 한칼에 베었거든 이제 청년 하나를 어쩌지 못하랴 하다가 이면의 칼 쓰는 법이 심상치 아니한 것을 보고 정신을 가다듬어 두 사람은 어우러져 싸웠다. 이면은 공격을 버리고 수세를 취하여 적장의 칼 잘 쓰는 틈을 타서 찌를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나이 어린 적에게 먼저 옆구리를 찔린 것 때문에 연해 공격을 취하였다.

양인이 살기가 고조되었다. 이번 칼에는 또 이번 칼에는 하고 적장은 심히 초조하나 이면은 용하게도 적의 칼끝을 피하였다. 마침내 오락가락 50~60 회합을 싸워도 승부가 끝나지 아니하였다.

이면은 도로 공세를 취하여 이면의 칼끝은 자주 용천대도의 머리 쪽을 침범하였다. 이것을 본 용천은 일종의 공포심이 일어났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러기를 거의 일각이나 버티다가 면의 칼끝은 용천의 가슴을 찔러 말에서 떨어졌다. 이면은 말을 달리며 칼을 걸고 다시 전통에서 화살을 빼어 내닫는 적장을 향하고 활을 쏘았다. 활시위에 따라 연해 두 장수가 이면의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적병은 적장이 셋이나 죽어도 물러가지 아니하고 이면의 후원이 없는 것을 요행으로 하여 일제히 조총을 쏘며 따라온다.

적병 하나가 미리 와서 풀숲에 복병하고 있다가 돌연히 일어나 이면을 보고 총을 쏘았다. 이면은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아 말에서 떨어졌다. 적병들은 이면은 죽은 줄 알고 그 준마를 취하고자 하여 이면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말을 잡아 가지고 진중으로 들어간다. 이면은 정신을 차려 칼을 집고 일어서 말을 도로 빼앗으려 하였다. 그동안에 적병은 이면을 에워싸고 칼로 찔렀다.

이면이 비록 용감하나 장시간 강적과 싸워 피곤할뿐더러 왼편 어깨에 총상을 입어 전신에 피가 묻고 또 말을 잃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면의 칼이 휘두르는 바람에 적병들도 많이 상하였다. 적장이 이면이 싸우는 뒤를 돌아가 배후를 찔러서 이면 공자도 전사하고 말았다.

먼저 이면에게 가슴을 찔려서 말에서 떨어졌던 용천대도는 이윽고 눈을 뜨더니 “아깝다, 이면이여. 진실로 장수 가문의 자제로다. 조선에도 사람이 있다. 우리 일본의 원의경源義經(미나모토 요시쓰네) 남정행2) 같은 청년이다.” 말하고 눈을 감고 죽어버렸다. 순신의 가족은 그 시체를 찾아 안장하였다.

후일에 순신이 고금도古今島로 진주하였을 때에 이면을 살해한 적장 귀지조가 흑전장정을 따라 해남에 가서 배에 올라 싸우다가 순신에게 생포되었다. 그날 밤 순신의 꿈에 면이 와서 울며 “저를 죽인 귀지조를 생포하셔서 그자가 진중에 있으니 아버지께서 소자의 복수를 하여 주세요” 한다. 순신이 꿈속에서 답하기를 “네가 살아서 장사였거늘, 죽었다고 어찌 적을 죽이지 못하느냐?” 하였다. 면은 “소자가 적의 손에 죽은 고로 아직 적을 겁내는 마음이 남아있고 또 유계와 명계가 길이 달라 감히 적을 죽이지 못합니다” 하고 통곡하며 간다. 순신이 크게 놀라 잠을 깨어 포로된 적들 중에 아산에서 면을 죽인 귀지조를 찾아내었다. 순신은 도부수刀斧手를 명하여 귀지조를 베어 면의 영을 위로하고 제문을 지어 추도회를 행하였다. 순신과 순신의 장자 회薈와 조카 분芬과 완莞이 곡하며 애통해하였다.

嗚呼 天胡不仁 我死汝生 理之常也 汝死我生 何理之乖也 天地昏黑 白日變色 哀我小子 棄我何歸 英氣脫凡 天不留世耶 余之造罪 禍及汝身耶 今我在世 竟將何依 號慟不已 度夜如年3)

하늘은 어이 어질지 않으신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가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그러진 이치가 어디 있는가! 천지가 캄캄하고 햇빛도 변하는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여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로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이제 내가 세상에 살아본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꼬! 슬퍼 울부짖을 뿐이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구나.

정조 때에 직제학 서유방徐有防이 상주하기를 “이순신의 막내 아들 면이 적을 쳐서 세 적장을 사살하고 적에게 죽음을 당했거늘 아직 표창이 없으니 실로 소대4)의 흠이 되는 일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대신에게 문의하였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순신이 통제사 시절에 그 아들 면이 고향 집에 있다가 적 한 부대를 맞아 적장 셋을 죽이고 본인 또한 죽으니 당시에 총각이라 참으로 충무의 아들이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는 이조참의를 증직하였다.

이때에 순천부사 우치적이 순신의 영을 받아 이정충 등 7장을 거느리고 해남읍에 들어가 적을 소탕하여 13급을 베고 치안을 유지하였다.

목포 앞에 있는 보화도5)는 배를 감추기 좋은 양항이라 하여 순신은 임시 가병영을 정하여 근거지로 하여 임시 관사를 건축하였다.

선조가 순신에게 은혜 베풀다

10월 24일에 해남에서 적의 군량 322석을 우치적 등 제장이 탈취하여 수납하였다. 선전관 박희무朴希茂가 교지를 받들고 서울서 내려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수군 5000과 병선 70여척을 거느리고 강화도江華島에 왔다 하고 진린이 남하하면 주둔할 만한 근거지를 정하여 알아 올리라는 것이었다. 순신은 고금도6)가 합당하다는 뜻으로 답하고 자기는 보화도에 있기로 작정하였다. 장래에 명병과 우리 주사가 한곳에서 같이 지내기 어려울 것과 명병이 싸우는 데 방해는 될지언정 도움이 옳게 되지 못할 것을 미리 간파하였으나 후일에 진린이 사과하고 동거하기를 원하므로 그도 못하였다.

▲ 일본 장수 가등청정은 울산서 도산에 성을 쌓아 근거지를 만들었다. 그의 부하들이 울산성을 에워쌌다.
순신이 날마다 수천명 일꾼을 독려하여 병선을 신조 개수하고 군기를 정비하기에 골몰하였다. 영암군수 이종성李宗城이 군량미 일천석을 수납하였다. 진사 최준崔準이 군량미 50석을 보탰다. 영장사군관 박주생朴注生이 적 2급을 베고 오고 무안의 진사 김덕수金德秀도 군량미 50석을 보탰다. 이것이 다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하여 이통제장군을 돕는 것이었다.

순신이 4월 11일로 모친상을 당한 이래로는 비록 나라 일을 위하여 기복7)하고 출전은 하였을지언정 심중으로는 상례를 지켜 일체 어육을 입에 대지 아니하여 50세가 넘은 나이인 순신은 형용이 점차로 쇠퇴하여진다. 이순신李純信 안위 우치적 송희립 제만춘 이언량 이하 제장들은 크게 근심하여 순신에게 형편에 따라 개소8)하기를 누누이 간하였으나 순신은 불청하였다. 제장은 이 뜻을 도원수 권율에게 와서 조정에 고하였더니 권율도 역시 우려하여 선조에게 말을 올렸다. 선조는 교유서를 내렸다.

聞卿尙不從權 諸將爲悶云 私情雖切 國事方殷 古人云 戰陣無勇 非孝也 戰陣之勇 非行素氣力困憊者之所能爲 禮有經權 未可固守常制 卿其遵予意 速爲開素從權

들으니 경이 아직도 형편에 따르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히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 비록 간절하나 나라의 일이 바야흐로 급하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전쟁터에서 용감하지 못하면 효가 아니라고 하였으니 전쟁터의 용맹은 소찬으로 기력이 약해서는 능히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법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나니 원칙만을 고집해서는 아니 된다. 경은 내 뜻을 따라 속히 개소하여 형편에 따라 대처하도록 하라.

그리고 선조는 어육으로 만든 진수성찬을 많이 하사하였다. 순신은 이것을 받고 비감한 마음이 더욱 간절하고, 은혜가 융숭함을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한편, 소사평에서 모리수원 가등청정 흑전장정 등 적군을 물리친 명나라 장수들은 다시 경상도 해안에 근거를 잡고 웅크린 일본군을 치려고 경략사 양호 이하 마귀 해생 등 33장이 대군을 끌고 세 길로 나누어 내려가니 중로의 대장은 고책의 군사 1만 2000인이요, 좌로의 대장은 이여매의 군사 1만 3000인이요, 우로의 대장은 이방춘李芳春 해생의 군사 1만 1500인이었다.

당시는 11월경이었는데 조선장수로서는 도원수 권율은 군사도 몇 명도 없이 양호의 진중에 수행원격으로 접반사 이덕형과 통역관 송업남宋業男과 같이 따라 내려가고, 충청병사 이시언의 군사 2000인과 평안병사 이경준의 군사 2000인은 이여매의 좌군에 가담하고, 경상좌병사 성윤문成允文의 군사 2000인과 방어사 권응수의 군사 200인과 경주부윤 박의장의 군사 600인은 고책의 중군에 가담하고,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군사 1000인과 방어사 고언백의 군사 300인은 이방춘의 우군에 가담하였다.

양호는 성동격서의 전략으로 전라도 순천의 소서행장을 치는 체하여 순천에 있는 행장의 군사로 하여금 출동 못하게 견제하고 길을 에둘러서 경상도 울산으로 향하였다. 이것은 순천의 적장 소서행장은 수군명장 이순신에게 맡겨 두고 가등청정을 먼저 치려함인데, 청정은 사납다 하여 명나라 장수들이 가장 꺼리는 터이다. 청정은 본래 수길이 길러낸 장수인데 수길이 등길랑藤吉郞 시대에 아들이 없으므로 자기의 고향인 중촌에서 외척형제의 아들로 두 살 되는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를 삼으려고 기른 터이라 수길의 손때가 묻은 장수이다. 청정이 조선에 나온 뒤로 날래고 사납기로 소문이 높아서 명나라 장수들은 청정 하나만 잡으면 그 외 적장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여 이번에 쫓아 내려간 것이라고 하였다.

울산으로 향하는 양호

가등청정은 울산에서 도산島山에 성을 쌓아 근거지를 만들고 서생포로 나가서 기장 해안에 머물러 있었다. 울산으로 내려오는 명나라 대군은 경주에 이르렀다. 고책의 군사는 언양彦陽으로 나가서 부산의 적이 원군을 보낼까 하여 그 길목을 막고, 이여매 해생의 군사는 물밀듯 울산으로 들어가 성을 에워쌌다. 울산성은 청정의 부하 가등청병위가 지켰다. 이때에 천야행장이란 적장이 모리수원의 부하 태전정신太田政信의 무리와 함께 부산서 떠나 도산성의 감역을 하러 가는 길에 언양에서 고책의 명군과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밤을 지내고 나서 천야행장의 선봉이 새벽녘에 고개를 넘다가 명군의 대진이 산 밑에 주둔한 것을 보고 놀라서 달아나려 하였으나 천야행장은 적군을 만나 달아나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 하여 명병을 맞아 싸우다가 한 가닥 혈로를 헤치고 울산성으로 쫓겨 들어갔다.

 
양호는 오유충을 보내어 양산에 있는 흑전장정을 막게 하고 다만 통역관 송업남과 이덕형 권율의 무리 3~4인만 데리고 제독 마귀의 진으로 들어가서 파새 양등산으로 선봉을 삼아 정병 3000기를 몰고 울산성 아래에 들이닥쳤다. 적이 추격해 오자 파새 양등산이 회군 돌격하여 500급을 베었다.

그 이튿날은 삼로의 군대가 함께 전진하여 좌군은 반구정伴鷗亭 보루를 에워싸고 중군은 병영을 바로 맞부딪치고 우군은 태화강太和江 보루를 에워쌌다. 경략 양호는 몸에 중갑重甲을 입고 독전하기를 더욱 급히 하여 제군은 북소리 높이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하였는데 대포소리는 천지를 뒤흔들고 화전과 시석은 소낙비 퍼붓는 듯하여 적의 외막外幕을 다 태우고 돌진하였다. 적은 사상자가 많아서 견디지 못하여 내성으로 물러나고 외성은 명나라 군사가 점령하게 되었다.

울산성을 지키던 가등청병위는 명병에게 이러한 곤란을 당하고 있다가 천야행장을 맞아들여 청정의 대신으로 성중 병사를 지휘하게 하니 명나라 장수들은 천야행장을 가등청정으로 그릇 알고 공격하기를 더욱 맹렬히 하였다. 명군들은 외성 안에 들어와서 싸우다가 내성의 토첩土牒과 장벽 사이로 조총부대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여 명병이 또 천여명이 죽었다. 그런 뒤로 명병이 내성 가까이는 들이치지를 못하였다. 이방춘 해생의 군사는 도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도산성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험고한 암벽상에 새로 쌓은 옹성이었다.

해생과 이방춘의 마병馬兵이 들어가 치다가 발을 붙일 데가 없어서 결국은 실패하고 쫓겨 나왔다. 이것을 본 제독 마귀 및 모국기의 무리가 쳐들어가서 모든 공성하는 기계를 가지고 경병輕兵 5000으로 들이쳐 도산성을 함락하였다. 도산성이 점령되고 울산성 안에는 군량이 떨어져서 형세가 말이 못 되었다. 성이 에워싸인 지가 10여일이나 지났다.

성 안에 있는 천야행장 가등청병위는 기장에 있는 저의 주장인 가등청정에게 위급한 통지를 하려 하나 기장까지의 거리가 이틀길이 되는 터에 성 밖에는 명병이 겹겹이 에워싸서 그를 뚫고 나갈 장수가 없었다. 천야행장은 기장에 보낼 장사를 물색하여 구하는데 부하장사 목촌뢰무木村賴毋가 자원하고 나서더니 창 한 자루와 말 한 마리로 교묘하게 명나라 군사들의 칼과 화살을 피하여 산과 들로 풍찬노숙9)하여 밤낮 이틀 만에 기장에 득달하였다. 청정은 그때야 비로소 울산성의 위급한 소식을 알고 곧 울산으로 달려가려 하였다. 청정의 부하제장은 간하되 울산의 외로운 성이 십만이 넘는 명병에게 에워싸였는데 우리의 적은 군사로는 대적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울산성을 버리자고 주장하고 청정이 출병하려 하는 것을 기어코 만류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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