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황제가 진린을 보내니 이순신이 사냥 벌이다
명황제가 진린을 보내니 이순신이 사냥 벌이다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 호수 65
  • 승인 2013.11.12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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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48회

이순신 혼자서도 넉넉히 적의 수군을 막을 만한 능력이 생겨난 이때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수군과 병선 70여척을 끌고 강화도에서 내려온다고 소식이 왔다. 이름만은 청병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순신의 행동을 견제 또는 간섭해 적을 놓아 보내고 마침내는 순신을 관음포에서 죽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정은 부하제장의 주장을 물리쳐 말하기를 “울산성에는 지금 천야행장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의리상 구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그 부친인 천야장정浅野長政(아사노 나가마사)이 조선에 나올 때에 내게 부탁하기를 그 아들인 천야행장을 구원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내가 만일에 구하지 않아서 그 아들을 죽게 하였다하면 다른 날에 무슨 면목으로 천야장정을 대하나?” 하고 청정은 날랜 부하 장수 편강마우片岡馬祐 가등미작加藤美作 2인에게 군사 1500명을 주어 속히 가서 서생포를 지키게 하고 삼본森本, 반전飯田, 산전山田, 길촌吉村 등 일기당천의 수하 장사 500명을 거느리고 울산을 향하였다.

청정은 울산 입구에 이르러 명나라 군사가 저항하는 것을 쳐 물리치고 날이 샐 무렵에 적전 상륙을 감행하여 명군의 바다를 헤치고 울산성으로 들어섰다. 명국 장병은 공성하기를 더욱 맹렬히 하여 대포소리는 강산을 흔들었다.

명군 총대장 양호는 그 참모 정경강鄭景岡의 계획으로 성안에서 먹는 식수의 상류를 조선 토병을 거느린 파주목사 김응서를 시켜 끊어버렸다. 성 안에서는 먹을 물이 없이 되어 청정의 군사는 배고프고 목이 말라서 종이를 씹어 삼키고 말똥을 짜서 마셨다.

하루는 명군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갔던 항왜 한 명이 성 밖에 나타나서 외치기를 대명경략사 양호가 가등청정에게 강화를 하려 하여 서로 만나기를 청하니 청정은 성 밖에 나와서 백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호와 만나보라고 하였다. 청정은 정히 위급한 때라 그 말을 쫓아 성 밖에 나가려 하였다. 천야행장은 붙잡으며 양호의 간계를 알지 못하고 풍태합의 중한 부탁을 받고 나온 몸으로 가벼이 나갈 일이 못되고, 저희가 강화를 청하는데 우리가 만일에 나가지 아니하면 비겁한 일인즉 내 생각에는 명나라 장수들이 아직 귀하의 얼굴을 모르는 터이니 내가 귀하를 대신하여 나가 보겠다고 말하였다. 또 천야행장의 부하들도 천야행장의 나서는 것을 못하게 만류하여 화의는 그만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참모총장 흑전효고는 각처로 통지하여 구원병을 불러 울산으로 보내는데 소조천수추 모리수원 흑전장정 협판안치 과도직무 가등가명 봉수하가정 등당고호의 무리가 언양 밀양으로부터 길게 달려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울산으로 모여든 군사가 합 5만이오 울산성 안에 들어 있던 군사는 그동안에 전사한 것보다 굶어죽기를 더 많이 하여 6000명이 될 정도였다. 실제로 조명연합군의 수에 비교한다면 청정의 군사는 7, 8분의 1에도 불과한 소수였다.

그러나 명나라 장수들은 울산성의 구원병이 이렇게 모여드는 것을 보고 원군이 많이 와서 안팎이 응하게 되면 우리는 여기서 지구전을 하는 것이 이롭지 못하리라 하여 경략 양호는 이덕형 권율을 불러 “성은 험하고 적의 원병이 많아 앞뒤로 적을 맞아야 할 듯하니 마땅히 포위를 풀고 후퇴하였다가 다시 도모하자” 하고 적을 위협하며 성을 핍박하기를 마지아니하나 이것은 겉으로 위세를 보이는 일이요 속으로는 한 끝이 풀리기 시작하였다.

울산에 들어온 일본장수들은 성 북쪽으로 먼저 들어와 유진한 모리수원의 진으로 모여 명병을 물리칠 일을 협의하는데 과도직무를 선봉으로 하여 그의 5000군이 먼저 명장 오유충 모국기의 군사를 쳐서 물리쳤다. 소조천수추 이하 여러 장수들이 과도직무의 뒤를 이어 나가며 명병의 진을 쳐들어가고 청정의 군사는 성 안으로부터 내달아 뒤를 쫓았다.

양원의 군사가 울산에서 물러나 서울로 들어온 뒤에 양호 마귀의 무리가 명나라 조정에 승전하였다는 첩서를 올려서 대명황제는 양호 이하 제장에게 은 10만냥을 하사하였다. 금번 울산 싸움에 명나라 군사의 죽은 수는 1400여인이요 부상한 자는 3000인에 가깝다하고 일본군사도 죽은 수가 4000여인이요 부상한 수도 3000~4000이라 하였다. 이때에 명나라 조정에서 형부시랑 여곤呂坤이 조선에 관한 소를 올렸는데 그 글은 아래와 같다.

朝鮮近我肘腋 日本若取而有之 日本藉其衆爲兵 就其地資食 進則斷我山東 漕運之路 退則窺我遼東 防備之域 不及一年 北京坐受其困 此大憂也 前年朝鮮請兵 朝廷二三其說 許援延援 朝鮮勢窮力屈 不折入爲日本 其勢不止 宜早決大計 幷力東征

조선이 우리의 팔꿈치와 겨드랑이처럼 가까우니 일본이 만약 빼앗아 차지한다면 일본은 그 백성들을 뽑아 군사로 삼을 것이며 그 땅을 취하여 군량을 돕게 할 것이니 나아가서는 우리 산동의 조운하는 길을 끊을 것이요, 물러나서는 우리 요동의 방비하는 지역을 엿볼 것입니다. 일 년도 되지 않아서 북경이 앉은 채로 곤경을 당할 것이니 이것은 나라의 큰 걱정입니다. 전년에 조선이 청병하나 조정에서 두세 번 말하여 원조를 허락하고도 기일을 늦추었으니 조선은 형세가 궁하고 힘이 꺾이어 조선으로 들어가 일본을 막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마땅히 일찍 큰 계책을 결정하여 힘을 합쳐 동정하십시오.

대명 신종황제神宗皇帝는 이 글을 보고 병부상서 형개로 정동총독征東總督을 삼아 조선에 보내어 삼군을 총독하게 하고 태자사보太子師保 진린으로 광동廣東 절강浙江의 수군을 제독하게 하고 마귀로 선부宣府 대동大同의 육군을 제독하게 하고 유정으로 묘병苗兵을 제독하게 하고 동일원董一元으로 한상漢上의 육군을 제독하게 하여 이상 수륙 4제독으로 원조하러 가게 하였다.

마귀는 먼저부터 조선에 출정하여 있는 장수이거니와 동일원 유정은 또 새로 압록강을 건너 나오고 진린은 광동 절강의 수군 병선 100여척을 거느리고 발해를 건너 당진唐津에 들어왔다. 형개의 지휘 하에 수륙군이 모두 4로에 나뉘었으며 전 제독 이여송은 북로北虜와 싸우다가 요동 청하淸河에서 전사하여 이번에는 조선에 나오지 못하고 그 대신에 동일원이 나온 것이었다.

약탈 일삼는 명나라 수군

선조는 경기 황해 평안 함경 제도의 군사 만여인을 새로 모집하여 명총독 형개, 경략 양호, 제독 마귀 등의 절제를 받게 하고 명병과 합력하여 한강의 각 여울목을 지키게 하였다. 양호의 부하 참장 설호신, 유격 진인陳寅의 무리가 남대문 밖 동록東麓에 관성묘關聖廟를 창건함에 형개 양호 이하가 은을 내어 비용을 조달하고 조선조정에서도 은으로 도왔다. 5월 13일은 관성關聖의 탄일이라 관성묘에서 제사를 봉행하는데 다들 말하되 오늘에 풍우가 있으면 신이 이르심이라 하더니 과연 오후에 뇌우가 크게 떨쳤다.

▲ 지위가 높은 조선 장관도 명나라 최하졸병에게 모욕당하는 일이 많았다.
이때에 조선군사와 명나라 군사와는 큰 차별적 대우가 있었다. 조선 병사 중에 아무리 지위가 높은 장관계급에 있는 사람이라도 명병 중에 가장 지위가 낮은 최하병졸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많았다. 오직 도체찰사 유성룡이 몸소 강변 수비처에 순회하여 조선장졸을 위문하고 나라를 위하여 고통을 견디고 분을 참으라고 말할 뿐이었다.

형개 양호 마귀 이하 명나라 장졸 중에는 폭행 약탈을 하는 폐풍은 조선측이 너무도 무기력하게 대할수록 더욱 심해져서 그칠 바를 몰랐다. 그들은 군자금이라 하여 날마다 조선정부에 대하여 재물을 내라고 조르고 만일에 달라는데 한 번이라도 응하지 못하면 곧 호령하여 “너희가 재물을 숨기고 군자를 아니 대니 황제께 아뢰어 죄를 내리게 하겠다”느니 “너희가 그러면 우리는 돌아갈 테니 그리 알라” 등 여러 가지 위협을 일삼았다. 또 밑에 있는 졸병들까지도 민가에 무상출입하여 부녀를 겁간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만일에 저항하면 때리고 차고 하여서 그들의 눈에는 조선 대신이니 대장이니 양반이니 하는 것도 전연 보이지 아니하였다.

아, 그때에 중국 놈들이 우리 조선에서 이러한 비행을 도처마다 감행하였다. 소위 도원수라는 인물도 그놈들을 따라다니며 보고만 있었다. 이놈들이 고금도에 와서도 이따위 행위를 하다가 이충무에게 배척을 받고 진린의 사과로 명나라 제장을 이공이 치죄하게 되어 이 버릇을 비로소 금지하였다.

그들 명병은 양반의 집일수록 보물이 있고 어여쁜 부녀자가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양반의 집같이 보이는 집을 골라서 폭행을 더하였다. 영의정 유성룡은 참다가 못 참아서 이러한 상소를 올렸다.

臣觀支供天兵之事 其間耗失之弊 不可紀極 雖竭國內之力爲之 其勢亦將難支 近自南下以後 遼薊宣大之兵 沿途作拏 敺打官民 日以益甚 守令 不能支當 遠避山谷 其汎濫侵突 何所禁止 朝朝暮暮 相繼不絶 牛馬一空 其爲生民之厄 不可忍言 然 他無可救之策 只宜令接伴使李德馨 從便稟呈于提督 出令于管下諸將 庶可少戢於萬一 亦未知如何 徒爲憫歎耳

신은 지방에서 명나라 군사를 이바지하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동안에 소모되어 없어지고 (거듭 받고 하는) 폐단은 끝이 없으니, 아무리 나라의 힘을 다 모아 대접한다 해도 그 형편이란 지탱하기 어렵겠습니다. 요즈음 남으로 내려오고 나서 요동, 계주, 선주, 대원 등의 병사들은 길을 따라가면서 싸우고 관민을 때리고 (하인을 결박하고 술과 밥을 요구하니, 행패가) 날로 심합니다. 수령도 견디다 못하여 (마침내 구차하게 면할 생각으로) 멀리 궁벽한 곳으로 피해 버리고 (하인에게만 맡깁니다. 언어가 애당초 서로 통하지 못하고 곁에서 소통할 역관도 없으니) 그 무엄한 행패를 어떻게 금지하겠습니까. (심지어 역참의 말까지도 빼앗아 가서 백에 한 마리도 돌려주지 않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민가에 우마라고는 다 없애 버리고도 (내놓으라 졸라대니) 백성들의 불행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달리 구제할 계책은 없고, 다만 접반사 이덕형을 시켜 사실대로 제독에게 고하여 예하 장수들에게 영을 내리게 해야만 겨우 만에 하나라도 단속이 될 것인지 어떻게 될지 몰라 한갓 탄식만 합니다.1)

이러한 폭행 약탈을 하여가며 명병은 남도로 내려갔다가 옳게 승전도 못하고 도로 울산에서 적의 구원병에게 쫓겨 경주로 퇴각하였다가 서울로 올라온 것이었다.

그동안에 이순신은 고금도로 전진 남하하기로 되었다. 전라감사 황신이 순신의 형세를 보려고 보화도에 있는 순신의 진중에 들어왔다. 순신과 황신은 한산도에서 처음 만나 지기지우가 되었던 사이였다. 서로 병기兵機와 방략을 논의하고 황신은 순신을 삼남의 해상 장성이라 하여 전라도 연해 19읍을 순신의 관하에 전속케 하였다.

순신은 명장 양호 마귀와 권율의 무리가 양국의 대군을 몰고 울산성을 치다가 그만 뒤로 물러나 한성으로 쫓겨 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삼도수군제장을 호령하여 보화도의 여막을 걷고 함대를 몰고 남하하여 해남반도의 끝을 돌아 남은 적을 쫓아내고 완도를 지나 강진 고금도에 이르렀다. 순신은 이 고금도에다가 당분간 근거를 잡고 명장 진린이 남하하면 거처할 관아도 건설해 줄 예정이었다. 고금도는 흥양반도를 돌아 좌수영을 통하는 요해처에 있는 섬이었다. 이 섬은 산이 조밀하고 항만이 물이 깊어 형세가 기이하고 큰 농장이 곁에 있어 군량을 농작하여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순신은 수하 제장을 보내어 강진 해남에 떠도는 적을 소탕하여 버렸다. 순천 삼일포三日浦에는 모리민부라는 적장이 함대를 정박시키고 있어서 순천 왜교의 소서행장을 엄폐하고 있었다.

새벽 틈타 일본 병선 대파하다

모리민부毛利民部는 순신이 고금도에 처음 와서 군량이 부족할 것을 미리 알았다. 그래서 군량의 길을 끊으려 하던 차에 척후병이 보고하되 이순신이 동백도冬柏島에다가 군량을 쌓아두었다고 하므로 모리민부는 자기의 정예함대 40여척을 거느리고 동백도를 향하여 쳐들어갔다. 원래 순신은 고금도 앞에 동백도가 있고 그 뒤에 우장곶佑將串이란 땅이 있으되 거기는 바다 밑에 암초가 많이 있는 것을 알고 한 번 용병할 땅이라 하여 우장곶에는 기치를 많이 꽂고 동백도에는 나무를 많이 쌓아 두고 그 위에 가마니와 덕석으로 덮어두어 완연히 양식을 쌓아 둔 모양을 보였더니 과연 모리민부는 이것을 그릇 알고 쳐들어오다가 물 밑에 있는 암초에 많은 배가 부딪쳐 병선 몇 척이 부서지고 나중에 동백도에 상륙하여 본즉 군량은 아니고 섶나무뿐이었다. 순신은 섬 그늘에 복병하여 대기하고 있다가 요격하여 적선 십여척을 풍우와 같이 깨뜨려 불살랐다.

▲ 진린의 수군이 남하한다는 얘기를 들은 조선 관료들은 진린이 순신의 병권을 침탈하고, 부하를 학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모리민부는 순신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또 그 신전을 맞을까 겁이 나서 간신히 암초를 피하여 빠져 달아났다. 순신은 우레와 질풍같이 뒤를 추격하여 절이도折爾島를 지나 장흥 첨산도尖山島 앞바다에 다다랐다. 순신은 이 바다에서 승리한 위세를 보이기 위하여 대연습을 거행하였다. 모리민부의 패잔군은 쫓기는 길에 마침 소서행장의 구원을 얻어서 가쁜 숨을 쉬며 그날 밤에 갑옷을 벗고 잠이 들었더니 순신이 또 그날 밤 새벽에 야습을 감행하여 대파하여 또 병선 십여척을 깨뜨려 불사르고 곤한 잠을 자던 적병 100여급을 베었다.

이 싸움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장수는 이순신李純信 안위 우치적 배흥립 유형 송희립 김응함 송여종 이기남 조계종 이언량 황정록 등 제장이었다. 순신은 승전고를 울리며 군을 거두어 고금도로 돌아왔다. 후인이 첨산도와 동백도의 먼저 이름을 고쳐 덕량도德糧島라고 불러 기념하였다. 적장 모리민부는 낙담하여 삼일포를 버리고 순천 왜교로 달아나 소서행장의 진과 합세하였다. 순신은 또다시 전년의 한산도의 대세력을 회복하여 병위가 크게 떨쳤다.

순신이 벽파진에서 대승첩이 있은 이래로 각처에서 의용 장사들이 우리 영웅을 돕기 위하여 구름이 용을 따르고 바람이 범을 따르듯 모여들어서 벌써 8000명이 넘었다. 순신이 첫째로 걱정이 되는 것을 군량의 계속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일종의 기묘한 계교를 내어서 충청 전라 경상 삼도를 통행하는 선박에게 통행첩지를 주게 하고 그 통행첩이 없이 다니는 배는 적국의 간첩과 탐정선으로 단정하여 일체 통행을 금지하였다. 통행첩을 주는 방식은 배의 대소를 분간하여 대선은 쌀 세 섬 중선은 쌀 두 섬 소선은 쌀 한 섬을 받고 통행권을 주었다.

백성들은 순신의 백전연승하는 해군을 믿고 가족과 재물을 배에 싣고 이순신장군의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것이 일종 유행이 되었기 때문에 이만한 쌀을 바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수천척의 피난선들이 저마다 쌀을 갖다 바치고 통행첩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받은 쌀이 불과 10일 동안에 1만여석에 달하였다.

동양의 무성인으로 이름이 높은 이공과 같은 대현인도 이 난중에 다시 해군의 부흥을 당면하여 어쩔 수 없어서 국사를 위하여 이러한 눈물겨운 고육책을 쓴 것이었다.

군량을 마련하기에 겨우 염려를 놓은 이순신은 각 지방에 영을 내려 구리와 철을 모아들이게 하였다. 백성들은 밥주발과 숟가락을 바치는 이조차 있었다. 순신은 고금도에 병기제조 공장을 세우고 천지현자 삼종 대포와 조총 화전과 대장군전 진천뢰 등 무기를 만들고 칼 창 도끼를 만들어 준비에 바빴으며 연해 각처의 목재를 실어와 병선 짓기를 시작하였다. 상업하는 사람과 어로하는 사람들도 모여들어 한 달이 넘지 못하여 큰 번창한 도시를 이루었다.

또 순신은 명나라 수군이 온다니깐 그들의 병영을 지어야 하겠으며 더구나 그의 대장인 제독의 아문2)을 지어주어야 될 일이겠고 또 중국 병선의 정박처를 택하여 선창 방파제를 짓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고금도의 군항화 계획이 차차로 성취되어 이순신 혼자만 하여도 넉넉히 적의 수군을 막을 만한 능력이 생겨난 이때에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수군과 병선 70여척을 끌고 강화도로부터 내려온다고 소식이 왔다. 이름만은 청병請兵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순신의 행동을 견제 또는 간섭하여 도리어 부자유와 부조화를 생기게 하여 적을 놓아 보내고 마침내는 순신을 관음포에서 죽게 하는 결과를 내게 하였다.

명 수군제독 진린이 고금도를 향하여 서울을 떠날 때에 선조는 제신을 거느리고 청파역靑坡驛까지 나와 은근한 전송을 하였다. 이날 진린의 부하는 전송 나온 본체도 없이 본지방 성주인 양주목사를 차고 때리고 청파찰방靑坡察訪 이상규李尙規를 바오라기3)로 목을 매어 땅바닥에 꿇려서 유혈이 땅을 적셨다. 진린은 성품이 원래에 오만하고 사나운 인물이었다. 영의정 유성룡은 진린을 대하여 “이찰방을 용서하여 주시오” 하고 청하였으나 진린은 호령하기를 “너희 조선 관원들은 이렇게 하여야 버릇을 가르친다. 너희 놈들이 하는 일이 다 무엇이냐? 적이 오면 너의 놈들은 다 도망하고 우리 대명 군사더러 죽을 땅에 나가 싸우게 하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며 진린은 도리어 기세를 부렸다. 좌석에 앉아있던 선조는 용안이 붉어져 주홍빛같이 변하였다.

사냥 잔치 벌이며 비위 맞춰

유성룡은 곧 죽고 싶었다. 유성룡이 따라 나온 재상들을 돌아보며 “가석하다. 이순신이 또 낭패하겠군. 순신은 혼자라도 일본수군을 넉넉히 이기거든 무엇 하러 명나라에 또 청병을 한단 말이오? 순신이 진린과 한 군중에 있게 되면 반드시 순신의 하는 일을 못하게 할 것이요, 도리어 순신이 원치 아니하는 일을 시킬 것이요, 순신이 만일에 거스르면 노할 것이니, 이러고야 아니 패하고 어찌 하오?” 하였다. 선조와 여러 대신은 유성룡의 말에 “참 그렇겠소” 하고 순신에게 이러한 뜻을 통지하라 하였다.

 
진린의 수군이 남하하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순신은 나주 밖 섬 무인도에 들짐승 사냥을 거행하여 상을 걸고 들어가 제장을 독려하여 이순신李純信 안위 이응표 우치적 이정충 등 이하 8000명의 장사들은 혹은 호랑이를 때려잡거나 혹은 곰과 멧돼지를 쏘아 맞추거나 혹은 사슴과 노루를 잡아 종일토록 사냥을 하였다. 순신도 뿔사슴 서너 마리를 손수 활을 쏘아 잡았다. 들짐승 수천 마리를 잡은 뒤에 잡은 수를 계산하여 포상하였다. 이때에 영의정 유성룡의 서간이 왔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溽暑海中 不審孝履支勝否 懸仰懸仰 陳提督璘 又將合陣於其處 凡百策應調度之事 專恃令善處 望須協心同力 以成大勳 都監炮手百名下去 憑候動靜 伏惟爲國保重

“무더운 날씨에 바다에서 효리4)께선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하며 우러러 생각하오. 진린 제독이 곧 그곳에서 군진을 합하고자 하는데, 갖가지 책응과 조치 등은 전적으로 영공이 잘 처리하실 것으로 믿소. 바라건대 모름지기 협심 동력하여 큰 공훈을 이룩하시오. 훈련도감의 포수 100명이 내려가는 편에 동정을 문후하니 부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보중하기 바라오.”

유성룡은 훈련도감 포수 100명을 순신에게 보내어 주었다. 전년에 선조가 의주에서 한성에 돌아옴에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 도적이 일어나므로 유성룡이 선조에게 말하고 이 도감포수 5700명을 신설하여 근본인 한성을 중하게 한 것인데 거기서 100명을 순신에게 보내어 주었다.

순신은 진린을 환영하기 위하여 삼도의 주사 대중소 병선 200여척으로 결성한 대함대에 오색 기치를 달고 환영하는 예포 수백방을 놓았다. 위의를 갖추어 멀리 바다에 나아가 학익진를 벌이고 진린의 주사를 맞았다. 때는 무술1598년 7월 16일이었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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