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러가 쇼핑센터 48년의 힘

한번 가보면 왠지 모르게 또 사러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사러가 쇼핑센터다. 전국에 두곳(신길점·연희점)뿐인 사러가 쇼핑센터에는 특별한 게 셋 있다. 하나는 상생, 둘은 전통시장 DNA, 마지막은 신구新舊 유통채널의 조화다. 이를 발판으로 사러가는 지난해 오랜 적자행진을 깨고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 2008년 최종 리뉴얼 오픈한 사러가 쇼핑센터 신길점의 모습. 신풍시장이 모태인 신길점은 전통시장과 현대식 슈퍼마켓, 쇼핑센터가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다.
# 최근 들어 뜨는 상권이 있다. 서울 연희동이다. 홍대 상권과 가깝다는 게 첫째 이유다. 연희동이 ‘제2의 삼청동’이 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개성만점인 개인 의류숍은 물론 작업실·스튜디오들이 속속 둥지를 틀고 있어서다.

분위기 있는 카페도 하나둘씩 오픈하고 있다. 문을 연지 30년 이상 된 ‘칼국수집’ ‘빵집’ ‘떡집’들이 새롭게 조명을 받으면서 연희동만 고집하는 마니아층도 생겼다. 새로움과 낡음이 공존하는 곳이 연희동이다. 연희동의 중심부에 있는 ‘사러가 쇼핑센터’는 그런 면에서 연희동의 DNA를 그대로 닮았다. 신구新舊 트렌드가 묘하게 공존하고 있어서다.

▲ 2011년 6월 새롭게 리뉴얼 오픈한 사러가 쇼핑센터 연희점.
사러가 쇼핑센터는 ‘단층구조(중심부는 2층)’다. 그래서 언뜻 창고형 할인마켓이나 주차장처럼 보인다.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쇼핑센터인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건물 내부에 발을 들여놓으면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수입과자를 수북이 쌓아놓은 예스러운 분위기의 상점들이 여럿 보인다. 실제로 역사가 깊다. 쇼핑센터 후문쪽에 있는 채소가게(시민상회)와 반도상회(언더웨어·2층)는 40년, 완구 상점은 37년, 신발가게(이쁜이 신발)는 34년이나 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영업자들이 가게 문을 내리는 현실을 감안하면 ‘대단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전자제품을 파는 오래된 전자매장도 있다. 1980년대 재래시장을 재연해 놓은 듯하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예스러운 매장 반대편에는 최신식 슈퍼마켓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유기농 상품들이 가득한 게 백화점 식품관 저리가라다.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는 젊은층이 삼삼오오 모여 ‘아메리카노’를 기다리고 있다.

# 서울 영등포 사러가 쇼핑센터 신길점은 아케이드 형태의 시장이다. 시장 골목을 중심으로 오른쪽엔 2823㎡(약 941평) 규모의 슈퍼마켓이 둥지를 틀고 있다. 왼쪽에는 상점을 모아 놓은 쇼핑센터(3305㎡·약 1000평)가 있다. 한 건물에 모든 매장이 있는 연희점과는 조금 다른 모양새지만 콘셉트는 비슷하다. 마산상회(여성의류·47년)·BYC(속옷·40년)·우창당(귀금속·43년) 등 40년 이상 된 상점이 수두룩하다. 25년 된 한복집, 30년 역사의 열쇠가게도 있다. 프랜차이즈 브랜드 등 현대식 매장도 많다. 신구 상점의 조화, 신길점의 특징이다.

신구 트렌드가 묘하게 공존

 
최근 유통가의 키워드는 ‘상생’이다. 재래시장을 살리겠다고 정부가 칼을 들이댄 지도 오래다. 자본을 앞세운 기업들이 유통시장을 장악하자 정부가 대책마련에 나선 것이다. ‘월 2회 휴무’ ‘영업시간 규제’ ‘판매 장려금 금지’ 등의 규제를 내놓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규제효과는 신통치 않아 보인다. 대형마트도, 재래시장도 못살겠다며 아우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스러운 매장과 현대식 상점이 어우러져 있는 ‘사러가 쇼핑센터’는 어딘지 모르게 특별해 보인다.

▲ 1990년대 사러가 쇼핑센터 신길점의 모습.
사러가 쇼핑센터(본점)의 모태는 1965년 개설된 신풍시장이다. 남상우 사러가 회장은 사러가 쇼핑센터 본점(신길) 자리에 시장상인들과 신풍시장을 설립했다. 신풍시장에 슈퍼마켓을 최초로 입점시킨 이도 남 회장이다. 남 회장은 한발 더 나아가 서울시내 일부 시장 개설자들과 ‘시장모임’을 만들어 재래시장 근대화, 상품별 점포 재배치, 물품의 단체 구입을 꾀했다. 저렴하면서도 고품질의 상품을 제공할 요량이었다. 당세 세력을 키우던 백화점 슈퍼마켓에 대응하겠다는 포석도 깔려 있었다.

쉽지 않은 플랜이었지만 남 회장의 노력은 시장상인과 사러가를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됐다. 이런 철학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상복 사러가 출점자 협의회(상인회) 회장은 “상인회는 회사 측과 매달 회장단 회의를 갖고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며 “임대료만 내면 상인들이 직접 하기 힘든 마케팅이나 홍보 등의 업무를 대신해 주기 때문에 장사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러가 쇼핑센터의 운영주체인 ‘주식회사 사러가’는 상인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품목을 결정하는 것조차 상인의 몫이다.

사러가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입점매장 가운데 오래된 곳이 많다는 게 칭찬 받을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남 회장은 원칙을 중시 여긴다. ‘한번 맺은 파트너십은 평생 간다’고 생각한다. 임대상인에게 권리금도 받지 않는다. 임대료도 양측이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받는다. 경기가 힘들다 보니 이마저도 비싸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매장을 비워 놓더라도 노래방이나 술집 등 사러가의 성격에 맞지 않는 업체는 일체 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1년6개월 동안 비어 있는 점포도 있었다.”

적자행진 끊은 비결은 ‘변신’

 
하지만 임대상인과 상생을 하면서 치열한 유통시장에서 생존하는 게 쉬웠을리 없다. 특히 자본을 앞세운 대형마트는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출점하면서 중소형 유통업체를 옥좼다. 매년 늘어나던 사러가의 매출이 꺾인 시점도 이 무렵이다.

사러가는 악조건을 탈출할 방법으로 ‘변신’을 택했다. 신길점은 2008년 슈퍼마켓을 리뉴얼하고 임대점포를 재구성했다. 연희점은 2011년 리뉴얼을 거쳐 재오픈했다. 재래시장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주차장도 이때 증설했다.

노력은 알찬 열매로 이어졌다. 사러가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되던 연속 적자행진을 지난해 마감했다. 끊임없는 체질개선이 효과를 낸 것이다. 자체 운영하는 슈퍼마켓이 큰 힘이 됐다. 특히 사러가 연희점의 슈퍼마켓은 경기도에 사는 고객이 찾아올 정도로 명성이 높다. 서울 상암동에 거주하는 전업주부 임영민씨는 “주로 신촌 현대백화점 식품관에서 물품을 구입했는데, 사러가 쇼핑센터 식품관을 알게 된 후로는 이곳만 이용한다”며 “품질 좋은 과일이 저렴할 뿐만 아니라 유기농 돼지고기 등 안심하고 식탁에 올릴 만한 친환경 제품이 많기 때문이다”고 평가했다.

▲ 사러가 슈퍼마켓에는 친환경 제품 비중이 높다. 안전한 먹거리 제공은 사러가의 기본 모토다.
실제로 사러가에는 안전먹거리 매장이 많다. 일반 중소형 슈퍼마켓과 달리 정육점과 수산물 코너를 임대하지 않고 100% 직영체제로 관리한다. 축산물에는 특히 심혈을 기울인다. 가나안 농장의 이연원 돼지고기와 오대산 청정지역에서 자란 흑돼지만 취급한다. 모두 100% 유기농 돼지고기다. 소고기는 강원도 홍성군 친환경홍성한우 ‘싱굿’ 한우만 들여온다. 이곳 한우는 HACCP 인증을 받은 축사에서 항생제·성장촉진제를 사용하지 않은 사료를 먹여 기른 것이다.

수산물 역시 MD가 항생제 투여 등을 일일이 확인한 양식장에서 납품받는다. 산지 직거래 방식이다 보니 가격도 합리적이다.

이연원 가나안 농장 대표는 “5년 전부터 사러가에 돼지고기를 납품하고 있는데, 청담동 신세계 SSG 푸드마켓, 현대백화점 무역점·압구정점 세곳의 매출을 합친 것보다 사러가 2개점 매출이 더 많다”며 “사러가가 이들보다 30%가량 저렴하게 파는 이유도 있지만 소비자의 충성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사러가는 중소기업의 친환경 먹거리를 들여오는 데도 적극적이다. 무설탕·무첨가제가 원칙인 화성한과의 ‘송희자 쌀과자’ ‘찹쌀유과’ 등이 스낵코너에 자리를 잡고 있다. 유기농 쌀로 만든 크래커, 유기농 쿠키 등 생협에서나 찾아볼 법한 제품도 여럿이다.

현재는 친환경 제품 비중이 약 30%에 달한다. 그만큼 사러가는 소비자에게 널리 알려진 제품으로 승부를 걸지 않는다. 매출을 늘리는 데 급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입점업체들도 인정한다. 이연원 가나안농장 대표는 “많은 유통업체와 거래해 봤지만 사러가 같은 곳은 처음 봤다”며 “유통업체 대부분이 외형을 확장하고 수익을 늘리는 데만 신경을 쓰지만 사러가는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걸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고 평가했다.

인기 있는 제품으로 승부 걸지 않아

치열한 유통시장에서 한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사러가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일단 가격대가 조금 비싸다는 의견이 많다.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치명적 단점일 수 있다.

▲ 2001년 모범 재래시장으로 선정된 사러가 쇼핑센터(신길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방문한 모습.
사러가 관계자는 “안전한 고품질 제품의 가격을 소비자가 원하는 수준으로 떨어뜨리긴 어렵다”며 “오랜 기간 팔아오면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지만 아직 역부족인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는 “더 많은 소비자가 우리의 진정성을 알아줄 때까지 더욱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러가의 모태인 ‘신길점’의 영업환경이 예년만 못하다는 것도 부담이다. 지난 몇년 동안 영등포 상권에는 코스트코를 비롯해 롯데 빅마켓 같은 창고형 할인점이 줄줄이 들어섰다. 타임스퀘어·IFC몰 등 대형쇼핑몰도 많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신길 뉴타운 개발로 많은 소비인구가 동네를 빠져나갔다. 신길점 상인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사러가의 미래는 불투명하지 않다. 영업환경이 나빠졌더라도 사러가의 진정성을 믿는 소비자가 아직은 많아서다. 사러가처럼 근본과 기본을 유지하면서 끝없이 변신하는 유통업체도 드물다. 많은 소비자가 사러가에서 제품사기를 고집하는 까닭이다.
글·사진 김미선 기자 story@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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