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진의 생각하는 골프

이 시대의 프로골퍼는 엔터테이너이자 골프연기를 하는 배우다. 관객 앞에서 불필요한 연기를 반복하면 관객은 당연히 지루해하고 외면한다. 이건 매우 명백한 현실이자 선수 플레이에 대한 지침이다.

3월 17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에서 끝난 PGA투어 발스파 챔피언십에서 미국 국적의 케빈 나(나상욱)가 1타차로 아깝게 2위를 기록했다. 국내 골프 전문방송이 마지막 라운드를 생중계했다. 케빈 나는 챔피언 조였는데 해설자는 “케빈 나가 미국인이지만 한국인이나 마찬가지여서 일부러 플레이 모습을 자주 보여주지 않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일리가 있는 멘트였다. 보통 대회 마지막 날 마지막 조에서 챔피언이 나오고, 거의 모든 중계는 챔피언 조에 카메라를 집중적으로 들이댄다. 대회가 끝난 직후 케빈 나와 한 조이던 로버트 개리거스 캐디의 말이 아니었다면 필자도 그러려니 넘어갈 뻔했다. 그 캐디는 “케빈과 함께 경기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불평했다.

▲ 케빈 나는 PGA 투어에서 ‘가장 플레이가 느린 선수’란 불명예를 안고 있다. [사진=뉴시스]
현재 PGA 투어에서 케빈 나는 ‘가장 플레이가 느린 선수’란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다. 때문에 미국 중계방송사는 시청자들에게 늑장 플레이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케빈에게 만큼은 확실한 우승이라고 여기지지 않으면 아예 카메라를 비추지 않는다. 사실 그날 케빈의 플레이는 그리 느린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에 비하면 ‘아주 빠른 편’이었다.

케빈의 ‘괘씸죄’는 2012년 5월부터 시작됐다. 플로리다 TPC 소그래스에서 열린 ‘제5의 메이저 타이틀’ 더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마지막 라운드 때다. 챔피언 조였던 케빈은 1번 홀 티잉 그라운드에 올라선 뒤 무려 1분 동안 빈 스윙과 왜글을 7차례 한 뒤에야 티 샷을 날렸다. 하이라이트는 14번 홀로 어드레스를 푸는 등 무려 18차례를 거듭하자, 수천의 갤러리들이 탄식과 야유를 퍼부었다. 이후 갤러리들은 그가 왜글을 할 때마다 “원! 투!”를 외쳤다. 선두였던 그는 23위로 추락했다. 당시 장면은 미국 코미디 프로에도 등장할 만큼 화젯거리가 됐다.

케빈은 이때가 기회였다. 확 바꿨어야했다. 존 댈리처럼 절체절명의 승부 퍼트에서도 어드레스조차 없이 그대로 때려내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회를 망칠지언정 공 앞에서 깊은 명상에 잠기는 듯한 플레이는 자제했어야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한 비난이 계속되고 있는 모습에 개인적으로 선수로서 낙제점을 주고 싶다. 우승해봤자 갤러리나 시청자 상당수는 그에게 박수를 쳐줄 것 같지가 않다.

요즘 PGA 투어 선수 거의 전부는 빈 스윙이나 왜글이 1회 미만이거나 아예 없다. 프로골프가 심판이 없는 혼자만의 스포츠란 개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수천, 수만의 갤러리와 거의 대부분이 생중계되는 점을 감안하면 수백, 수천만 명이 한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이 시대의 프로골퍼는 자신이 엔터테이너이자 골프연기를 하는 배우다. 관객 앞에서 불필요한 연기를 계속 반복하면 관객은 당연히 지루해하고 외면한다.

이건 아주 명백한 현실이자 선수 플레이에 대한 지침(매뉴얼)이다. 케빈 나는 이를 모르는 것일까, 못하는 것일까. 선수들에게 기피대상이 되고, 시청자 갤러리 방송사에서 외면당해도 골프만 잘 치면 된다? 왜 고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발스파 챔피언십에 이어 다음 대회인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대회에선 희한한 광경이 비쳐졌다. 케빈의 극성팬으로 보이는 갤러리 수명이 ‘KEVIN NA, WORTH THE WAIT!’란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열렬히 응원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는 우수한 선수’란 의미같다. 반복하건대 빈 스윙이나 왜글은 기술이 아니라 골프를 아는 사람에게는 짜증과 야유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필자가 급한 성격이어서 그런가. 필자는 지난주 필드에서 초보 수준의 스코어를 기록할 정도로 라운드를 망쳐버렸다. 케빈 나로부터 자극을 받아 모든 샷이나 퍼팅플레이를 단 한 번의 빈 스윙도 없이 때린 결과였다. 비록 주말골퍼 주제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할 참이다.
이병진 더스쿠프 고문 bjlee284120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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