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관객이 다시 부른 연극 ‘봉선화’

▲ 연극 봉선화의 한 장면. [사진=더스쿠프 포토]
아버지 배문하는 대학원생인 딸 수나의 논문주제가 마뜩잖다. 그는 딸 수나에게 위안부 문제가 ‘칙칙한 과거사’라며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인 양 열어보길 반대한다. 배문하에겐 위안부 문제가 대를 이어온 악몽이기 때문이다. ‘조센삐’였던 어머니(순이)와 어머니를 학대하던 아버지, 아들인 자신을 위해 곁을 떠나는 어머니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성공한 교수로 안정된 삶을 살던 그의 인생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아버지 배문하의 반대에도 딸 수나는 “하면 할수록 치가 떨린다”며 위안부 문제에 운명처럼 빠져든다. 수나는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중 익명의 작가가 쓴 「조센삐」라는 소설을 발견하고, 그 내용과 일치하는 증언을 한 김순이 할머니를 찾게 된다. 수나는 꽁꽁 감춰진 가족사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 대학 이사장인 외할아버지와 외가는 부유층으로 잘 포장된 친일 집안이었고 가족이 없던 친가는 위안부피해 집안이었다. 베일 벗은 수나의 가족사는 비극적인 설정이자 역사의 표층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족이 되는 극적인 설정을 통해 각각의 심리와 인식에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더불어 과거를 덮어 두고 싶은 아버지와 자신의 힘으로 위안부 문제를 파헤치려는 수나를 통해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인물들의 섬세한 정서표현으로 그리고 있다.

연극이라 쓰고 역사라 읽는다

연극 봉선화는 아버지 ‘배문하’를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 과거 속 일제 강점기로 시간을 넘나들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언어로 시종일관 긴장감 있게 객석을 끌어들인다. 일제강점기 봉선화 필 무렵, 봉선화 물들이던 조선의 처녀들이 짓이겨지는 무대는 차마 마주하기 어려울 만큼 아프고 또 슬프다. 그러나 자칫 자극적으로 비춰 질 수 있는 장면은 상징성이 강조된 절제된 무대와 안무로 주제의식을 전달했다. 단순하지만 감정적 진통이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강한 여운이 남는다.

별다른 무대 장치 없이 배경 막을 겹겹이 두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전환을 시도한 것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설정이다. 특히 3대에 걸쳐 얽히고설킨 타래를 역사적 고증에 충실하게 풀어가는 과정은 ‘연극의 형식을 빌은 다큐멘터리’라 할 만큼 진실의 무게가 강하다. 그 자체로 역사교재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단순히 역사를 무대로 그대로 옮기기에 치중하기보다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의 시간과 시간 속에 켜켜이 응고된 역사를 오늘로 끄집어내는 흡입력이 돋보인다.

극본을 쓴 윤정모 작가는 이번 공연을 “젊은이들을 위해 쓴 극본”이라고 말한다. 수나로 대변되는 젊은이를 통해 위안부 문제가 무대화된 과거가 아닌 ‘나의 아버지, 나의 할머니, 그리고 나’의 문제임을 일깨운다. 극중 수나는 “전범국 독일이 일본과 달리 피해국에 사과를 한 이유는 유대인이 잊지 않고 기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채 피어보지 못하고 짓이겨진 치욕과 아픔의 봉선화를 마주하는 태도는 이제 관객의 몫이라고 돌직구를 던지고 있다.

▲ 연극 봉선화의 한 장면. [사진=더스쿠프 포토]
올해 1월 26일 황금자 할머니의 별세로 총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위안부 피해자 중 피해 사실을 등록한 생존자는 55명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의미다. 관객이 응답할 차례다. 공연이 주는 강한 여운과 깊은 슬픔 너머,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하겠다는 약속은 그 응답의 ‘최소한’일 것이다.

다시 피는 봉선화는 과거 아닌 시대적 과제

이번 공연 봉선화는 1980년대에 위안부 문제를 호소력 있게 다뤘던 윤정모의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토대 삼아, 2013년 11월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초연 이후 2014년 4월 앙코르 공연으로 다시 막이 올랐다. ‘시의적절한 연극,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한 명이라도 더 봐야 할 연극,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연극’이라는 평과 함께 재공연 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쇄도해 다시 무대에 올려졌다. 원작자인 윤정모가 극본을 집필하고 김혜련 예술감독과 구태환 연출이 함께 만들었다.

초연 이후 여성가족부의 후원 외에도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발 벗고 나서 ‘연극 봉선화와 함께 하는 겨레운동’이라는 운동본부를 조직했다. 연극 ‘봉선화’를 통해 우리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국민연극이 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김용택, 김을동, 김미화, 노희경, 변영주 등 정파와 분야를 초월한 각계 인사들이 동행위원으로 활동할 계획이다.

시대와 관객이 다시 불러낸 연극 봉선화는 이번 공연을 통해 초연의 감동은 이어가되 작품의 완성도는 한층 깊어졌다는 평이다. 관람료는 2~3만 원이며, 4월 24일(목) 프레스리허설(오후 3시)을 시작으로 25일(금)에 개막, 5월 1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시어터에서 공연한다. 공연시간은 평일 저녁 8시, 토요일 오후 3시, 7시, 일요일 및 공휴일은 오후 3시이며 월요일은 쉰다. 문의 02-399-1135
김수진 여행전문기자 pen73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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