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진의 생각하는 골프

일본에서 45세 이상의 여자 프로를 대상으로 하는 시니어대회가 열렸다. 총상금 1000만엔의 작은 대회다. 우리나라 프로골프 고우순의 이름을 단 고우순 인비테이셔널이다. 그런데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 홈페이지의 메인을 장식했다. 일본 골프계와 언론이 해주는 최상의 배려다. 골프를 위해 벌어놓은 돈을 다 쓸 것이라는 고우순. 한국 골프에는 고우순 같은 골퍼가 있어야 한다.

지난 10월 12일 저녁 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JLPGA) 홈페이지를 연 순간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2014 고우순 인비테이셔널 상보’가 메인 화면을 장식했다. 45세 이상의 여자 프로를 대상으로 2라운드로 치러진 총상금 1000만엔의 시니어 대회다. 국내 경우라면 단신 취급만 해도 감사할 정도의 ‘별 볼일 없는 대회’다. 이와 거의 같은 시각 한국의 안선주가 JLPGA 투어 스탠리 레이디스 토너먼트(총상금 9000만엔)에서 우승했다. 일본남자(JPGA) 투어의 도신 토너먼트(총상금 1억 엔)에서 역시 한국의 허인회가 일본 프로골프 대회 사상 최소타인 4라운드 합계 28언더파로 우승한 시각이다.

▲ 고우순은 예의, 골프매너, 시간 약속, 검소함 등이 일본 정서에 맞았다. 지금은 골프 사회에서 존경 받는 최상위 골퍼다. [사진=뉴시스]
‘2014 고우순 인비테이셔널’의 총상금은 허인회 1명의 우승상금 2000만엔보다도 적다. 물론 총상금 1000만엔은 고우순이 냈고, 경기장인 모나크CC 측에서 흔쾌히 무상 개방했다. 놀랍게도 각각의 홈페이지에서는 ‘고우순 인비테이셔널’ 상보가 메인, 안선주 관련은 이날 밤 늦게까지 아래로 처리됐다. 허인회 관련은 일본 골프계가 깜짝 놀랄 대기록이었는데도 기사 크기는 고우순 관련이 더 컸다.

일본 골프계, 일본 언론이 해줄 수 있는 최상의 배려다. 대회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고우순은 이렇게 말했다. “많은 한국 선수들이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일본이 골프를 시켜 주었습니다. 일본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고우순은 어느덧 나이 오십이다. 1993년 30살 때 국내 여자투어를 독식하다시피 하며, 최고로 군림했다. 하지만 더 이상 적수가 없자 대한골프협회 조영일 부회장(작고)의 소개서 달랑 한 장 들고 김애숙과 함께 일본으로 날아갔다. 이듬해 JLPGA 정식회원이 됐으며, 그해에 RNC하리마컵 오픈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일본 프로스포츠 신인왕’을 수상했다.

척추부상으로 사실상 정규투어에선 은퇴한 2005년까지 JLPGA 투어에서 8번 우승했다. 지난해 10월 일본서 작고한 구옥희와 함께 일본 골프계에서 가장 성공한 한국 골퍼 가운데 한명이다. 한국인인데도 2000년 전후 일본 골프계에서 기업인들 사이에 ‘함께 라운드하고 싶은 골퍼’로 고우순은 랭킹 3위 안에 들었었다. 예의, 골프매너, 시간 약속, 검소함 등이 일본 정서에 딱 맞았다.

지금 고우순은 일본 골프 사회에서 존경 받는 최상위 골퍼다. 사실 한국에서는 최고의 골퍼였지만, 그런 대접도, 평가도, 특히 언론에서는 철저하다 싶을 정도로 외면당했었다. 1998년 전일본여자오픈이 끝난 다음날 도쿄東京의 한 깔끔한 오뎅집에서 취재를 빙자해 밤새 술을 마신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골프로 내 이름을 날렸으니 꼭 보답하겠다”며 “기자 앞이니 이 약속은 지킨다”고 말했었다.

한국ㆍ일본 골프 위한 보답

자신의 이름을 건 골프대회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여차하면 모든 경비를 자기가 몽땅 감당해내야 한다. 10월 둘째주 한국에서도 ‘최경주 인비테이셔널’과 ‘박세리 인비테이셔널’이 1주 간격으로 열렸다. 두 대회는 ‘풀 스폰서’가 없었으면 무산될 대회였다. 혹시나 해서 일본에 전갈을 보냈는데 놀랍게도 16년 전 전화번호 그대로였다. 고우순은 16년 전의 기억을 또렷이 하고 있었다. “돈을 아낄 생각은 없어요. 한국과 일본 골프를 위해 벌어 놓은 돈 다 쓸 겁니다.” 한국 골프에는 지금 고우순 같은 골퍼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두 선수의 ‘~인비테이셔널’은 고우순에 비하면 민망하다.
이병진 더스쿠프 고문 bjlee284120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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