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크식 창고의 저주

5월 25일 새벽,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제일모직 물류센터를 화마火魔가 덮었다. 경비직원 1명의 소중한 목숨도 앗아갔다.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조차 쉽지 않아 현재는 아라뱃길의 흉물로 남아있다. 문제는 이 불행한 사고가 언제든 또 발생할 수 있다는 거다. 래크식 창고의 리스크를 살펴봤다.

▲ 5월 25일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제일모직 물류센터에 화재가 발생했다.[사진=뉴시스]

2년전 여름. 기자는 화재가 났던 제일모직 창고에서 두달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반품된 의류를 분류하는 간단한 재고정리 업무였다. 일이 익숙해지자 특이한 습관이 생겼다. 쉬는 시간이면 굳이 창고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는 습관이었다. 에어컨 바람이 생생 나오는 창고를 내버려두고 말이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이 창고가 웬지 부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바닥이 그랬다. 높게 쌓인 의류 상자와 이를 운반하는 크레인 때문인 듯했다.

5월 25일 새벽. 제일모직 물류창고에는 큰 불이 났다. 연면적 6만2518㎡(약 1만8944평) 규모에 1800여t의 의류를 보관하고 있던 거대한 물류창고는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6월 30일, 철거를 준비 중인 현장을 다시 방문했다. 거대한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흔적은 하얀 천이 가리고 있었다. 물류창고 인근 통로에는 떨어지는 분진을 막기 위해 안전시설이 설치됐다. 김포시가 판단하는 완전한 철거시간은 대략 6개월. 김포시 환경과 관계자는 “2차 환경오염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대책과 신속한 사고 수습을 위한 후속 대책을 논의하고 화재현장의 수질 성분검사 등을 통해 세부사항을 수립 중”이라며 “사고 수습을 빨리 할 수 있도록 행정처리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철거 작업이 지연되면서 화재원인 조사도 길어지고 있다. 사건을 종결짓기 위해서 물류창고를 수색해야 하지만 철거 작업이 끝나지 않아 여의치 않다. 경찰은 CCTV에 찍힌 협력업체 관계자를 방화 용의자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화재의 숨은 용의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바로 ‘래크식 창고’다.

래크식 창고는 창고 내에 작은 층(선반)을 만들어 물품을 수직으로 쌓고 자동화된 크레인을 움직여 물품을 반출하는 곳을 말한다. 제일모직 물류창고 역시 래크식 창고로 만들어졌다. 통상 건물 높이는 3~4층 규모로 그다지 높지 않다. 대신 창고 내에 철골 구조로 된 선반을 최고 20층까지 만들어 공간 활용을 극대화했다. 선반을 쌓기 위해 일반 평면 창고보다 천장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입체적인 수납이 가능한 래크식 창고의 수요는 점점 증가하고 있다. 물류 네트워크와 대규모 물류 창고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어서다. 7월 2일 기준으로 등록된 영업용 물류창고의 수는 4088개. 2013년 한해에만 1786개의 물류창고가 등록되는 등 물류창고시장은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 가운데 래크식 창고는 따로 집계되지 않고 있다. 업종별ㆍ규모별 분류만 돼있을 뿐이다. 물류업계 관계자는 “래크식 창고는 일반 평면 창고보다 물품을 수십배 더 보관할 수 있고 크레인으로 물품을 적재하고 반출해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며 “물류시장에서 선진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 래크식 창고의 수가 적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화재 위험에 노출된 ‘고층빌딩’

문제는 래크식 창고가 일반 창고보다 화재 위험이 더 크다는 거다. 지난해 래크식 창고에서 발생한 대형화재는 세차례나 된다. 4월 아모레퍼시픽 물류창고, 9월 한국타이어 물류창고, 10월 군포 물류창고 등이다. 이들 화재는 공통점이 있다. 내부 방재시설은 진화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진화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창고 내 제품을 모두 태웠다는 점이다.

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화마에 당한 걸까. 소방법에 따라 스프링클러(750㎡ 이상)를 설치했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래크식 창고의 특성에 있다. 천장이 높고 물류를 층층이 쌓아놔 스프링클러가 작동해도 소화가 어렵다. 높은 천정은 화재 감지기의 작동마저 늦춘다.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소방관의 진입도 여의치 않다. 동선動線이 사람이 아닌 크레인 위주로 배치돼 있을 뿐만 아니라 출입구도 많지 않아서다.

소방관이 복잡한 동선을 찾아 간신히 내부로 진입하더라도 불이 붙은 물류들 탓에 진화가 어렵다. 이는 래크식 창고에 보관하는 물품을 나누는 ‘화재위험등급’이 단순한 데서 비롯되는 문제다. 미국은 물류창고 수용물품을 화재 위험도에 따라 7단계로 나눠 배치한다. 일본은 4단계로 분류했다. 우리나라는 ‘특수가연물’ ‘특수가연물이 아닌 것’ 등 두개에 불과하다. 화재가 났을 때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빈번한 이유다.

여기에 방화셔터와 같은 방화구획 규정이 대부분 면제돼 있어 불길이 번지기도 쉽다. 쉽게 말해 래크식 창고는 좁은 면적에 물품을 수직으로 쌓아 공간 활용을 극대화한 ‘고층빌딩’이지만 방재설비는 1층 주택 수준에 불과하다는 거다. 래크식 창고의 특성에 맞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화재는 초기대응이 관건. 래크식 창고의 특성상 소방관의 신속한 진입이 어려운 만큼 자체 소방 시스템이 확립돼 있어야 한다.

물품분류기준 단순화한 게 발목

김운형 경민대(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국내 래크식 물류창고에 불이 붙으면 사실상 진화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가뜩이나 물류를 높게 쌓아놓는데 방재설비는 이 물류의 종류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박재성 숭실사이버대(소방방재학) 교수는 “창고 보유 기업들이 소방시설을 보완할 노력을 하지 않고 있어 제일모직 화재와 유사한 사고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며 “관련법 개정과 래크식 창고의 운영 실태 파악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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