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점 사업권 놓고 들썩이는 재계

▲ 정주영 명예회장은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내고 밀어붙여 난관을 돌파해 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소학교 졸업 후 농사일을 해야 했던 소년이 있었다. 가난을 벗기 위해 가출을 반복하던 그는 17살 때 아버지가 소를 팔아 마련한 돈 70원을 움켜쥐고 단신 상경했다. 그로부터 66년 뒤인 1998년 “한 마리의 소가 1000마리의 소가 돼 그 빚을 갚으러 고향산천을 찾아간다”며 두 차례에 걸쳐 소 1001마리를 끌고 휴전선을 넘어 북한 고향 땅으로 향했다. 쌀장사에서 시작해 건설회사, 자동차회사, 조선소를 세우고 금강산관광 개발사업까지 성사시켜 남북한 민간 교류의 물꼬를 튼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야기다.

11월 25일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난 지 딱 100년 되는 날이다. 만일 그가 소작인을 거느린 부농에서 태어났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중학교에 진학했다면? 공사판 십장이나 쌀가게 주인에 만족했다면? 현대기아차와 현대중공업, 현대건설로 대표되는 오늘의 현대는 없었을 것이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내고 밀어붙인 정주영의 기업가정신은 “이봐, 해봤어?”라는 짧고 강렬한 한마디로 상징된다.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 미국 포드사와 접촉할 때, 조선소를 만들면서 동시에 유조선을 건조할 때, 서산간척지 공사가 거센 물살 때문에 지지부진할 때 그는 철저한 현장주의와 과감한 도전정신으로 난관을 뚫고 목표를 이뤄냈다.

그런 그가 떠난 지 14년 ‘이봐 해봤어’ 정신을 찾아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맨 손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리스크를 감수하며 기업을 일군 창업 1세대와 달리 2ㆍ3세대는 물려받은 기업을 지켜내기 급급하다. 그 결과, 일본과 중국의 부호는 80~90%가 자수성가형인 반면 한국의 부호는 70%가 대물림형이다.

게다가 일부 대기업은 멀리 내다보고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하기보다 중소ㆍ벤처기업이 애써 개발한 것을 빼앗거나 베이커리 등 동네 자영업자들이 하는 사업을 넘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신규 투자를 망설이고 막대한 사내유보금을 쌓는 이유로 유망 신사업을 찾아내지 못한 기업의 실력 부족이 아닌 대외여건 악화와 지나친 정부 규제를 탓한다.

최근 마무리된 면세점 사업자 선정을 놓고 재계가 들썩이는 것은 ‘해봤어 정신’이 실종된 기업현실의 단적인 예다. 면허권을 따낸 기업은 환호하고, 놓친 기업은 울상이다. 연평균 20% 가까운 신장세에 연매출이 10조원에 육박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하지만, 내로라하는 국내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 만한 가치가 있는 미래 신시장은 아니다. 고도의 첨단 기술력과 연구개발(R&D)을 요구하는 분야도 아니다. 그럼에도 정부는 마치 시혜를 베풀 듯 면허권을 휘두르고, 중소기업들이 하기 힘든 신성장동력 발굴에 힘써야 할 대기업들이 면허권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은 볼 성 사납다.

‘해봤어 정신’이 사라진 기업 생태계는 역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활동기업과 신생기업의 비율로 보는 기업 신생률이 2007년 17.9%에서 2013년 13.9%로 미끄럼을 탔다. 거꾸로 2007년 13%였던 기업 소멸률은 2012년 13.8%로 높아졌다. 기업의 신생률이 낮아지는 가운데 소멸률은 높아지니 산업 생태계도 인구처럼 저출산 구조로 바뀌고 있다.

저출산 기업 생태계는 경제가 활력을 잃고 있다는 방증이다. 10년이 넘도록 주력 수출품목에 변함이 없고 창업기업마저 줄어들자 한국 경제를 지탱해온 수출마저 올 들어 감소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구호로만 창조경제를 외쳐선 안 된다. 정부는 언제까지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에 유리한 면세점 면허권을 휘두를 텐가. 도심 골목마다 편의점과 약국 등 미니 면세점이 2만개 가까이 운영되는 일본 등의 사례를 참고해 면세점 시장부터 개편하자. 정부가 틀어쥔 인ㆍ허가권을 과감히 내려놓아야 기업들이 면허장 따내기 경쟁에서 벗어나 ‘해봤어 정신’으로 재무장하고 경제도 활력을 찾지 않겠는가.
양재찬 더스쿠프 대기자 jayan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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