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역 피해자 구술집 만드는 ‘도화지’

학생들이 소셜펀딩을 받아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구술집을 만들기로 했다. 펀딩은 성공했고, 이제 책을 제작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못내 석연치 않다. 일제강점기 피해자를 돕겠다면서 만들어진 시민단체와 공공기관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어린 학생들이 나선 걸까.

▲ 도화지 회원들은 “어른들이 순수한 의도를 왜곡하려 할 때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사진=지정훈 기자]
지난 3월 4일.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와디즈’에 의미 있는 프로젝트 한건이 올라왔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발간하기 위한 소셜펀딩이었다. 700만원을 목표로 34일간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지난 7일 758만500원을 모으며 성공리에 마감했다. 137명이 성금을 내고, 174명이 지지서명을 했다. 이미 피해자 인터뷰를 진행해왔기 때문에 이르면 올해 안에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흥미로운 건 이 프로젝트의 주체가 대학생과 일부 중ㆍ고등학생들로 이뤄진 ‘도화지’라는 단체였다는 점이다. 도화지는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등 다양한 역사 문제에 관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2012년 진민식 대표를 중심으로 결성된 학생단체로, 회원은 20여명이다. 도화지는 ‘어떤 정치적 입장도 지향하지 않고 역사 관련 시민활동만을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화지가 프로젝트를 진행하자 일부에서는 “학생들이 장한 일을 한다”면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런 칭찬과 격려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다. 왜일까. 더스쿠프(The SCOOP)가 지난 9일 도화지 회원으로 활동하는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속내를 들어봤다.

✚ 펀딩 성공을 축하한다. 소감이 있다면.
박승민(23ㆍ대학생) : “펀딩 마감기간이 보름밖에 안 남았을 때 목표금액의 절반도 모으지 못해서 애가 탔는데, 임원진들이 전국을 돌면서 펀딩을 유치한 게 결실을 본 것 같아 뿌듯하다. 값진 첫발을 내디딘 만큼 잘 만든 책으로 보답하고 싶다.”
김소정(19ㆍ고등학생) : “강제징용으로 피해를 당한 생존자 분들의 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얻은 것 같다.”
김태렬(23ㆍ대학생) : “얼떨떨하다. 뿌듯하다기보다는 책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크다.” 
박혜영(15ㆍ중학생) : “사람들이 강제징용 생존자들의 얘기에 관심을 가져 줄까 생각했는데, 펀딩에 성공하고 나니까 왠지 책이 나오면 많은 사람들이 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선희(20ㆍ대학생) : “정말 기쁘다. 실패할 거라는 말을 많이 들어서 더욱 그렇다.”
정예지(20ㆍ대학생) : “잘 알려지지 않은 학생단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믿고 동참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그만큼 완성도 높은 책을 만들어 내놔야 할 것 같다.”

✚ 학교도 지역도 나이도 다른 이들이 모였다. 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나.
안지영(25ㆍ대학생) : “열정은 가득하지만 아직 경력이 부족한 학생들이 모이다 보니 일이 특정한 회원에게 치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은 많고, 사는 곳은 달라 SNS에만 의존해 소통하려니 제약이 많았다. 개선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미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안지영씨는 휴학을 하고 한국에 들어와 도화지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에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들의 구술집에 들어갈 특별한 로고를 만든 이가 바로 안지영씨다.

‘돈 안 되는 일’이지만 의미 있는 일

장선희 : “책을 만드는 것도, 펀딩도 처음이라 미숙한 점이 많았다. 하나씩 배우면서 해결해가는 것도 재미있다.”

학생들은 펀딩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로 기뻐했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만큼 책을 잘 만들어야겠다는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주변에서 ‘힘들 거다’ ‘실패할 거다’ ‘해봐야 소용없다’ ‘돈도 안 되는 일을 왜 하느냐’는 등의 말을 숱하게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이번 프로젝트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어땠나.
김도희(21ㆍ대학생) : “이런 활동으로 어떤 정치색을 띠게 되는 게 아닐까 하면서 부모님이 걱정하셨다. 도화지는 정치색을 띠는 곳이 아니니 걱정 마시라 했다.”
엄선경(20ㆍ대학생) : “그냥 관심 있고 좋아서 하는 일인데, ‘스펙 쌓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이들이 많아서 힘들었다.”
이민우(18ㆍ고등학생) : “‘돈 안 되는 일’이라는 말을 꽤 들었다. 하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 책이 나오면 부모님께 자랑할 거다.”
김태렬 : “애초엔 경찰이 꿈이어서 경찰행정을 전공했지만 지금은 다른 길을 가려 생각 중이다. 그래서 부모님과 마찰이 심했다. 부모님께서는 반대하셨지만, 도화지 활동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처음엔 격려보다는 오해와 비아냥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도화지가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들의 얘기를 책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해 8월 TV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통해 생존자들의 사연을 접하면서다. 학생들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걸 봤다”면서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또다시 잊는 걸 보면서 이 일을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무작정 수소문을 해서 생존자인 강낙원 할아버지를 처음 만나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할아버지는 “학생들이 이런 얘기에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면서 자신과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줄 수 있느냐고 제의했다. 그래서 도화지에서 책을 내겠다고 결심했다.

✚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들이 기록을 남기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뭔가.
진민식(23ㆍ대학생ㆍ도화지 대표) : “생존자 분들은 연세가 많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얘기다. 그분들은 지원금이나 보상금 등을 요구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억울한 일을 당한 자신들을 후대에서 잊지 말아달라는 거였다.”

✚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
박승민 : “그렇다. 인터뷰고 뭐고 얘기를 처음 시작하는 것부터 어려웠다. 생존자들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서다. 또한 어르신들이 처음 보는 학생들에게 마음 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김소정 :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시기가 딱 우리들 나이 때다. 정해진 시간도 없이 굶어가면서 중노동에 시달렸던 얘기를 듣노라면 요즘 시대에 태어나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사는 게 죄송할 정도다. 이런 감정들을 꾹꾹 누르는 것도 쉽지 않더라.”

 
조남준(20ㆍ대학생ㆍ한국청소년통역단 단장) : “가끔은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가 아닌데도 자신을 생존자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는 분들은 배제할 수밖에 없다. 그분들을 달래서 돌려보내는 것도 힘든 일 중 하나였다.”

✚ 강제징용 피해자를 위해 활동하는 시민단체들도 있다. 왜 굳이 힘든 일을 자청하나. 
진민식 :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들의 얘기를 구술집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만 갖고 여기저기 찾아다녔다. 그런데 어떤 곳도 우리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시민단체들에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좀 기다려볼 수 있지 않았나. 
김태렬 :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시민단체들은 기다려달라는 것보다는 무관심 혹은 거래를 원했다. 기존의 시민단체들이 있음에도 우리가 이 일을 굳이 직접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 
김태렬 : “이런 활동을 하면 어디 이익단체로부터 큰 후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에게 ‘우리는 그런 단체가 아니다’고 일일이 설명하는 게 힘들었다. 도움을 청해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기브 앤 테이크(Give & Take)’를 제시할 때는 정말 실망했다. 어떤 시민단체에서는 자신들이 판매하는 물건을 사 달라 했다.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하자 차갑게 돌변하더라.”

▲ 도화지에서 제작한 로고.[일러스트=도화지 제공]
✚ 시민단체에서만 그런 제의를 받았나. 
박승민 : “아니다. 일부 정치권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무보수로 선거운동을 도와 달라 하기도 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일을 돕겠다고 했다. 뭐 하나 공짜로 내놓지 않겠다는 의도가 강해 보였다.”
조남준 : “사실 학생들이 어떤 활동단체를 꾸릴 때는 대부분 순수한 의도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단체가 조금 규모가 커지거나 하면 이익집단이나 특정 정치색을 가진 시민단체에서 악용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청소년통역단만 해도 이익집단에 의해 조직이 와해됐다가 다시 되살린 경우다. 그럴 땐 정말 힘 빠진다.”

이 사회가 무섭지만 딛고 일어설 것

조남준씨는 한국청소년통역단 단장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에게 무료통역과 가이드를 재능기부하려는 취지로 2014년에 결성했다. 도화지 회원 중에는 통역단을 통해 가입한 학생들이 꽤 있다.

✚ 그런 일들이 자주 있는가.  
진민식 : “비일비재하다. 도화지가 생긴 것도 그런 모습에 실망한 탓이 크다. 고등학생 때부터 역사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시민활동에 동참해왔는데, 정작 시민단체들은 학생들을 이용해서 특정한 물건을 판다든지, 정치적인 행사에 참여하라든지 요구하는 게 많았다.”
조남준 : “거의 모든 자발적인 학생단체가 그런 일들을 겪는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통역단의 경우 어떤 곳에서는 우리가 만든 가이드 대본이나 회원 명단도 달라 하기도 한다. 중ㆍ고등학생의 경우 봉사시간을 대체하기 위해 오는 경우도 있는데, 봉사시간을 받는 대신 물건을 사라고 강매할 때도 있다. 그래서 경험이 있는 친구들은 큰 단체와는 가능하면 접촉하지 않는다. 시민활동가들끼리도 못 믿게 되는 셈이다.”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들의 명예를 지켜주지 못한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학생들을 이용해 잇속을 챙기려 했다는 얘기다. 중요한 건 정작 기성세대의 이런 모습에도 학생들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다는 거다.

✚ 그래도 힘이 빠진 것 같지는 않다.  
진민식 : “펀딩에 성공하면서 가능성에 한발짝 다가선 만큼 더 힘을 내야 할 시기다.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낭비할 시간이 없다. 아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실천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거라 생각한다.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완성할 생각뿐이다.”
박승민 : “이 사회를 보고 겪으면서 실망도 많이 했고, 또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우리 도화지를 한층 더 성장시키는 계기가 될 거라 본다.”

✚ 책 발간 목표를 언제쯤으로 잡고 있나.  
진민식 : “인터뷰를 어느 정도 진행했으니 6~8개월 후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르면 올해 안에 책이 나올 수도 있을 거란 얘기다.”

▲ 도화지가 만들려는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들의 구술집은 이르면 올해 안에 발간될 예정이다.[사진=지정훈 기자]
정예지 : “책에는 펀딩에 참여했던 분들의 이름이 들어간다. 펀딩액수에 따라 도화지에서 만든 특별한 로고가 박힌 텀블러와 서류파일, 스티커 등도 나눠 드릴 예정이다. 책이 발간되면 더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물론 도화지 학생들의 생각보다 더딘 작업이 될 수도 있다.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들의 구술집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서다. 기록물의 성격도 있고, 경우에 따라 외교적 마찰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도화지 학생들은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안 된다고 하던 게 하나하나 현실이 되고 있다. 유리천장을 하나씩 뚫는 느낌이다. 이게 바로 진정한 시민활동이 아니겠는가.”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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