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민낯 충무로 인쇄골목 속으로…

▲ 경기불황과 인쇄업의 쇄락이 맞물려 충무로 인쇄골목은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열심히 살아봐야 제자리걸음이다.” “문 닫고 싶어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한숨은 깊었고,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서울시 중구 충무로 인쇄골목 상인들은 디지털 발달로 인한 인쇄업의 쇄락, 긴 경기침체의 직격탄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서울의 슬픈 민낯을 볼 수 있는 인쇄골목 한복판으로 더스쿠프(The SCOOP)가 들어가 봤다.

6월 8일 낮 12시 45분 충무로역 7번 출구.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내리쬐는 뙤약볕쯤은 별게 아니라는 듯 노점상인이 1500원짜리 김밥을 팔고 있다. 아래쪽으로 유커游客(중국인 관광객)를 태운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다. 무리 지은 유커가 향한 곳은 맞은편 건물 지하에 위치한 건강기능식품 매장. 그들은 이내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자취를 감췄다.

몇걸음 옮기자 드디어 인쇄골목. 수많은 음식점과 인쇄업체가 길게 늘어서 있는 골목은 점심시간 막바지인데도 비교적 한산했다. 마침 점심식사를 마친 후 시원한 커피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있는 중년 남성과 마주쳤다. 8년째 인쇄업체를 운영 중인 김경한(가명ㆍ60)씨는 예전에 비해 인쇄수요가 많이 줄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토로했다. “저거 봐요. 기계가 안 돌아가잖아요.” 그의 손이 가리키는 가게 안에는 바삐 돌아가야 할 기계가 미동도 않은 채 떡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무실로 사용하는 2층은 임대료가 부담스러워 함께 쓸 사람을 찾고 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하청으로 밤낮 없이 기계를 돌리면 뭐해요. 물건만 가져가고 돈은 안 주는 걸. 그것도 깎고 깎아서 해준 건데…. 그렇게 깔린 미수금만 수억원이에요. 어쩌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이 피해를 보는 사회가 됐는지 모르겠어요.”

과거에도 사정이 어려워져 가게 문을 닫은 경험이 있다는 김씨는 요즘 들어 그때를 다시 떠올린다. “이 골목이 잘될 땐 짐 싣고 다니는 삼륜오토바이 소리로 시끌시끌해요. 소리가 꽤 크거든. 근데 지금소리가 확 줄었어요. 그만큼 일거리가 없다는 거예요.”

인쇄소와 음식점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이정숙(57)씨는 남편과 함께 맞춤양복점 ‘칸티넨탈’을 35년 넘게 운영 중이다. 남편이 만든 바지에 단추를 달며 이씨는 “주문이 확 줄었다”고 했다. 대화를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바늘을 움직이던 그가 갑자기 “왜 정치인들은 싸우기만 하고 우리 같은 자영업자들은 구제해주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민들은 도둑질을 할 수도 없고 사기를 칠 수도 없잖아요. 열심히 살아봐야 제자리걸음이고 빚만 늘어요. 노력하는 대가가 없다니까요.”

“왜 자영업자는 구제 안하나”

▲ 인현시장은 오랜 시간 영세 상인들과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의 고단함을 달래줬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원망 섞인 한숨을 뒤로하고 다시 선 골목. 인쇄업체와 음식점 간판들을 따라 골목을 걷다보면 그 끝, 진양 꽃상가 입구에60여 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현시장이 있다. 오랜 시간 인쇄골목의 영세 상인들과 주머니 가벼운 직장인들의 고단함을 달래준 곳이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고등어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홀리듯 눈앞에 보이는 ‘강화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식사를 하는 이들로 식당은 붐볐고 여행 가방을 끌고 온 외국인도 보였다.

하지만 정작 상인들은 인현시장이 활기를 잃은 지 오래라고 푸념을 늘어놨다. 문을 닫는 인쇄소가 점점 늘어나고, 회식차 시장을 찾는 직장인도 계속 줄어들고 있어서다. 8년째 강화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태희(50)씨는 “예전엔 낮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식당에 발 디딜 틈도 없이 손님으로 가득 찼는데 요즘엔 오후 1시면 한산해진다”며 “요즘 같아선 차라리 식당을 접고 다른 식당에 종업원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정산 때마다 손에 쥐는 돈이 자꾸 줄어들고 있어서다.

옆집 사정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10년째 ‘아산집’을 운영하고 있는 강혜선(53)씨는 “손님이 줄어든 것보다 재료값 감당하기가 더 어렵다”고 말했다. 천정부지로 오른 식재료 값이 걱정이지만 단골손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점심 값 5000원을 고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요즘 같은 때 어디 가서 5000원짜리 밥을 먹을 수 있겠어요.” 한쪽에서 늦은 점심을 먹던 인쇄업자 김현우(42)씨. 그는 운영 중인 인쇄소의 일거리가 자꾸 줄어들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자금난 때문에 3개월 전에는 5년 동안 동고동락하던 직원마저 해고했지만 여전히 적자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시장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도 골목이 변하고 있다는 데 고개를 끄덕였다. 4년 전 한국인 직장동료와 함께 인현시장 치킨집에서 통닭 한 마리와 시원한 맥주를 마시던 기억이 뇌리에 강하게 남았다는 미국인 앤드류(35)는 일부러 신혼여행지로 서울을 택했다. 아내 스테파니(35)에게 삼륜오토바이와 사람이 뒤섞인 생동감 넘치는 거리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찾은 인현시장 분위기는 4년 전과 달랐다. 앤드류는 “지금은 너무 조용해졌다”면서 “한 마리 5000원인 통닭으로 아쉬움을 달랬다”고 말했다.

왔던 길을 돌아 인쇄골목을 빠져나오기 전, 입구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봉투제작업체 ‘동성봉투’에 다시 들렀다. 처음 방문했을 땐 자리를 잠시 비운 주인 대신 왈왈 짖어대는 강아지가 맞아준 곳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유명인’인 주인이 활짝 웃으며 취재팀을 맞이했다. 미디어에도 몇번 소개가 됐던 ‘봉투의 달인’, 간판 속 실제 인물인 김미숙(61)씨였다. 김씨는 한 자리에서만 30년째 남편과 함께 봉투제작업체를 운영 중이다. 그런 김씨도 “한해 한해가 다르다”면서 30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야간근무, 철야를 밥 먹듯이 했어. 여기 식당도 잘됐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어렵지. 다들 어려운가봐. 엊그제도 거래처 사장님이 와서 눈물바람을 하고 갔어.”

“힘들어도 어쩌겠나, 일해야지”

김씨는 부푼 꿈을 안고 이 골목에 들어왔다가 몇 년도 안 돼 가게를 빼는 사람들도 수없이 봐왔다. 그런 김씨가 대화 끝에 “솔직히 이런 얘기 안 하고 싶다”고 했다. 괜히 마음만 울적해진다는 게 그 이유였다. “힘들어도 어쩌겠어. 희망을 갖고 긍정적으로 일해야지.”

모두가 김씨처럼 ‘달인’으로 유명해질 수도, 긍정적인 마음만을 가질 수도 없다. 골목은 갈수록 활기를 잃어가고 사람들은 버티다 못해 하나둘 떠나고 있어서다. 그렇다고 시간을 거슬러 인쇄업이 활황이던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러는 사이 인쇄골목은 이름 없는 유적처럼 방치되고 있었다.
김미란ㆍ노미정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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