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사가 부리는 ABS 마술

당신은 고가의 스마트폰을 어떻게 샀는가. 십중팔구 할부 구매 시스템을 활용했을 거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다. 이통사 대리점도 ‘현금’이 아닌 ‘할부’를 권한다. 단말기 대금을 한꺼번에 받는 게 더 편리할 것 같은데도 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비자의 할부금으로 자신들의 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 이동통신 3사는 단말기 할부채권을 자산유동화증권(ABS)으로 만들어 금융권에 팔 수 있다.[사진=뉴시스]

한국시장에 스마트폰이 등장한 2009년 우리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알람에서부터 버스 도착 시각을 확인하고 집을 나서기까지, 우리의 하루는 스마트폰과 함께 시작하고 끝이 난다. 물론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편리한 삶만 제공한 건 아니다. 편리해진 만큼 몸값도 올랐다. 특히 제조사끼리의 스펙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말기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았다. 100만원을 넘는 단말기까지 시장에 등장했다. 소비자들이 휴대전화 단말기를 할부로 구매하는 게 일상이 된 건 이때부터였다. 

휴대전화 단말기의 할부구매가 가능해진 건 1996년. 과열경쟁을 우려해 할부 판매를 허용하지 않았던 정보통신부(현 미래통신과학부)는 소비자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정책을 바꿨다. 하지만 이런 단말기 할부 시스템이 이통사의 배를 불리는 수단으로 악용됐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통신업계의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대형 이동통신사는 2009년 이후 할부 판매금을 담보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금의 금융비용과 회사채 발행을 통한 금융 비용의 차액을 이통사가 가져가는 걸 아는 이는 드물다. 고객의 돈으로 뒷주머니를 채우고 있다는 거다.”

조금 복잡한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스마트폰 유통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스마트폰의 판매처는 단말기 제조사가 아닌 이통사다. 이통사가 제조사로부터 단말기를 대량 구입해 직영점과 대리점에 유통한다. 대리점은 이 단말기를 판매하거나 혹은 다시 판매점(이통3사의 휴대전화를 모두 파는 2차 매장)에 넘긴다. ‘단말기 제조사→이통사→대리점ㆍ판매점→소비자’의 구조다.

 
만약 소비자가 단말기를 할부로 구입하면 유통경로는 더 복잡해진다. 96만원짜리 휴대전화 단말기가 있다고 치자. 소비자가 24개월 약정으로 이 단말기를 구입했다면, 해당 판매점은 매월 4만원의 단말기 할부채권(판매대금)을 소유하게 된다. 판매점이 운영자금을 마련하고 싶다면 이 할부채권을 팔면 그만이다. 흥미롭게도 이걸 사는 곳은 ‘이통사’다. 판매점에서 단말기를 구입한 우리가 이통사에 요금을 매월 납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소비자의 할부채권은 이통사에 넘어갔다. 이때 이통사는 2~3년에 걸쳐 회수해야 할 판매대금으로 마법을 부린다. 자산유동화증권(ABS)을 활용해서다. 이통사는 유동화 전문 SPC를 설립하고, 이곳을 통해 판매대금을 담보로 ABS를 발행해 자산을 만든다. 이통3사가 ABS를 통해 끌어모은 자금은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3조3000억원. 자동차 할부대금 ABS(3조2403억원)나 신용카드 할부금 ABS(1조2459억원) 발행 규모보다 많다. 단통법이 시행되기 직전인 2013년에는 10조7000억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ABS 유통시켜 수조원 모아

ABS가 이통사에 주는 혜택은 어마어마하다. 할부기간 묶일 수밖에 없는 자금을 끌어와 단말기를 구입하거나 마케팅 비용에 활용할 수 있어서다. ABS를 통해 ‘이통사 단말기 대량 구매→판매점 할부 판매→할부 채권 매입→ABS 발행→이통사 단말기 대량 구매’라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혜택은 또 있다. 매출채권을 두고 충당부채를 쌓아야 하는 회계 부담도 없어진다. ABS 발행을 위해 단말기할부채권을 SPC에 넘기면 부채 비율이 하락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말기할부채권 ABS는 신용등급이 높아 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안전자산을 기초로 발행되기 때문에 AAA등급으로 발행된다. 이는 통신 소비자 대부분이 매월 요금을 납부하기 때문이다. 큰 변수가 없는 한 만기에 원리금을 지급받는 데 무리가 없다.

노재웅 한국신용평가 연구원은 “통신사들이 단말기 할부대금채권으로 ABS를 발행하면 부채비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현금을 쉽게 마련할 수 있다”면서 “LG유플러스의 회사채 신용등급은 AA이지만, ABS는 AAA로 평가 받아 우량한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통사가 스마트폰 출고가를 낮추는 데 소극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말기 출고가를 높이면 높일수록 단말기할부채권 ABS를 통해 더 많은 자금을 융통할 수 있어서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ABS는 대형 이통사들이 알뜰폰 사업자와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알뜰폰 사업자는 ABS 발행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뜰폰 사업자가 ABS를 발행하는 절차는 이통사보다 훨씬 까다롭다. 무엇보다 발행에 필요한 보증보험 가입 문턱이 높다. 유통을 담당하는 금융회사가 채권매입 자체를 거부하거나 리스크를 높게 책정해 비싼 수수료를 매겨서다.



이용구 통신소비자협동조합 상임이사는 “이동통신의 대중화를 위해 허용한 할부판매가 정작 이통사의 신용창출에 활용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면서 “이를 통한 이익은 이동통신사의 마케팅 강화가 아닌 소비자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단통법 도입의 계기가 됐던 ‘보조금 과열 현상’도 이동통신사가 ABS를 마음껏 발행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단말기 할부판매 시스템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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