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죽여 우는 ‘피해자’가 아닌 단단히 뭉쳐 소리를 내는 ‘우리’가 되길” 

[이미지 편집 = 한송희 에디터]

[뉴스페이퍼 = 이민우 기자] 어린 시절 누구나 하나쯤 자신만의 ‘애착인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핑크 코끼리나 곰돌이 인형 대신 작은 이불이 있었다. 아직도 버리지 못해 서랍장 한구석에 놓여 있는 이불은 이제 내 배만 겨우 가릴 수 있다.

아이들은 태어나 양육자를 ‘안전기지’로 인식을 한다고 한다. 무조건 나를 지켜주고 지지해 줄 무언가. 하지만 양육자와 함께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아이는 양육자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곤 한다. 그것이 바로 ‘애착인형’이다.

견딜 수 없는 고함소리나 던져지는 물건들을 견뎌낼 때, 나는 그 얇은 이불을 두르곤 했다. 한국에서 미성년자의 40%가 경험한다는 보호자로부터의 육체적 폭력 속에서 나만의 새로운 ‘안전기지’를 찾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 괴로워하곤 한다. 이처럼 안팎으로 불안한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 잊혀 가던 ‘안전기지’가 다시 찾아왔다.

문예 앤솔로지 “이불아지트”는 현대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주제로 시작됐다. 평온한 일상을 위협하는 다양한 종류의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이번 프로젝트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이불아지트 기획팀원 최지현, 김보관의 글을 비롯한 김연덕, 류휘석, 성다영 시인의 시편과 이승하 시인의 평론 ‘대한민국 일부 남성 문인들의 여성관에 대하여’는 발칙하면서도 단단하게 약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불아지트” 엽서 이미지 [사진 제공 = 이불아지트]

Q. “이불아지트”는 세 명의 팀원이 모여 진행한 독립 프로젝트로 알고 있습니다, “이불아지트”를 기획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 보관: 어느 겨울 누군가에게 뺨을 맞고 난 뒤의 일이에요. 떨림과 분노, 무기력함과 억울한 마음 사이에서 방황하다 문득, ‘그래서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지?’ 하는 질문이 떠올랐어요. 이런 유형의 폭력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죠. 그건 제 주변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어요. 뺨을 맞았다고 하니 조금 과격한가요? 그럼 조금 수위를 낮춰볼 수 있어요.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과도한 체벌, 원치 않는 행동의 강요, 근거 없는 소문, 예측하지 못한 장소에서 마주하는 불쾌한 접촉들까지. 누군가는 일상처럼 겪는 순간들 곳곳에 그림자처럼 폭력이 잠재하고 있어요.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 이야기를 더욱 많은 사람과 나눠보고 싶어졌죠. 가만히 숨죽여 우는 ‘피해자’가 아닌 단단히 뭉쳐 소리를 내는 ‘우리’가 안전히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부푼 뺨을 호호 불던 어떤 하루는 다시금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이자 이불아지트가 시작된 날이에요. 

Q. “이불아지트”라는 이름이 독특합니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나요?

- 보관: 이불아지트는 우리가 어릴 적 한 번쯤 만들어 보았거나 꿈꿔보았을 ‘나만의 공간’이에요. 의자나 장롱문에 이불을 동여매고 텐트 모양을 만들어 그 아래에 숨어든 기억, 혹시 있으신가요? 저는 동생과 인형을 초대해서 키득거리던 기억이 나요. 먼지가 난다는 부모님의 잔소리도 듣지 않고요.

그때 그 시절 이불과 의자, 가구 따위로 만들어진 작은 아지트가 우리를 포근히 감싸 안은 것처럼 훌쩍 자란 우리를 지켜줄 또 하나의 아지트를 마련해보았습니다. 우리만의 무해한 아지트를 구축하고 함께 ‘폭력’을 고발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목소리는 시와 소설, 음악과 그림, 다양한 옷을 입고 독자분들을 찾아갈 거예요. 이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닿아 더 많은 이들이 함께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라요.


이처럼 “이불아지트”는 앤솔로지 단행본과 함께 타 장르와의 접목을 시도하기도 했다. 포근한 아지트가 되겠다는 다짐처럼 보다 편안한 일상을 위한 다채로운 창작물을 준비 중이다. 한편, 각각의 자리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한 세 사람에게 ‘폭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불아지트” 프로젝트 유리잔 [사진 제공 = 이불아지트]

Q. “이불아지트” 팀원분들에게 가장 최초의 ‘폭력’은 어떤 기억인가요? 혹은 요즘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지현: 저는 사회에서 목격한 최초의 폭력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영문과 신입생 때 단체카톡방에서 선배가 여자 동기를 성희롱한 일이에요. 사건이 커지자 여자 신입생만 다시 카톡방에 초대해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면 새 카톡방에서 얘기하자’라거나 ‘서로 조심하자’고 했습니다. 몇 주 뒤 여자총학생회가 열렸고 그곳에서는 피해 사실과 그에 대한 해결책이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 선배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조용히 휴학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편, 요즘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사소한 것도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입니다. 별 의미 없이 한 말이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든가 하는 일들이요. 누군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당사자는 계속 곱씹게 되는 것들이 있죠. 

이를테면 ‘~했어야지.’라는 말투가 자기처벌적이다고 느낀 적이 있었어요. 나에겐 최선이었을 것이 최선을 인정받지 못했을 때, 자신을 탓하거나 그간 해 온 노력을 의심하곤 하죠. 그래서 되도록 남 탓하는 말투를 쓰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요. 저도 모르게 “~했어야지. 네가 안 한 거잖아.”라는 말이나 생각이 튀어나올 때를 경계합니다.

- 보관: 저는 제가 폭력의 가해자였던 기억이에요. 대여섯 살 무렵 할머니 댁 시골길을 걸으면서 ‘애기똥풀’이라는 들꽃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줄기를 꺾으면 샛노란 진물이 나오는 식물이에요. 그게 신기해서 애기똥풀 꽃가지를 수도 없이 꺾어서 시멘트 바닥에 글씨를 썼어요. 진물이 다 떨어지면 꺾은 꽃대를 버리곤 새 꽃을 꺾었어요. 요즘 저는 그 장면을 자주 떠올려요. 나의 재미를 위해서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간 거잖아요. 그때는 애기똥풀이었지만, 그다음은 뭐가 될지 몰라요. 그런 일들이 우리 사회에도 자주, 그리고 쉽게 반복되고 있으니까요. 몰랐다는 핑계를 대고 싶지 않아요. 앞으론 그 어떤 것도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합니다.

- 태림: 요즘은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폭력에 대해 자주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도 최초의 폭력은 가정 내, 가족에 의한 폭력이 아닐까요. 저희 아버지께선 참 좋은 분이지만 어릴 적 집에서 크게 소리치시곤 하셨어요. 저를 향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았지만, 아버지를 말릴 수 없었던 전 위협적인 분위기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 시절에 ’이것도 폭력일까’하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조금 더 자라고 나서 ‘언어폭력’이란 단어를 알게 됐을 때 충격이 생생해요. 그러려니 하며 지나쳐 왔다고 상처를 남기지 않는 건 아니에요. 성인이 된 지금도 악몽을 꾸면 굉음과 욕설이 귀를 괴롭히는 걸 보면 말이에요.


실제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된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아동청소년인권실태조사’에 따르면 한해에 부모님으로부터 모욕적인 말을 들은 언어폭력 피해자는 30.2%에 달한다. 어릴 적 새겨진 상처는 어른이 된 후에도 트라우마로 남아 일상을 방해한다.

이불아지트는 이러한 가종폭력 뿐만 아니라 흔히 지나칠 수 있는 데이트폭력, 쉽게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성폭력 등 우리가 마주치는 여러 양상의 폭력을 다루고 있다.

“이불아지트” 목차 구성 [사진 제공 = 이불아지트]

Q. “이불아지트” 앤솔로지에 담긴 내용을 소개해주세요. 목차와 구성은 어떻게 되나요?

- 보관: 이불아지트의 목차는 어디에나 있지만(Now here), 어디에도 없는 (No where) 것처럼 지워져 가는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조명합니다. 

첫 번째 코너 ‘시시때때’에서는 젊은 시인들의 시와 작가 노트를 읽을 수 있습니다. 활발히 활동 중인 김연덕, 류휘석, 성다영 시인님이 함께해주셨습니다. 세 분은 각각이 떠올리는 ‘폭력’을 시적 언어로 그려주셨어요. 더욱 많은 분을 모시고 싶었지만, 팀원들의 자비로 원고료를 부담한 만큼 현실적인 벽이 있었어요. 아쉬운 마음속 소중한 원고를 모았습니다. 

‘어디에나 있고’는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담은 챕터에요. 이불아지트 기획팀의 시 세 편과 에세이 한 편이 실려있습니다. 다음 장인 ‘어디에도 없는’에서는 데이트폭력과 가스라이팅을 다룬 단편소설을 읽으실 수 있어요.

마지막 순서인 ‘돌아보기’에서는 이승하 시인의 비평문 ‘대한민국 일부 남성 문인들의 여성관에 대하여’를 만날 수 있습니다. 김수영부터 박인환, 신동엽까지. 우리가 흔히 지나쳤던 유명 시인의 시편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참,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 태림님과 작곡가 송명훈님의 작업도 주목할 만합니다. 아기자기한 그림과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은 ‘이불아지트’의 컨셉을 더욱 효과적인 방식으로 전달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됐어요. 텍스트가 아닌 매체로도 전해지는 감정이 있으니까요.

Q. 이번 “이불아지트”를 통해 독자들이 어떤 걸 얻어가길 바라시나요? 추가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 태림: 독자분들에게 작은 위로 혹은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여러 가지 폭력의 피해자들은 마음 한구석에서 자기 탓을 해요. 어릴수록, 기댈 곳이 없을수록 자책하기 쉬워지는 것 같아요. ‘혼자가 아니구나’, ‘내 탓이 아니구나’라는 작은 메시지 하나가 누군가에겐 큰 의미가 될 거라 믿습니다. 이는 결국 문학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는 듯해요. 어떤 고통도 혼자 감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두려움은 외면할수록 커지고 용기는 드러내기 전 가장 초라합니다.

- 지현: 이번 문예지를 준비하며 폭력과 연대를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즘에 일어나는 폭력을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며 무기력할 때가 많았는데 저와 같은 입장을 가진 주변 사람들이 있어 포기하지 않았고, 조금이나마 세상이 더 나은 쪽으로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불아지트 독자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보관: 자본의 어려움이 있지만, 가능하다면 지속 가능한 아지트를 구축하고 싶어요. 더 많은 이들이 모여 쉴 수 있는 아지트를 꿈꾸고 있어요. 이번 팀원 모집에서 등단과 비등단, 문학과 비문학, 심지어는 예술의 형식이나 장르를 제한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인데요. 지금은 열 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지만, 언젠가 더 넓고 큰 아지트를 내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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